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아의 전성기가 중세였다는 건 프라하에 독일까 선일까. 바츨라프 공작의 기마상이 서 있는 그의 이름을 딴 광장에서 이 도시의 봉건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바츨라프 공작이 세운 St. Vetus 대성당. 바츨라프, 영어로 Wenceslaus 채플이다. 중앙에 있는 바츨라프 동상의 두개골이 실제 사이즈(!)란다. 보헤미아의 기독교 개종은 바츨라프 공작의 할아버지 때 이뤄졌다. 그의 할아버지 보리보이는 키릴 문자를 창시한 시릴과 메토디우스에 의해 개종했다. 남자들 명줄이 시원치 않은 집안인지 할아버지 아버지는 일찍 죽고 할머니 루드밀라와 어머니 드라호미라가 바츨라프를 두고 경쟁했다. 어머니가 할머니를 암살한 걸로 정리된다. 바츨라프도 동생에 의해 암살됐다 (그래서 순교자로 인정된다). 집구석이 이 지경인 건 보헤미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라비아, 작센, 바이에른, 마자르족(헝가리), 폴라비아 슬라브, 색슨족, 동프랑크가 얽혀 있던 중세 유럽에서 결혼제도는 정치적 동맹관계의 도구로 이용됐기 때문이다. 그래도 엄마한테 전화 걸어, 마마, 내가 사람을 죽였는데요, 하는 노래는 보헤미안 랩소디다.
슬라브 계열인데도 성 비투스 대성당은 정교회보다 라틴교회를 연상시킨다. 바츨라프의 선호가 그랬다. 슬라브에 오죽 질렸으면. 성 비투스 대성당은 건설 기간이 유럽에서 가장 오래 걸린 교회이다. 바르셀로나에 아직도 짓는 교회가 있긴 하지만. 1344년 공사가 시작돼 1929년에 완공됐다. 건설 기간 600년, 우리는 그 세월 동안 나라를 세웠다가 망했는데. 중부 유럽만 해도 살 만했던 건지. 제단Altar이 이렇게 아름다운 교회도 흔치 않다. 스테인드 글라스는 알폰스 무하의 작품이다.
sarcophagus는 헬라어로 one who eats flesh 살을 먹는 자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에서는 돌로 된 사르고파구스만 보았는데 과연 유럽에는 청동으로 된 것도 있다. 신성로마제국의 수도를 프라하로 옮긴 황제 카를 4세의 무덤이다. 토스카나에 있는 몬테카를로를 세우기도 했다. 프라하가 14세기 신성로마제국의 수도가 된 것은 당시 전 유럽에서 유행하는 흑사병이 돌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유대인 인구가 많은 도시는 전염병 위험이 급격히 줄어든다. 아침저녁으로 씻는 게 예전이니까.
프라하 성 뒤에 있는 스트라호브 수도원에서 본 도시 풍경.
프라하 성에서 내려와 카를교를 건너 Betlémská kaple에 들른다.
Zde bydlel Mistr Jan Hus 마스터 얀 후스 여기 살다. 보헤미안 공동체의 chapel이었다. 교회로 불려본 적이 없다. 오직 평신도의 언어 체코어로 설교할 목적으로 세워졌고, 성직자만이 아닌 평신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성찬이 시작됐다. 얀 후스는 1402년 3월 14일 이곳의 책임자가 됐다. 처형되기 전 마지막 설교는 1413년 2월이었다.
말씀단의 단정함, 아이콘의 소박함이 흐뭇해 자세히 보다 깜짝 놀란 기억이 난다. 아래 기록된 문구들이 풍요로운 교회에 대비한 예수의 가난함을 꼬집는 살벌한 말들이기 때문이다. 얀 후스의 저작에서 가져왔다고 한다. 그러고보니 저 자리 올라가 설교하는 사람의 허튼 소리를 용납하지 않을 것 같은 단상이다.
얀 후스가 죽고 어떻게 이 채플은 파괴를 피했을까. 개혁 교회를 무너뜨리는 건 핍박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게 아닐까. 교회는 개혁 없이 부패할 때 무너지는 법이니까. 건물은 17세기 예수회에 인수돼 카톨릭 교회로 변신했다가 20세기 공산정권 아래서 복구되었다. 현재 모라비아 교회 혹은 체코 개신교회의 예배당이면서 체코 공과대학의 의식 홀이다.
