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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는, 과거의 과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다. 유발 하라리 교수가 한 말이다. 인간 조직으로서 교회의 과오는 지구상에 존재하는 다른 어떤 기관에 못지 않았다. 그 과오를 파헤치는 것은 교회를 비난하거나 권위를 무너뜨리려는 시도가 아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에서 '진리'는 그다지 대단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단순한 사실 하나도 무의미한 공포와 억눌린 결박에서 놓여나는 계기가 된다.  

 

2019년 프란치스코 교황은 비오 12세의 재위 시절 비밀 외교 문서 공개를 결정하면서 "교회는 역사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비오 12세는 1939년부터 1958년까지 교황으로 재위했다. 원래 교황의 문서들은 재위 종료 70년이 지나야 공개되는 법인데, 예정된 2028년보다 10년 앞당긴 이유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이 아직 살아 있는 동안 이 문제를 마무리하기 위해서다.  바바리아 출신의 라찡어 추기경, 베네딕토 16세는 비오 12세의 문서들을 내부 조사하고 '부정적 주장'에 대한 뒷받침은 없다고 단언했었다. 심지어 비오 12세가 홀로코스트에서 다른 누구보다 더 많은 유대인을 구했다는 주장도 나왔다. 

 

2013년 영국 작가 고든 토마스는 바티칸 문서를 조사해, 비오 12세가 유럽 전역의 수도원에서 유대인을 숨기도록 승인했으며 유대인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사제들의 비밀 작전을 감독했다고 주장했다. 덕분에 이탈리아와 헝가리의 유대인 수천 명이 가톨릭 신자라는 가짜 서류를 받았으며, 이탈리아 수도원에 숨어 살아남은 유대인이 4,000명이라는 증거도 제시했다.

 

교황들이 당당하다는데, 내가 뭐라고 걱정을 사서 하나.

 

조직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지켜야 할 생존의 법칙들이 있고, 그건 단순한 흑백으로 가릴 수 없는 복잡한 배경을 갖는다. 독일 교회 대표 로타 쾨니히 목사는 1942년 12월 14일자 비오 12세에게 보낸 편지에서, 폴란드 벨제크 수용소에서 매일 최소 6,000명이 살해되고 화장되고 있다고 썼다. 편지 말미에는 뮌헨 근처 다카우 강제 수용소에 수감된 독일 교회 성직자 숫자가 나열되고,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대한 언급도 있다. 편지의 목적은 독일 교회에 대한 박해를 바티칸에 알리는 것이었다. 이 편지의 공개가 늦어진 건, 저자를 추적하는 데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다. 편지의 수신자는 교황의 개인 비서이자 오른팔로 불린 독일계 신부 로베르트 리버였다. 교황이 이 편지를 읽지 않았을 가능성은 여전히 있지만, 교황의 비서만큼 믿을 만한 소식통은 교황에게 없었다. 비오 12세는 학살 수용소에 대해 알고 있었지만 침묵을 지키는 쪽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 침묵에 대의를 부여했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유대인들이 비오 12세를 비난하는 것은 홀로코스트 사건에 대해 침묵했고 이를 막기 위해 충분한 조치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오 12세는 공산주의를 더 두려워했고, 나치가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라고 믿었으며, 수백만 명의 독일 가톨릭 신자와 나치 동조자들이 등을 돌릴까봐 히틀러와 맞서지 않았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지역 단위에서 가톨릭 신자들은 은밀히 나치로부터 유대인을 구했고, 당시 교황의 침묵은 나치의 표적이 되는 것을 피하기 위한 지혜로운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그 유명한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D-day는 1944년 6월 6일이고, 아우슈비츠가 해방된 것은 그로부터 반년이나 지난 1945년 1월 27일이었다. 이 기간에 희생자의 숫자는 이전보다 훨씬 컸다. 연합군이 학살 수용소에 대해 미리 알았더라면, 이들을 구해낼 의지가 있었다면 상황은 많이 달랐을 것이다. 경거망동할 수 없는 자리에서 무겁게 사명을 감당하느라, 평범한 약자들의 희생을 두고만 보아야 했던 사람들, 그 역사에서 정말 배울 게 없나. 정말 두렵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