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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열, גיס חמישי

우리말 "빨갱이"를 히브리어로 옮길 일이 있었다. 레드나 레프티스트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 단어의 부정적 뉘앙스는 한국 분단 역사에 대한 이해가 없다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나 역시 제5열, Quinta columna를 제대로 이해하는 것 같지 않다. 히브리어로는 기스 하미쉬, 다섯 번째 군대다.
 
이 용어의 기원은 스페인 내전(1936-1939)이었다. 당시 에밀리오 몰라와 프랑코가 좌파 정부에 반발해 우파 쿠데타를 일으켜 마드리드로 진격할 때 "마드리드 안에 제5열이 있다"고 했던 것이다. 쿠데타 반군 세력이 4부대로 나뉘어(톨레도, 엑스트레마두라 도로, 시에라, 시귀엔자) 진격했는데, 이들을 도와 반란을 성공시킬 다섯 번째 세력이, 바로 마드리드 안에 도사리고 있던 우파들이라는 뜻이다. 지금도 바르셀로나 출신들은 스페인 내전을 회상할 때, 프랑코나 에밀리오 몰라보다 Quinta columna를 더 저주하는 것처럼 보인다. 보수적인 인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메이킹을 담당하는 어휘다.    
 
그런데 "제5열"은 이후 모든 전쟁에서 유행처럼 번졌다. 2차 세계 대전 때는 1940년 나치 독일의 승리를 고대하던 프랑스인을 지칭하는 데 사용됐다.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서 나치에 대한 충성심을 보인 시민들을 지칭하기도 했다. 이들이 자국을 침략한 적대 세력을 지지한 이유는 당파성 때문일 것이다. 오늘날에도 "제5열"은 내부에 숨어 있는 적대적인 세력을 의미하는 용어로서, 국가의 안전이나 통합을 위협하는 내부의 불온 세력을 가리킨다(이 대목에서 한국 사람은 대번에 좌파 쪽을 연상하겠지만). 
 
이스라엘에는 보게드בוגד라는 용어가 있다. 문자적으로 '배신자'인데, 단지 뒤통수 친 정도의 배신이 아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단어가 우리말 "빨갱이"와 맥락이 닿는다. 1993년 오슬로 협정을 추진하던 이츠하크 라빈 총리를 우파들이 "보게드"라고 비난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대인의 땅을 저버렸다는 이유였다. 그 이후로 이 단어는 우파가 좌파를 비난하는 전매특허가 됐다. 이스라엘 좌파들은 정파적 입장에 감정을 내세우는 걸 꺼리는 것처럼 보인다. 어디까지나 논리와 상식으로 이기려 한다. 쯧쯧, 그러니까 28년 만에 정권을 뺏기고 여지껏 소수파로 전락한 것이다. 우파의 장점은 정권을 잡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데 있으니까. 어디서 다같이 배우나? 그럴 수도 있다. 전 세계 우파 정권이 비슷한 기조로 가고 있다. 
   

 2022년 11월 출간된 <오염된 민주주의>는, 빅토르 오르반의 통치 아래 빠르게 독재화되는 헝가리의 현실을 되짚는 책이다. 한때 자유민주주의의 상징이었던 헝가리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2010년 다수파가 된 오르반은 일련의 '개혁'을 시작해 20년간 이 나라의 자유주의적 합의를 근본적으로 훼손했다. 오르반을 지지하든 반대하든 모든 이에게 헝가리 총리는 민주주의가 어떻게 내부에서 전복될 수 있는지에 대한 생생한 사례이다.

오르반의 정치는 한마디로 포퓰리즘 민족주의다. 대중 독재다. 오르반이 당 내에서 국가 지도자로 부상하는 과정, 대중 매체를 통제하는 방법과 의석 수를 줄인 이유, 권력을 굳건히 하기 위해 사용한 광범위한 법 제도의 변화 등에서 확인된다. 이 책을 읽다가 깜짝 놀랐는데, 나라 이름 헝가리 대신 내가 알고 있는 몇 나라들을 집어넣어도 똑같았기 때문이다. 분명 요즘 뜨는 신종 독재자들은 오르반의 비법을 전수받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의 한국어판이 나오기는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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