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란고원에 갈릴리 바다 킨네렛을 내려다보는 감라Gamla가 있다. 낙타를 뜻하는 아람어다. 히브리어 가말, 아랍어 자말이다. 낙타봉처럼 솟아 있기 때문이겠지. 기원후 67년 10월 12일 감라의 유대인은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결국 로마에 멸망한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요세푸스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에 의해 대부분 살해당한다. 낙화수처럼 떨어지는 그들의 시신으로 갈릴리 바다는 피로 물들었다. 2000년이 지난 1967년, 유대인은 골란고원으로 돌아왔고 1968년 고고학자들은 고대 도시를 발굴했다. 성벽을 부수는 공성전에 사용된 발리스타 볼과 화살촉 외에, 아름다운 회당도 발견됐다. 저기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가면 감라의 회당에 도달할 수 있다. 벤치도 없고 예루살렘을 향하지도 않는 특이한 회당이다. 주전 1세기 알렉산더 야나이가 헬레니즘 왕국으로부터 요새를 빼앗고 세웠을 것이다.
갈릴리 바다, 킨네렛이 보이는 아름다운 감라는 기념촬영과 함께 가뿐하게 떠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곳은 아니다. 자살과 절망에 대한 극적인 이야기가 여기 있다. 왜 로마인들은 이렇게 사소한 도시를 공격해야 했을까? 심지어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도 아니다. 굳이 돌아와서 무너뜨린 것이다. 갈릴리와 골란에서 로마군에 대항한 도시는 단 5개밖에 되지 않는다. 가바라(Arab), 요드팟, 막달라(Tarichaea), 감라, 기스칼라(구쉬 할라브). 대도시격인 찌포리와 티베리야스는 진작 항복하고 살아남았다. 감라가 항거를 선택한 것은 과격한 의견이 관철되지 않자 여기까지 피난할 수밖에 없었던 다른 지역 사람들의 입김 때문이다. 로마는 이들을 희생시켜 역사에 교훈을 남기고자 했다. 로마에 저항하는 자, 파멸하리라.
로마군은 경사로를 통해 도시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지만 수비군에게 격퇴됐다. 두 번째 시도에서 각기 세 곳의 다른 위치에 있는 성벽을 무너뜨리고 침공하는 데 성공했다. 그 뒤 가파른 언덕을 올라가 백병전을 통해 유대인과 교전을 벌였다. 비좁은 거리에서 불리한 위치에서 싸우던 로마 군인들은 유대인 주택의 특이한 지붕에 충격을 받게 된다.
Menahem Halberstadt 그림
당시는 초막절이었다. 메시아적 확신 속에 있던 감라의 유대인은 로마군이 포위중인 마당에도 지붕을 스하하로 덮고 절기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높은 산등성이에서 낮은 주택가 지붕으로 중력의 법칙까지 작용하는 바람에 로마군은 속속 이 허약한 지붕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 이해할 수 없는 '무게'의 참사로 로마군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며칠 후 로마군은 다시 요새에 진입해 함락을 완료했다.
반란 당시 감라는 선전 수단으로 자신의 주화를 주조했다. 고대 히브리어와 아람어가 혼합된 "구속을 위하여"와 "(거룩한) 예루살렘을 위하여" 주화다. 현재까지 단 6개만 발견된 다소 조잡한 수준의 청동 주화다. 컵 모양은 당시 성전에서 사용하던 세켈의 무게를 재는 도구였을 것이다.
감라 국립 공원은 꽤 큰 규모이다. 이스라엘에서 흔치 않은 Vulture נשר 의 서식지이기도 하다. 멸절 위기에 있는 동물이다. 감라폭포와 감라 강을 보며 약 45분 간 트래킹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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