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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

헤이그, 스피노자의 도시

네덜란드에서 헤이그를 발음하려면 대단한 용기가 필요하다. 목졸린 소리로 덴하흐, 특히 '하'에 강세를 두어야 한다. '덴'은 정관사라지만 하흐가 어쩌다 헤이그로 변했는지 아무튼 희한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헤이그에서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한다. 미술 애호가라면 몬드리안의 최대 콜렉션 시립 미술관을 찾는다. 나도 그대로 했다.

 

그러고 나서 헤이그 최초의 개혁교회 De Nieuwe Kirk를 찾았다. 여기서 유대인을 만나지는 못했다. 일단 교회니까ㅋ. 1656년에 완공된 교회는 지금은 회중이 찾는 예배의 장소는 아니다. 비즈니스 미팅이나 콘서트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교회 정원으로 들어가면 어딘지 자리를 못 잡은 것 같은 어색한 무덤이 나온다. 바루흐 베네딕투스 스피노자의 안식처다. 

 

Terra hic 여기 흙이

Benedicti de Spinoza in Ecclesia Nova olim sepulti 새 교회에 영원히 묻힌 베네딕투스 드 스피노자의 
ossa tegit 뼈를 덮다

 

1676년 말 갑자기 스피노자는 건강이 악화된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1677년 2월 21일 일요일 44세의 스피노자는 사망한다. 헤렘(추방) 이후 교수직 월급이나 재산도 포기하고 유리 렌즈를 만드는 노동을 했는데 만성 염증성 질환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크다. 체중 감소, 근육량 감소, 전신 염증, 신진대사 이상, 식욕 부진 같은 복합 다기관 증후군이었던 것 같다. 스피노자는 서면 유언장도 남기지 않았다. 다행히 그의 글은 출판사 Rieuwertsz에게 전달되었다. 2월 25일, 스피노자의 관은 De Nieuwe Kerk 지하의 금고 162번에 묻혔다. 추방되었기에 유대인 묘지에 묻힐 수 없었다. 2년 후 에티카 등 스피노자의 저작은 출판되자마자 카톨릭 금서 목록에 오른다. 1956년 여름 네덜란드의 유대인 공동체는 스피노자를 위해 마쩨바를 세운다. עמך '당신의 백성'이라는 히브리어가 새겨진다. 하지만 스피노자의 회복은 공식적으로 이뤄지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1632년 11월 24일 수요일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데, 모든 유대인 어린이들처럼 5살에 헤데르,라는 초등교육 기관에서 공부했다. 13살이 되자 학교를 그만두고 가업을 잇는다. 일반적이지 않다. 1654년 아버지의 사업을 계승한 스피노자는 2년 만인 1656년 7월 27일 암스테르담 포르투갈 회당 지도자 마하마드로부터 '이스라엘 백성으로부터 추방' חרם된다.

 

현재 암스테르담 포르투갈 회당 Kahal Kados Talmud Tora의 건물 앞에는 부두 노동자 동상이 서 있다. "2월 파업"으로 알려진 1941년 2월 25- 27일까지 암스테르담에서 열린 총파업을 기념하고 있다. 총파업은 동상이 서 있는 건물 포르투갈 회당을 비롯한 유대인 공동체에 대한 나치의 억압에 항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2주 전에 나치는 네덜란드 경찰의 도움을 받아 이 동네를 철조망으로 둘러싸고 비유대인 출입 금지를 선언했었다.

 

강제 추방된 스피노자는 헤이그로 옮긴다. 그가 급진적인 사상으로 세상과의 대결을 벌인 곳이 암스테르담이라면, 헤이그는 그가 세상과 교회에게 하고자 했던 철학이 준비된 곳이다. 스피노자의 동상 왼쪽에 그가 머물던 집이 남아 있다.  

Excommunicated, Samuel Hirszenberg, 1907

 

스피노자는 계몽주의와 유대교 개혁주의의 시작이 되었고 궁극적으로 시오니즘의 길을 열었다. 유대인 공동체에서 스피노자가 적어도 언급되기 시작한 게 시오니스트 때문이다. 물론 스피노자는 사람들을 종교로 이끄는 것이 단순한 이성이 아니라 두려움이나 전통과 관련돼 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사람들은 훨씬 사소한 이유를 들어 자신의 신념을 고수한다. 스피노자가 1670년대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생각했던 전통 종교는 계속해서 번성했다. 그 번성의 이유에 대해 우리는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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