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를 모국어로 프라하에 살았던 유대인 작가 프란츠 카프카가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이 되었다. 2024년 6월에 프라하를 가야 하는 이유다. 향년 40세. 사인은 결핵이었다.
철없을 때 카프카를 동경했다. 멋대로 살다 간 천재 카프카ㅋㅋ. 거기에는 40까지만 살아야지도 있었는데, 다 흑역사다. 내가 카프카의 삶에서 가장 동경했던 것은, 보험회사 정규직 변호사라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던 점? 자기 검열 때문에 자기가 쓴 글을 대부분 태워버려도 생계에 지장이 없었다는 게 놀랍다. 매문가 시절 마감일 맞춰 글을 찍어내는 일이 참, 혐오스러웠다. 공감을 얻기 위해 글을 쓰는 부류도 있겠지만, 그저 자신과의 대화로 글을 사용할 수 있는 처지이고 싶었다.
그래도 죽어가면서(ערש דווי) 자기 작품을 모두 태워달라고 부탁할 정도면 보통의 정신상태는 아니었을 것이다.
이런 부탁을 받은 친구 막스 브로드는, 친구의 유언을 가볍게 무시하고 이듬해 첫 작품의 출간 계약을 맺는다. The Trial이다. 그 다음해에 The Castle이 나온다. 1939년 나치가 프라하를 점령하자 브로드는 친구의 글뭉치와 스케치가 들어 있는 수트케이스를 들고 탈출한다. 체코의 국경이 나치에 의해 막히기 5분 전 기차였다고 한다. 막스 브로드의 이 행동을 가볍게 여기는 주장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전 재산을 남겨두고 손에 들 수 있는 것만을 든 채 떠나는 길이다. 굳이 친구가 불태워 버리고 싶어한 유작으로 무겁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내가 카프카 친구였으면 그럴 수 있었을까. 카프카의 출간된 원고 대부분은 현재 옥스포드의 보들리안 도서관이 보유하고 있다. 브로드가 친구의 작품을 팔아 엄청난 이득을 보진 않았다.
브로드는 시오니스트였고 에레츠 이스라엘로 탈출한다. 브로드의 아내 Elsa Taussig이 1942년 사망한 다음, 자녀가 없는 말년의 브로드를 돌본 사람이 비서였던 에스더 호프였다. 역시 보헤미아 출신인 에스더와 남편 오토는 브로드와 가까운 사이였는데, 이들의 관계가 묘해 보였는지는 몰라도 공개적으로 거론된 적은 없다. 1968년 브로드가 죽고 카프카의 남은 원고와 스케치는 에스더 호프의 관리로 넘겨진다. 에스더 호프가 2007년 사망하면서 브로드의 유언대로 카프카의 원고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 넘길 것으로 알려졌다. 그때 해괴한 일이 시작된다.
에스더와 오토는 두 딸을 두었다. 에바는 독신이고 룻은 기혼이다. 자매는 브로드가 맡긴 카프카의 원고가 어머니의 유산이고 자신들이 유일한 상속인이라고 주장했다. 카프카의 원고 일부는 스위스와 이스라엘 은행의 금고에 있고, 일부는 수많은 고양이들과 함께 거주하는 에바 호프의 텔아비브 아파트에 방치돼 있었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 유대인의 유산 청문회를 담당하는 정부 기관(홀로코스트 유대인 재산 분쟁은 지금도 빈번하다), 브로드의 유산 관리 변호사, 에스더 유언 대리인, 두 자매의 변호인 외에도, 에바에게서 원고를 받기로 하고 이미 수백만 달러를 지불한 마르바흐의 독일 문학 아카이브까지 법률 대리인을 보내 재판에 돌입했다. Kafkaesque 자체다.
이스라엘 법정은 브로드와 에스더의 유언을 근거로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의 손을 들어주었다. 에바 호프는 2018년 85세의 일기로 사망했다. 스위스와 이스라엘 은행 금고들은 여전히 잠겨 있다. 이걸로 다시 재판이 시작되진 않겠지만, 집행을 위한 절차상의 분쟁은 여전히 가능성이 있다.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은 2023년 신축 건물을 완성했는데, 뭐, 카프카 원고 덕을 보긴 했을 거다. 내 돈이 아니라서 그런지, 에바 호프의 안타까움과 별개로 마침내 세상에 나오게 된 카프카의 개인적인 기록들이 너무나 소중하다.
최근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이 카프카가 브로드에게 보낸 편지를 공개했다. 카프카가 채식주의자이고, 창문을 열고서야 잠을 잘 수 있었고, 숲 속에서 알몸으로 일광욕 하는 습관이 있었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번에 드러난 것은 당대 하시딤 레베들과의 만남이 카프카의 삶에 이런저런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는 그의 결혼이다.
카프카는 1916년 하시딤 벨츠의 지도자 Yishchar Dov Rokah 레베를 만난다. 이미 병이 발병한 시기라 보헤미아 지방을 돌며 요양하던 중 레베의 초대를 받은 것 같다. 벨츠 레베의 넉넉한 인품에 감명을 받으면서도 카프카는 그 레베를 둘러싼 모리배들의 하찮음을 견딜 수 없어 했던 것 같다. 카프카 집안은, 조부모는 정통파 종교인였어도 부모 대부터 유럽 문화에 동화된 세속인이었다.
카프카 문체로 각잡고 썼으면 하시딤과 관련된 엄청난 작품이 남았을 텐데. 오늘날 상황과 연결하고 싶어 근질근질하다.
카프카의 시오니즘에 대한 입장은 논쟁의 여지가 많지만 카프카가 히브리어를 익히기 위해 열렬했던 것은 분명하다. 그 배경에 히브리어를 가르친 여성과의 로맨스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철자 오류를 보이는 카프카의 전설적인 히브리어 연습 노트도 이스라엘 국립도서관에 보관돼 있다. 카프카는 꽤 많은 연애를 했고 당시 풍습대로 약혼도 많이 했는데 결혼으로 성사되지는 않았다. 사생아로 의심되는 아이도 있었지만 밝혀진 사실은 없다. 사실 카프카는 매음굴의 단골 손님이었고 포르노에 집착했다. 브로드가 쓴 전기에는 카프카가 성적 욕망으로 고문당했다고 했는데, 이런 경우 요즘에야 의심해 볼 만한 사유가 따로 있지만 당시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1923년 카프카가 발트해의 스파 타운 그랄 뮈리츠에서 만난 여인이 도라 디아망이다. 15살 연하의 도라는 그곳에서 섬머 캠프를 돕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카프카의 청혼을 받은 도라는 하시딤인 아버지에게 허락을 구한다. 하시딤 Ger에 속한 도라의 아버지는 세속인을 사위로 인정할 수 없었다. 이런 경우 레베에게 상담을 청하게 되는데, 당시 하시딤 게르의 레베 아브라함 모르드카이 알터가 결혼에 반대했다. 하지만 두 연인은 베를린으로 이주해 6개월 간 함께 산다. 이때 쓴 작품이 사망 직후 발표되는데 A Hungry Artist이다.
사실 명절 마지막날 작가의 사생활을 끄적이는 이유는, 뭐라도 해야 버틸 수 있을 것 같아서다. 삶이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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