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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냐민 네탄야후

90년대 세계사에 대한 기억이 별로 없다. 당시 미국 문화가 워낙 압도적이어서 다른 나라들에 관심을 둘 계기도 없었던 것 같다. 이스라엘에서 라빈 총리가 암살된 1995년 11월 이후 이스라엘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가물가물하다. 이스라엘에 도착한 10년 전 당시 네탄야후가 총리였는데 1996년 이미 총리직을 경험한 베테랑이라고 해서 놀랐었다. 총리로서 한국을 방문한 적도 있었다고 해서 더 놀랐다. 우리나라가 이스라엘과 외교관계를 재개한 게 1993년이다. 노태우 대통령의 복심이라는 박모 씨에 의해 소련 중국 등과 외교관계를 맺고, 1991년 북한과 UN 동시가입에 성공한 후다. 더 이상 아랍국가 눈치볼 일이 없었던 것이다. 

  

네타냐후 총리의 닉네임이 비비다. 베냐민, B로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는 라크 비비와, 네게드 비비가 존재한다. 비비만 된다는 사람과, 비비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그 중간치가 없다. 한 인물에 대한 평가가 극단적으로 다르다. 특히 좌파들이 비비를 미워하는 정도는 우리나라 양김 시대 저리가라다. 어느 해인가 이츠하크 라빈 총리의 기일이었는데, 국가 행사 자리이기 때문에 총리가 참가했는데, 모르는 내가 봐도 너무 어색해 보였다. 라빈 총리는 자녀가 많지 않아 현재 행사에 나서는 사람들은 거의 손주급들이다. 그 가족들이 비비 대신 다른 우파 인사를 내세웠는데 그게 기드온 사아르였다. 두 사람은 현재 죽어도 다시 상종 못할 관계다. 아무튼 당사자인 라빈 총리가 죽고 30년이 흘렀는데, 네탄야후는 여전히 1993년의 오슬로 협정, 1994년 이에 대한 우파들의 반대 시위, 1995년 라빈 총리 암살과 함께 거론된다. 한쪽한테는 유대인의 땅을 보호한 영웅이고, 다른 한쪽한테는 평화의 기회를 꺾은 철천지 원수다.

 

10월 7일 하마스 테러가 일어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이 이 사건을 50년 전 욤키푸르 전쟁에 비교했다. 희생자 숫자가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탄야후 총리는 굳이 이를 오슬로 협정으로 야기된 사망자 숫자와 비교한다. 하마스 테러를 야기한 자신의 정치적 책임은 회피하면서, 하마스 전쟁 이후 어떻게든 재편될 이-팔 논쟁에서 자기 지지자들을 결집하려는 의도다. 정치가가 자기 생존을 위해 수단방법 가리지 않는 걸 비난할 일은 아니다. 네탄야후는 베테랑 정치가로서 최선을 다해 정치 생명을 연장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비판할 근거가 어디 있다. 문제는 그의 생존이 이 나라에 도움이 되겠느냐는 점이다.  

 

욤키푸르 전쟁 당시 총리였던 골다 메이르가 고뇌하는 네탄야후 총리를 찾아와 이렇게 말한다. "50년쯤 지나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당신을 용서해 줄지 모르지. 덕분에 나는 최악의 전쟁 책임자 자리를 내놓게 됐어."

 

네탄야후 총리의 정치 경력은 오슬로 협정을 공격하고, 그 협상 당사자를 비난하는 것으로 정점에 올랐다. 라빈 총리의 암살을 전후한 이스라엘 사회 분위기는 당시 야당 지도자였던 네탄야후가 예루살렘 키카르 찌온에서 쏟아내던, 라빈 등 평화 세력에 대한 저주와 비방으로 대변된다. 이때의 활약이 아니었으면 라빈 암살 이후 치러진 1996년 선거에서 최연소 총리로 선출되지 못했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이 있다. 네탄야후는 오슬로 협정과 라빈 총리를 그렇게 비방했으니, 총리가 되자마자 협정을 취소하려고 했겠지? 아니다. 오히려 오슬로 협정을 유지하겠다는 약속으로 당선됐다. 그를 의심의 눈초리로 지켜보던 백악관도 덕분에 설득할 수 있었다. 

 

 

우파로부터 반역자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아라파트와 평화의 악수를 나눈 건 라빈이지만, 라빈은 단 한번도 아라파트 앞에서 저렇게 웃지 않았다. 아라파트가 죽인 유대인이 수백 명이기 때문이다. 네탄야후는 그런 라빈에 대한 모욕과 비방에 대해 한 번도 사과하지 않았다. 이스라엘 우파들이 만들어낸 헛소리 중에 이스라엘 영토를 포기한 자들은 대가를 치른다는 말이 있다. 오슬로 협정을 주도한 라빈 총리는 암살됐고, 가자 지구를 양보한 아리엘 샤론 총리는 쓰러져 코마 끝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자, 네탄야후 총리는 헤브론을 양보한 장본인이다. 클린턴의 두 번째 임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의 주재로 서명된 Wye River memorandom, 와이 강 각서의 주요 골자가 헤브론에서 이스라엘 군의 철수다. 헤브론 영토 80%를 포기하고 도시를 분할하는 게 저때 합의된 거다. 헤브론 도시 대부분이 PA 통제 하에 놓이면서 안보 문제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덕분에 테러리즘이 잦아든 것이다. 테러의 유일한 해답이 평화라는 걸 그는 총리로서 깨달았을 것이다. 

