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사람은 가슴에 묻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망자의 물품을 소각하는 습관이 있지만, 3년상은 치러야 한다면서 그 전에 털고 일어나면 꽤나 괘씸해 한다. 기독교를 믿는다고 크게 다른 것 같지 않다. 가슴아프게 배우자를 잃고 그 사진조차 싹 치우면서 귀신에 얽매일까 봐서라고 말하던 분을 기억한다. 죽으면 귀신이 되어 나타나는 게 기독교인가요, 묻지는 않았다. 본인이 힘들다는데 어쩌겠나.
우리집 골목은 증조 할머니부터 조부모, 부모, 결혼한 자녀, 손주들이 5대째 살고 있다. 주변도 사촌들이라, 단독 주택 여덟 채가 모두 일가친척이다. 처음 이 도시가 세워지던 1890년 루마니아에서 이주한 개척자 부부가 처음 집을 짓고, 가족들을 불러 들이고 자녀들을 위해 하나씩 덧붙여 나갔기 때문이다. 주변 구가옥들이 점점 부서지고 고층빌딩으로 변신하는 중이지만, 이 길만은 큰마당을 둘러싼 단독주택으로 유지되고 있다. 돈이 궁하지 않은 분들이라. 셋방 사는 처지에 비 오는 큰마당의 시원시원한 여백을 내려다보고 있자면, 이 주인 가족들이 새삼 고맙다. 부디 집 팔 일 만들지 말고 오래오래 행복하시라. 한 가지 부작용은, 내가 살고 있는 집의 소유주인 이 집안 막내 따님이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것이다. 말로야 사는 데 불편하지 않냐, 내 편의를 봐주러 온 것 같지만, 얘기하는 내내 버석하고 시린 얼굴로 구석구석 쳐다보시다 간다. 이 집이, 정확히 말하면 내 작업실이 그분 아들 방이었다. 21살에 군복무 중 전사했다. 크게 신경쓰지 않았는데, 어느 날 옷장 안쪽에서 연예인 스티커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이름을 찾아보니 나도 기억하는 미국 청소년 드라마 베버리힐스 주인공이었다. 가구가 다 붙박이여서, 이 책상에 앉아 공부했을 누군가를 연상하지 않기가 어렵다.
나는 묘지 방문을 꺼리지는 않는다. 가끔 주인 할머니가 손자의 묘지를 방문할 때 같이 가겠냐고 물으신다. 왜 그러시는지 이상하지만, 흔연히 동행한다. 처음 방 주인의 묘지를 찾아가 나도 모르게, 처음 뵙겠습니다, 했었다. 그게 신학적으로 맞는지는, 모르겠는데, 이름까지 알게 된 그를 더는 물건처럼 취급할 수 없었다. 가끔 방에서 대화도 한다. 그러하다.
일 년에 두 번, 현충일과 그의 기일날, 나는 작업실 청소에 매진한다. 오전에 국립묘지에서 기념식을 마치고 그의 가족과 친구들이 집을 찾기 때문이다. 물론 내 손님은 아니고, 주인 할머니 댁에서 손님을 치르는데, 모임이 폐할 때쯤, 우리집으로 올라와 노크를 하는 이들이 있다. 한두 해로 끝나지 않고 10년이 지나도록 계속되고 있다. 덕분에 나는 그의 친구였던 청년들이 중년이 되는 과정을 지켜보게 되었다. 우리집을 찾아온다고 딱히 비장한 건 아니다. 평소처럼 실없는 농담 하며 킬킬거리다 간다. 그러나 이방인인 나조차 그들의 상실감을 눈치 채곤 한다. 차라리 이런 날을 없애버리지, 왜 굳이 '레드 선' 해서는 그날의 슬픔을 재현하느라 힘들어 할까. 유대인이 옳다 여기는 '때의 유익'과 '기억의 힘'을 나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올해 1500명이 넘는 새로운 희생자들이 현충일에 밝혀야 하는 촛불에 첨가됐다. 상실감에 미쳐버릴 것 같은 가족들은 그들을 기억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 잊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억하기 위해서다.