올드시티 광장에 얀 후스가 화형당하는 동상이 있다. 실제 화형은 독일 콘스탄츠에서 1415년 7월 6일에 집행됐다.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몬 콘스탄츠 공의회였다. 틴 성당의 첨탑 사이 성모 마리아 상은 보헤미안 공동체가 모든 성도의 성찬을 기념해 만든 황금 성배를 녹여 만든 것이다. 2015년이 후스의 사망 600주년이었다.
중세 유대인 게토 Josefov에 있는 올드 시나고그와 묘지 입구. 고믈레이 하사딤גומלי חסדים은 유대인이 사랑으로 행하는 선행을 의미한다. 자선행위를 하거나 병자를 방문하는 등 여러 가지 계명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죽은 자를 매장하는 장례에 참석하는 유가족을 위로하는 것이다.
유대인 게토 Josefov의 시청 건물이다. 히브리 신명 tetragrammaton이 희한하게 쓰여 있다. זֶה-הַשַּׁעַר לַיהוָה צַדִּיקִים, יָבֹאוּ בוֹ 시편 118편 20절 이는 여호와의 문이라 의인들이 그리로 들어가리로다.
프라하의 유대인 게토에는 프란츠 카프카의 '일종의' 기마상이 있다. '어떤 싸움의 수기'에서 영감을 받아 야로슬라프 로나가 만든 카프카 기념비이다. 이 하염없이 수줍기만 한 작가를 옆에서 격려하다 못해 글을 쓰도록 촉구한 막스 브로트는 1939년 나치를 피해 이스라엘로 도망친다. 1924년 결핵으로 죽으면서 반드시 태워 달라고 부탁한 카프카의 원고들이 들은 가방을 들고서였다. 막스 브로트는 카프카가 태워 달라고 한 유언을 지키지 않았지만 아무 거리낌이 없었다. 미완성 원고를 손보아 발표하며 친구 카프카를 세상에 알리는 데 전념했다. 1968년 막스 브로트도 죽는다. 평생 결혼하지 않은 막스 브로트는 자신의 모든 문학적 자산을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에 기증한다. 그런데 막스 브로트에게 에스더 호프라는 비서가 있었고, 카프카의 원고 가방이 그녀에게 전달된다. 에스더 호프는 2007년 9월에 사망하는데 그의 두 딸이 어머니의 유물 속에 있는 카프카 원고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다. 딸들이 보기에 어머니는 막스 브로트의 단순 비서가 아니라 정부였고 따라서 그의 유산에 대한 권리가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보다 어머니, 그 자식인 자신들에게 있다는 주장이었다. 사건은 법정으로 갔고 이스라엘 사법부는 국립 도서관의 편을 들었다. 에스더 호프의 딸들이 머무는 기괴한 집에서 카프카의 작품들은 강제 집행을 통해 구출됐다. 100년 가량이나 된 원고를 아무 조치 없이 방치하고 있어 복구 작업을 서둘러야 할 지경이었다. 카프카 작품을 독일 마르바흐 현대문학 박물관에 수백만 유로를 받고 팔려고 했던 여인은 이 강제 집행은 자신을 강간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기묘한 워딩을 선보였다. 카프카의 유작은 2017년 발표됐는데 전 세계 문학계가 이를 반기며 간신히 안도했다고 나는 말할 수 있다.
트램을 타고 비쉐흐라드Vysehrad로 간다. St. Peter and Paul Basilica 옆에 있는 묘지에 알폰스 무하가 묻혀 있다. 블라타 강 최고의 뷰는 죽은 자들의 것이었다.
체코의 국립 극장이다.
저 휘장이 어떻게 내려가나 궁금했는데 안 내려가고 금박문이 열린다. 날마다 도시 한켠에서 오페라가 공연중이라 언제든지 마음만 내키면 가서 들을 수 있는 도시 생활은 어떤 것일까.
다시 도심으로 돌아와 루체르나 몰에 있는 '거꾸로 된 말을 탄 바츨라프'를 보았다. 프란츠 카프카 박물관 앞 Peeing fountain의 작가 David Cerney의 작품이다. 바츨라프의 말이 거꾸로 매달릴 만한 이유를 충분히 발견한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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