2000년 오슬로 협정이 공식적으로 깨지고 다시 인티파다가 일어난 건 노동당 에후드 바락이 총리였을 때다. PA는 1993년부터 2000년까지는 테러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지만, 이미 오슬로의 추진력은 잃었다. 이때 네탄야후는 정치적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였다. 정권을 놓치게 된 비통함이 얼마나 컸는지 부인인 사라 네탄야후는 남편을 몰라주는 이 나라가 다 불타없어질 거라는 망언을 했다. 독재자들도 자기 나라를 위한다는 핑계가 있다. 건설이 아닌 파괴를 원하는 권력자의 심리는 대체 뭘까.  

 

2008년 선거에서 네탄야후를 부활시킨 게 미즈라힘이고, 정치적으로는 하레딤이었다. 리쿠드는 아슈케나짐에 빼앗긴 게 많다고 느끼는 미즈라힘의 지지 정당으로 부상한 것이다. 노동당이 전통적으로 아슈케나짐의 정당이니까. 이게 말도 안 되는 게 당시까지도 리쿠드의 지도자들 역시 대부분 아슈케나짐이었다. 무엇보다 리쿠드의 강령이 리버랄리즘으로, 기업과 부자를 위한 정당이다. 1977년 우파의 혁명 이후 리쿠드가 가장 먼저 한 일이 노동당과 연관된 노동조합과, 분배와 복지에 맞춰진 국가 정책을 모조리 해체한 것이다. 국가 인프라들이 줄줄이 민영화 됐다. 그렇게 부자가 된 미즈라힘 부자들이 지금까지도 리쿠드의 선거비를 대고 있다.

한편 당시 올메르트가 부패 혐의로 사임하고 집권 정당 카디마를 이끌게 된 게 찌피 리브니, 여성이었다. 하레딤 정당은 좌파 주도의 연정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결의를 했지만, 여성이 이끄는 정부도 원치 않았다. 찌피 리브니는 자기 정당이 최고 득표를 했는데도, 끝내 연정 구성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 대신 네탄야후가 종교인들과 함께 정부를 세운 것이다. 그때 되살아난 네탄야후는 절대 권력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던 모양이다. 그 이후 2021년 세속인 정당들의 깜짝 연합이 성사되기 전까지 총리직을 놓지 않았다. 

2022년 네타냐후가 다시 총리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사법재판 때문이다. 뇌물, 배임, 횡령으로 네 건의 대형 소송이 진행중이다. 이 정도 되면 재판 준비를 위해서도 정계 은퇴가 맞다. 그런데 총리의 면제특권을 고집한 것이다. 

10월 7일 하마스 테러는 하마스가 일어킨 일이지만, 이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경고가 2023년 내내 있었다. 하지만 네탄야후 총리는 자기를 감옥 가지 않게 만들어줄 사법개혁안 통과를 밀어부치고 있었다. 전쟁이 터지고, 모두가 정치 대신 위기의 국가를 보호하자고 나선 지금, 네탄야후는 여전히 선거 구상중이다. 어쨌든 하마스가 가한 최초의 충격에서 벗어나 망신창이가 된 자신의 이미지를 회복하고, 여론조사에서 밀리기 시작한 리쿠드를 안정시키고, 하마스 테러의 책임과 상관없이 권력을 유지하는 방법을 찾아나선 것이다. 10월 7일 하마스 테러는 주권 국가 전체를 황폐하게 만든 전대미문의 사건으로, 다른 어떤 사건과도 비교할 수 없다. 그걸 알고 있기에 네탄야후는 길을 잃기 전에 익숙한 자기만의 장소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2024년 3월 네탄야후 총리가 며칠 때 공식석상에 나서지 않고 있다. 당장 반박하지 않으면 안 되는 그를 향한 정치적 공격이 있었는데도 침묵하고 있다. 지난해 언젠가 총리는 심장 수술을 받았는데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국가의 집권자라는 것은 의사결정을 위해 24시간 국가안보상황과 연결돼 있어야 한다. 심장 수술은 전신 마취가 필요한 일이 아닌가. 집권자가 건강 문제를 숨기는 건 국민들이 걱정할까 봐서가 아니다. 그게 약점이 되어 선거에서 밀리지 않기 위해서다. 이번에는 췌장에 문제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1949년생,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건강을 돌보는 데만도 피로한 나이다. 나라가 위기인 이때, 재판에, 수술에, 자기 문제로도 정신 없는 사람이 총리직을 제대로 감당할까.

 

3월 9일, 샤밧이 끝난 텔아비브에는 수천 명이 모여 당장 선거 날짜를 정하라는 집회가 열렸다. 전국적으로 대도시들에서 비슷한 시위가 열렸다. 그동안 전투에 임해야 하는 IDF를 위해 정치적 발언을 억제해 왔던 관행은 이로써 끝났다. 총리의 사저가 있는 케이사랴에서는 항의 행진하는 시위자들이 경찰과 충돌했다. 마침 이날은 샤밧 슈칼림, 생명의 속전에 대한 본문을 읽었다. 생명만큼 귀한 게 어디 있나. 정쟁을 그만 두고 편히 요양하는 게 정말 힘든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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