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 살면서도 5.18을 잊어본 적이 없다. 잊을 수 없으니까. 올해도 새벽 일찍 나서서 몇 군데 돌아다녔다. 그러다 텔아비브 박물관 '인질들의 광장'에 도착했다. 근처에 사는 친구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오랜만에 광장을 돌아보았다. 생각보다 담담하다. 우리나라 일이 아니라 그런가.
5월의 뜨거운 햇살 아래 한낮의 광장에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다. 유난히 영어 쓰는 유대인들이 많았는데(이제는 유대인이라는 게 한눈에 보인다) 외국인인 내가 여길 어슬렁거리는 게 신기했나 보다. 왜 여길 왔냐고 묻는다. 저, 여기 사는데요. 오, 리얼리? 사랑 받아본 적이 없어서 그런가, 내가 자기들 편인 거 같으니까 유난 법석이다. 뉴욕에서 온 분들이었다. 최근 몇 달 지옥 같았단다. 알지, 그 심정. 5.18 얘기도 잠깐 했다. 사람이 아무 공통점도 없는 타인과 공감한다는 것은 놀라운 경험이다.
5월 17일 오후에 루머가 돌았었다. 처음에는 라파에서 인질들이 구출된 줄 알고 엄청나게 흥분했는데, 이내 북부 가자에서 발견된 시신이라고 밝혀졌다. 샤밧이 시작되고 IDF 대변인 다니엘 하가리 중령의 긴급 기자회견이 있었다. 소셜 네트워크에서 루머가 퍼지자 어쩔 수 없이 기자회견을 서두른 것이다. 10월 7일 사망했지만 하마스 손에 있던 인질 세 구의 시신이 정보부와 공조를 통해 이스라엘로 반환됐다는 짧은 내용이었다. 루머에는 시신 네 구였는데, 결국 일요일 아침 네 번째 시신의 신원도 밝혀졌다. 론 비냐민, 내가 사는 도시 사람이었다.
이츠하크 갤러렌터, 아미트 부스킬라, 샤니 룩, 론 비냐민
인질들의 얼굴은 대개 익숙하지만 론은 특히 내게 친숙한 편이다. 내가 사는 도시의 빵집이나 커피숍이나 옷가게나 그의 사진이 많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론의 아내 아옐렛과 딸 샤이의 모습도 익숙하다. 시위 현장에서 자주 보았으니까. 샤이는 지난 독립기념일에 아버지처럼 바이킹 유니폼을 입고 이스라엘 국립묘지 헤르쩰 산에서 수갑을 찬 채 시위를 했다. 이스라엘 국가에 버림 받은 인질 132명이 가자 지구에 갇혀 있는데 이스라엘이 독립을 축하한다는 게 자신에게는 터무니없게 느껴진다고 말했었다. 론은 10월 7일 자전거를 타기 위해 키부츠 브에리 근처로 출발했다가 로켓 공격을 받았고 오전 7시 30분 아내와 마지막 통화를 하고 모든 연락이 끊어졌었다. 당시 소식이 끊긴 가족들은 하마스가 공개한 테러 영상을 뒤졌지만 론의 모습은 끝내 나타나지 않았고, 12월이 되어서야 가자로 잡혀갔다는 결론밖에는 있을 수 없다는 IDF의 통보를 받았다. 225일. 남편과 아버지가 살아 있기를 바라며 싸워온 긴 시간 끝에 10월 7일 살해된 론의 시신은 마침내 땅에 묻히게 됐다.
갤러렌터와 부스킬라도 최근까지 살아 있다고 믿어지던 인질들이었다. 노바 음악 축제에 참석했다가 키부츠 메팔심 근처로 도망쳐 그곳에서 살해돼 가자 지구로 시신이 옮겨진 것으로 발표됐다. 살아 있으리라 믿으며, 그나마 실낱같은 희망에 매달려 있던 가족들은 10월 7일 이후 두 번째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나마 이스라엘 땅에 묻을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겠지만.
샤니 룩은 노바 음악 축제에 닥친 잔인한 학살을 상징하는 인물이었다. 10월 7일 당일 테러 영상을 한두 개 보다가 까무러칠 뻔한 나는 그후 일체 쳐다도 보지 못했는데, 그때 본 영상이 샤니 룩이었다. 미국 아이비리그 대학생들의 데모나 최근 콜롬비아 대학의 시위를 보며 냉소가 나오는 이유이다. 아마 나는 죽을 때까지 샤니가 당한 일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성폭행을 포함한 민간인 테러조차 저항의 수단이라며 옹호하는 저 훌륭한 명문대 학생들도 잊지 않을 것이다. 미국이 저런 일을 당했다면 지금쯤 전 세계가 3차 대전 막바지겠지.
샤니에 대한 트라우마가 건드려진 건 어처구니 없지만 우리나라 언론 때문이다. 외국 통신사 기사 옮겨쓰는 처지에, 보도 윤리 같은 건 남의 일인가. 샤니가 끌려갈 때 찍힌 사진이 버젓이, 모자이크 처리도 없이 올라 있었다. 이스라엘이나 미국 언론은 트라우마 때문에 하마스가 촬영한 사진들을 더는 내보내지 않는다. 게다가 저 사진들을 찍은 에이전트들은 하마스와 공조한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고 있어서 언론사들로부터 손절당한 처지다. 내가 그 기사를 본 건 순전히 주옥같은 알고리즘 때문일 텐데, 한국 언론이 로얄티를 주고 저 사진을 실은 것도 문제고, 로얄티 없이 무단으로 도용했다면 더 큰 문제다. 이스라엘 같으면 저런 언론사 보도 때리는 사람이 속출할 텐데, 우리나라는 물론 조용하다.
샤밧이 끝나고 밤에 베니 간츠가 기자회견을 했다. 6월 8일 이전까지 네탄야후 총리의 태도에 변화가 없으면 비상 내각을 떠나겠다는 것이다. 아이고, 난 또 뭐라고. 네탄야후 총리에게 산소 공급 그만하고 결단하라는 비판이 두 달 전부터 있었는데 무슨 신소리냐. 전쟁중에 자전거 타다가 넘어져서 다리 부러질 때부터 지지율 떨어졌었다.
다가오는 6월 5일이 예루살렘 데이다. 1967년 전쟁으로 동서 예루살렘을 통합한 날이다. 이스라엘의 종교인 우파들이 봉기하는 날이다. 어쨌든 베니 간츠의 데드라인 때문에 5일 행사 주최측도 약간은 눈치를 보지 않을까.
제이크 설리반이 사우디아라비아에 도착해 MBS와 회담을 가졌다. 사우디가 곧 국장이 날지도 모르겠다. 영국 여왕 때와 비슷한 상황이다. MBS가 크라운 프린세스가 아닌 통치자가 된다면 중동 상황이 많이 달라질 것이다. 북쪽 국경에 또 헤즈볼라 드론이 침투하며 공습 경보다. 어제 아슈켈론에도 로켓 10발 이상 쏟아졌다. 하마스 전쟁 226일 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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