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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rope

베를린, 본회퍼 하우스

2013년 본회퍼 하우스가 설립됐다는 소식을 듣고 항상 가보고 싶었다. 신학 견습생들을 훈련하는 곳이다. 훈련은 저작으로 이어지기 때문에 이곳에서 발표될 작품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정기적으로 나오는 진지한 에세이들을 인터넷으로 구독할 수 있다. Heerstrasse역에서 내려 가볍게 산책하면 집이 나온다. 

 

무슨 악취미인지 저 한적한 길을 통해 들이닥쳤을 SS 차량과 군인들이 떠올랐다. 그날 밤을 기억하고 있는지. 이 고결한 가정이 자신들의 신앙과 신념으로 인해 치른 대가가 좀 더 세상에 알려져도 좋지 않을까. 하지만 숲은 고요하고 거리는 차분하다. 

 

신학 견습생을 훈련하는 곳이기 때문에 정해진 스케줄이 엄격한 곳이다. 방문자들이 아무 때나 드나들 수는 없으므로 사전 예약과 컨펌이 중요하다. 한국분들이 많이 오신다는 말을 들었다. 

1935년 정신과 의사인 Dr. Karl Bonhoeffer와 아내 Paula가 직접 집을 짓고 이사했다. 이웃집에는 장녀 Ursula와 법률가 남편 Rüdiger Schleicher의 가족이 거주했다. 우르술라의 딸 레나테가 본회퍼의 전기를 쓴 에버하르트 베티게와 결혼했다. 

1938년 디트리히의 쌍둥이 여동생 Sabine가 법학자 남편 Gerhard Leibholz와 영국으로 이민하기 전에 이곳에서 지냈다. 유대인 베티게의 탈출을 이들이 도왔다. 디트리히와 사비네는 여덟 형제 가운데 여섯과 일곱째 자녀다. 
1939/40 딸 크리스텔과 남편 한스 폰 도나니도 임시로 살았다. 한스 폰 도나니는 비엔나(헝가리 origin) 출신으로, 법률가로서 군사 정보국에서 일하는 지위를 이용해 나치에 저항했고 히틀러를 암살하려던 장본인이다. 이스라엘 홀로코스트 기념관 야드바쉠이 부여하는 '열방의 의인'으로 지정됐다. 자기 목숨도 위험한데 대가 없이 유대인의 생명을 구한 이에게 수여되는 메달이다. 훗날 부부의 큰 아들은 함부르크의 시장이 됐다.

1943년 4월 5일 디트리히 본회퍼도 이 집으로 이주했다. 히틀러 암살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1945년 4월 9일 디트리히는 Flossenbuerg에서, 한스 폰 도나니는 Sachsenhausen 강제 수용소에서 각각 처형된다. 

1944년 9월 베를린 시민군 사령관 Paul von Hase 준장이 교수형에 처해지고 아내 마가렛 폰 하제가 슐라이허 집에 피신한다. 

1944년 10월 1일 장남 클라우스 본회퍼가, 3일 후 뢰디거 슐라이허가 체포되어 인민 재판을 통해 사형을 선고받았고 1945년 4월 23일 베를린-모아빗에서 처형된다.

1948년 칼 본회퍼가, 1951년 파울라 본회퍼가 이 집에서 사망한다. 아들 둘과 사위 둘이 사형되고 그 외 자녀들이 뿔뿔이 흩어지는 걸 목격한 후였다.  

1951-1968 Charlettenburg 대학 복음주의 학생 공동체의 공간이 된다. 

1951-1953 에버하르트 베티게가 거주했다. 
1968-1984 자체 관리되는 학생 주거용 주택으로 사용됐다.
1987년 6월 1일 본회터 기념관이 됐다.

2013년 본회퍼 하우스가 설립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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