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 열렸다는 사실에 가끔 소름끼친다. 그때 기억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일에 미쳐 있었고, 길거리에 사람들이 모여 뭘하고 있는지 관심 쏟을 여력이 없었다. 인생 최고의 위기였다. 그런데 2006년 독일 월드컵은 기억한다. "여름날 동화"로 박제된 그때 햇살과 공기와 웃음들, 아, 이래서 우리나라 사람들도 그랬구나를 실감했다. 18년이 지난 2024년 독일은 EURO 2024를 개최한다. 14일 밤 뮌헨 아레나 구장에서 첫 경기가 열린다.
여러 가지 이유로 축구는 부패의 상징이다. 그러마 한다. 그래도 2006년 여름에 스캔들이 드리워지니 마음이 아프다. 솔직히 어느 나라인들 국제대회 유치 과정에 흠이 없겠나. (그래도 왠지 우리나라는 베테랑들이라 잘 숨겼을 것 같다.ㅋ) 독일은 어쩌다 이게 들통나서 2006년 여름의 추억을 바래게 만들까. 독일 축구 챔피언 베켄바우어가 당시 독일 조직위를 대표해 지지를 호소하고 다니던 2002년과 2005년 사이 670만 유로(750만 달러)의 현금 흐름이 의심스럽다는 보도가 나왔다. 베켄바우어는 이 자금을 지금은 사망한 로버트 루이스-드레퓌스로부터 빌렸다나(!) 보다. 이 돈이 카타르에 있던 FIFA 공식 계좌 모하메드 빈 함맘에게 흘러들어갔다(카타르 없으면 어쩔 뻔ㅋ). 이 자금은 3년 후 루이스-드레퓌스에게 상환되는데, FIFA를 통해 독일 조직위 계좌로 이루어졌단다.
상식은 이런 자금 흐름을 '뇌물'이라고 부른다.
스위스 검찰이 기소한 명단에서 베켄바우어는 빠져 있다. 스위스가 재판 관할권을 갖는 이유는 일단 FIFA 본부가 벨리조나에 있고, 스위스 연방 계좌도 연루돼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독일의 영웅을 스위스가 수사하는 게 가능할까? 아니 스위스가 FIFA를 제대로 수사하기는 할까? 베켄바우어는 작년부터 건강이 나빠진 터라 본심에서 제외됐는데, 그가 연루됐다면 정신적 고통을 호소할 국민 정서도 고려했을 것이다. 당시 DFB 회장 등 기소된 이들에 대한 혐의는 '배임'이다. 당연히 모두 혐의를 부인중이다.
넷플릭스가 또 부지런히 FIFA의 부패를 파헤쳐주기를 바란다. 베켄바우어와 DFB는 탈세 혐의 재판도 프랑크푸르트에서 계류 중이다. 축구에 환상을 갖지 말 일이다.
그래도 유러피언 챔피언십이나 월드컵이 무의미한 쇼는 아니다. 예를 들자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나 만성 우울증을 치료하는 데 최적의 이벤트가 아닐까. 2006년 독일은 2차대전 이후 가장 밝게 빛났다. 참 그때 독일팀 감독이 클린스만이었네.ㅋ
지금이라고 독일 상황이 나을 것도 없다. 우파 정당들이 의회의 5분의 1을 차지했고, 여전히 독일인은 아리안 팀만을 선호하는 데다가, 유럽의 경제적 혼란을 정통으로 맞아 활력을 잃었고, 중동에서 시작된 전쟁이 도시 광장 곳곳으로 퍼지고 있다. 독일의 창문이나 발코니에 독일 국기가 걸리고, 독일 사람들의 얼굴에 독일 국기가 칠해질까봐 여전히 으스스하다. 그래도 Summermarschen, 여름의 동화가 다시 한번 재현될까.
유로 2024에 거는 기대는 독일만 큰 게 아니다. 현재 유로 참가국 선수 중 가장 부담이 큰 이는 해리 케인과 주드 벨링엄이 아닐까. 영국은 브렉시트로 엄청난 경제 위기 중이고, 여왕은 죽고, 왕은 암에 걸리고, 왕실 전체가 스캔들 덩어리고, 선거가 코앞이다. 스트레스 많은 영국인들은 1966년 이래로 이름만 사자들인 대표팀에 역정낼 가능성이 다분하다. 2020년 결승전 이후 래스커드와 사카가 축구를 그만두지 않은 게 아직도 놀랍다. 벨링엄이 올해 인종차별의 희생양이 된다면 좀 가슴 아플 것 같은데.
프랑스의 정치 사회 위기도 만만치 않다. 마린 르펜은 유럽 의회 선거에서 확실히 떴다. 패배한 마크롱 대통령은 snap election을 선포했다. 6월 30일부터 7월 7일까지다. 올림픽을 앞두고 나라가 그래도 되나? 킬리안 음바페는 쿠프 드 프랑스 우승보다 레알마드리드 이적으로 더 많이 회자됐다. 음바페가 프랑스에서 이렇게 욕을 먹는 건 태어나서 처음이 아닐까.
유로 2024에 진출한 것만으로도 감격 자체인 나라도 있다. 조지아다. "러시아 법"과 싸우는 조지아 국민들이 트빌리시 거리에서 환호성을 지르겠지. 자연재해, 경제위기, 독재자로 피로한 터키도 축구의 환상 덕분에 조금 숨돌릴 여유를 얻게 될 거다.
조지아 팀 주장 흐비차 크바라츠헬리아, 18일 조지아 터키전은 거의 한일전 분위기일 듯.ㅋ
누구든 조금이라도 행복해지면 좋겠다. 건국 이래 최고의 스쿼드로 평가됐지만 결국 전쟁 때문에 유로 2024에도 못 나가게 된 이스라엘 대표팀에게는 슬픈 남의 잔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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