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욤키푸르 전쟁 49주년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이 욤키푸르를 준수하던 오후 2시 전국에 사이렌이 울렸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 모래로 쌓은 장벽을 넘었고,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넘어 내려왔다. 이날은 무슬림의 금식 성월 라마단의 10번째 날이기도 했다. 닉슨의 데탕트에 찬물이 쏟아졌다. 닉슨과 키신저야말로 이 전쟁 소식에 가장 놀랐을 것이다.

 

가장 뼈아픈 건 시나이 반도의 난공불락 바르레브 라인이 무너진 것이었다. 아무도 넘을 수도, 뚫을 수도 없으리라 자신하던 장벽은 물에 녹았다. 근본적으로 모래였으니까. 이스라엘은 오만했던가. 이집트가 달라졌다고 봐야겠지. 사다트는 나세르와 달랐다. 문제를 파악했고 목표를 세웠고 집요했다. 적어도 전투의 전술과 전략을 이해하는 군인이었다. 30년 만에 이집트 군대가 배출한 멀쩡한 군사지휘관 싸아드 알샤즐리를 믿어주었다. 이집트 전 병력이 하루 만에 수에즈 운하를 건넌다.

 

이스라엘은 이집트와 시리아의 군사적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평가는 경험에서 나온다. 1967년 승리는 너무나 값싸게 이루어졌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군대를 무적으로 여겼고, 정보 기관이 아랍의 교란에 흔들릴 수 있다고도 여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어떤 아랍 공격도 이스라엘 공군이 신속히 제거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사다트는 이런 상황을 이용했다. 일부러 수에즈 운하 주변에서 훈련을 시작해, 이스라엘이 전쟁 개시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1973년 5월, 8월, 이스라엘은 두 번이나 잘못된 경보 때문에 예비군을 소집했고 그로 인한 손실은 약 천만 달러에 달했다. 그래서 이집트가 10월 1일 대규모 훈련을 시작했을 때, 그저 강화된 군사 훈련이겠거니 무시했던 것이다. 심지어 이집트 없이 시리아가 전쟁에 나갈 리 없다는 과신을 믿고 골란고원의 움직임을 간과했다.

 

요르단의 후세인 왕은 이스라엘에 전쟁에 관한 정보를 주었다고 주장한다. 1970년 검은 9월을 겪으며 암살 위험에 시달린 후세인 왕은 더 이상 이스라엘을 상대로 전쟁하고 싶지 않았다. 실제로 팔레스틴 파다윤이나 시리아의 위협에서 후세인 왕을 지켜준 건 이스라엘이었다 (이때 UN 대사가 이츠하크 라빈이었고, 미국과 요르단 사이에서 의견을 받아 본국과 조율한 장본인이다. 1994년 두 사람이 양국의 국가 수반으로 만나 평화를 타진할 때 후세인 왕은 생명의 은인을 만난 것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정치는 다소 혼란스러웠다. 일단 국방부 장관 모세 다얀. 지금은 그의 한심함이 잘 알려져 있는, 권력형 인간이다. 총리 골다 메이어는 군의 부정확한 의견에 끌려다녔다. 1967년 전쟁의 영웅들은 군에서 지휘권을 놓고 물러나 있었다. 그리고 아리엘 샤론. 이미 예비군 장성이었지만 일선으로 돌아가 시나이 반도에서 군을 지휘했다. 전장에서 지휘관은 한 명이어야 한다. 천재적인 전략가라는데도 왜 참모총장이 못 됐겠나. 물론 샤론의 오명은 레바논 전쟁 때 워낙 두드러지기 때문에 이때 일로는 크게 비난받지 않는다. 또 아리엘 샤론이 달려가지 않았다면 남부 전선의 판도가 달랐을 거라는 점도 어느 정도 사실이다. 적어도 10월 8일까지 군 상층부는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시리아는 파죽지세였다. 약 28,000명의 보병, 기병, 포병이 적어도 다섯 방향에서 공격을 퍼붓는데 이를 상대한 이스라엘 병력은 30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첫날 이스라엘 군의 희생은 역사상 유례없는 비극이었다. 이날이 욤키푸르였다는 게 장점이 없지는 않았다. 전국의 도로가 비어 있었기 때문에 예비군이 신속히 도착할 수 있었다. 