사예레트 나할의 샤함 모셰 벤 하르쉬는 케렘 샬롬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3주간 생사를 헤매다가 끝내 사망했다. 이 전투는 초반 전쟁의 양상을 결정지은 치열한 싸움이었고 사상자도 어마어마했다. 그가 생사를 헤매는 동안, 정말 많은 사람들이 기도했다. 그래서 기도가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지만, 스무 살 청년의 짧은 삶을 많은 사람이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벤 하르쉬는 골란 고원 하스핀에 살았는데, 골란 고원은 물이 좋아 그렇지 않아도 브루어리가 유명하다. 벤 하르쉬가 단골로 다니던 마롬 벤 자켄의 펍에서 "iron swords"라는 이름으로 맥주를 출시했다.
예루살렘에서 성장한 로이 다우이는 기바티 여단의 소대장이었다. 사망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가족들이 그의 유언을 공개했다. אם למות אז רק ככה (가자에 들어간) 우리(군인들)가 죽으면 그냥 그런 거예요. 다우이의 가족은 그의 유언 중 마지막 말 "그리고 무엇보다도 강건해 주세요"를 예루살렘 입구에 있는 호텔에 현수막으로 걸었다.
예비군 소장이었던 에디 샤니는 아내와 세 자녀를 둔 가장이었다. 모든 장례식이 처절했지만 에디의 장례식에서 그의 아내가 땅에 업드린 채 일어서지 못하던 장면이 아직도 선하다. 에디는 유언처럼 아내에게 남긴 말에서, 이 증오로 가득찬 세상에서 그래도 우리가 누구였는지 기억해 달라고 말했었다. 이슈바르 크마힘 밀가루 회사가 포장 뒷면에 에디 샤니를 추모한다고 썼다.
네티브 하아싸라의 농부 야아코비 야논은 10월 7일 테러리스트에 의해 아내 빌하와 함께 살해됐다. 그들의 다섯 자녀 중 한 명이 "아브라함 호스텔"의 창립자 마오즈 야논이다. 나사렛에 문 연 파우지 아자르 호스텔에 투자하고 지저스 트레일의 출발지로 만든 사업가이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낙관적이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데 터무니없이 이상적이라, 왜 저런 사람이 됐어요, 여기저기 물어본 적이 있다. 마오즈의 부모님이 그렇다고 들었었다. 네티브 하아싸라는 가자 지구와 남북으로 닿아 있는 국경 첫 번째 키부츠다. 야아코비는 히브리대학교 농대를 졸업한 농업학자이자, 나같은 얼뜨기는 흉내도 못 낼 이 땅에 대한 엄청난 애정을 기반으로 농사에 관한 식견을 들려주는 농부 가이드이기도 하다. 내가 이 나라에서 해 보고 싶었던 게 이스라엘 땅과 농사를 주제로 한 스페셜 투어 프로그램이다. 명절 지나고 자문 구하러 가야지 했었는데. 히브리대 농대 쯔비카 펠레그, 아사프 아브네르 교수가 야아코비의 친구들과 함께 그를 기념하는 참기름을 출시했다. 하필 왜 참기름인지, 이상하게 어울린다.
전국 국립묘지에서 전사자와 테러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식이 열렸다. 정치가들이 나대는 걸 견딜 수 없다는 유가족들 원성 때문에 대부분의 기념식에서 연설 없이 끝났다. 네탄야후 총리가 하르 헤르쩰에서 열린 국가 기념식에 노란 리본을 달고 나왔다. 갑자기? 어지간히 쫄린 모양이다. 두 다리가 잘린 병사가 자기한테 끝까지 싸워서 이겨 달라고 했단다. 죽은 자들은 말도 할 수 없는데. 누가 전쟁중인 거 모르나. 이렇게 상한 사람들을 위로할 줄 모르는 총리가 승리를 떠벌리면 그게 믿어지나. 사이코패스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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