 

눈물의 계곡, 10월 9일 나흘까지 기갑 전투가 벌어졌던 곳이다. 

 

수백 대 탱크 앞에서   מול מאות טנקים 
 그들은 영혼의 용기로 걸었다    צעדו בעוז רוחם 
 그들은 알았다. 그들 육신만으로   ידעו שרק בגופם 
구할 수 있다는 것을   להציל הם יכולים 
 갈릴리와 골란의 주민들을 ישובי הגליל והגולן
 이 백성은 잊지 않을 것이다       העם לא ישכח
 그들의 엄청난 용기와 גבוריהם הנועזים 
대장부들의 행위를 ואת מעשי הבנים 
 영원히 불멸할 것이다 לדורי דורות יונצח
 전사했으나 헛되지 않았다 נפלו אך לא לשוא
 그들의 기억은 영원하리라     יהי זכרם ברוך

 

기갑 사단의 77대대에 아빅도르 카할라니 중령이 있었다. 당시 29살이었고, 자신들이 이곳을 포기한다면 골란고원은 물론 갈릴리가 시리아 손에 들어간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날 밤 대대원을 거의 전부 잃는다. 멈춰 선 수십 대의 아군 탱크를 차례로 들어가 조금씩 전진시키며 그 밤을 보냈다. 훗날 그가 파괴한 시리아 군대 탱크가 몇 대인지, 숫자가 사실인지 과장인지 논란이 일었다. 그 밤의 진실 같은 건 없다. 그렇게 궁금하면 그 밤에 그와 입장을 바꾸어 볼 수 있겠나.  

 

미디어 산업은 이런 소재를 놓치지 않기 때문에, Valley of Tears라는 제목의 드라마가 나왔다. 히브리어 제목이 Shaat Neila שעת נעילה 잠김의 시간이다. 네일라는 당연히 욤키푸르의 마지막 기도 네일라 기도에서 따온 것이다. 모든 빗장이 잠기는 것 같은 결산의 시간, 죽음과 삶과의 사이에 말할 수 없이 찰나만이 머물렀던 그 시간이다. 

 

이 불리함 속에서 이스라엘 군이 무슨 수로 전세를 역전시켰는지 나는 지금도 알 수가 없고, 그다지 알고 싶지도 않다. 전쟁이라는 거대 담론은 시간이 경과하면 개인의 삶에 트라우마로 남을 뿐이고 타인은 그런 종류의 슬픔에 동참하지 않는 법이다. 얼마나 많은 군인들이 여전히 끔찍한 고통 속에 있는지, 많은 고발과 지적과 뼈아픈 촉구가 있다. 유대인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하다는 독립기념일, 많은 도시들이 자발적으로 축포를 생략하기로 했다. 그 소리가 총탄 소리처럼 들려 발작을 일으키는 군인들의 청원 때문이다. 

 

10월 21일, 휴전이 임박해 있던 때 이스라엘의 골라니 보병 부대는 헤르몬을 탈환한다. 이 전쟁으로 헤르몬을 빼앗겼다면, 물론 이것은 상상만으로도 이스라엘 측에 끔찍한 일이다. 그래서 그날의 무시무시한 희생을 사람들은 잊고자 한다. 다음날 이스라엘 방송이 베니 마시스라는 군인과 인터뷰를 했다. 어땠어요, 안 무서웠어요, 이런 질문에 베니 마시스가 대답했다. 

-무조건 올라가야 했어요. 우리 사령관이 말했거든요. 헤르몬은 우리나라 눈이라고. העיינים של המדינה 그 말만 생각했어요. 

베니 마시스의 이후 삶은 1973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불행했다.  

 

이스라엘은 욤키푸르 금식을 마친 다음날 평일, 전국에서 욤키푸르 전쟁 추념식을 갖는다. 올해 49년, 내년이 요벨, 희년의 해이다. 여전히 정부와 군의 과오를 둘러싸고 진상규명의 요구가 크다. 이 전쟁은 28년 노동당 집권을 멈추고 우파 정부가 들어서는 계기 중의 하나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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