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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의 이란 공습

남의 나라 비장한 현실을, 내 철학으로 재단할 생각은 없다. 전쟁 앞에서 개인의 철학 따위가 대단치도 않지만. 모든 전쟁이 잔인하지만 모든 전쟁이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우리 사회를 책임지는 이들이 구경만 하고 있지는 않기를 바란다. 전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는 이 남의 전쟁에서 분명 뭔가 배울 게 있다.  

ימי תשובה라 명명된 이번 작전에서 전투기 항법사(navigator) 여군들이 참여했다. 폭팔물 하강도 이들의 몫이었을 것이다.   

 

1948년 5월 15일, 이스라엘이 독립을 선언한 다음날, 아랍 5개 국가가 국경을 넘어 침략했다. 이집트의 전투기는 텔아비브 상공을 날며 폭탄을 투하했다. 당시 이스라엘은 영국이 두고 간 경비행기 몇 대가 있을 뿐, 공군이라 부를 만한 병력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2주 후 5월 28일 IAF를 창설했다. 왜냐하면 다음날 전투기가 작전에 투입돼야 했기 때문이다.

 

이집트 육군은 시나이 반도에서 영국군의 철수를 기다렸다가, 이스라엘 독립선언을 Casus belli 삼아 해안 도로를 따라 북상하기 시작했다. 적어도 1만 명의 병력과 수백 대의 차량을 동원했다. 속도전이 중요했지만 이상하게도 이집트 군은 유대인 정착지를 점령하는 데 집착했다. 그리고 번번히 강력한 저항에 마주쳤다. 특히 키부츠 야드 모르드카이는 이집트 병력을 5일이나 잡아두었다. 덕분에 IDF는 텔아비브에서 남쪽으로 40킬로미터 지점에 방어선을 조직할 수 있었다. 라기스, 혹은 수크리르 강둑이었다. 

 

5월 29일 이집트 군은 아랍 마을 이스두드(아슈돗)를 지나 기차역(아슈돗 역)을 점령한 다음 라기스 강에 도착했다. 강을 연결하는 교량은 이미 파괴돼 있었다. 다리는 19세기 오토만 시절에 건설됐는데, 아랍 국가들의 침략에 대비해 이스라엘 군대가 5월 12일에 폭격해 두었다. 베이루트와 카이로를 연결하는 철로의 다리도 꼼꼼히 파괴돼 있었다. 이집트 병력은 도하를 위해 다리를 세우기 시작했다.


이스라엘 방어선을 책임진 이는 기바티 여단의 시몬 아비단이었다. 이집트 병력의 진격을 막으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이들에게는 작전을 완수할 만한 병력이나 군비가 없었다. 그래서 이날 전투는 기적이라고 불린다.

 

기적은 말 그대로 하늘에서 왔다. 당시 이스라엘에 무기를 판매한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뿐이었다. 유명한 민족주의자이자 초대 대통령 마사리크는 이스라엘에 동정적이었다. 패망한 독일의 무기 공장들을 그대로 이어받는 바람에 여유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체코로부터 독일 메서슈미트 기를 변형한 아비아 비행기 25대를 구매했다. 분해된 채 화물기로 운송된 비행기는 에크론 비행 기지에서 조립됐는데, 첫 번째 4대의 비행기 조립이 전날 끝나 이스라엘 공군을 창설할 수 있었다. 아비단의 단호한 요청에 따라 이 비행기들은 시험 비행도 없이 이스두드를 날아야 했다.

 

5월 29일 오후 6시, 4대의 비행기가 IAF 역사상 최초의 공습을 위해 이륙했다. 미국인 Lou Lenart 외의 이스라엘 비행사는 Ezer Weizman, Modi Alon, Eddie Cohen이었다. 각 조종사는 폭격을 위해 3번의 상공 비행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적군에 거의 피해를 입히지 못했고, 4대 중 한 대가 격추되어 에디 코헨은 사망했다.

 

하지만 심리적 영향은 엄청났다. 이집트 군이 본부에 보낸 메시지에 따르면 그들은 "적의 비행기에 심하게 공격당해, 해체되었다."

이스라엘 지상군은 6월 3일 밤 3개의 전투팀으로 나뉘어 이집트군 기지를 공격했다. Pleshet 블레셋 작전이다. 기바티의 한 부대가 라기스 강둑의 이집트군 기지를, 또 다른 기바티 부대가 기차역을, 팔마흐 네게브 여단이 이스두드 마을을 공격했다. 이스라엘 군은 어두운 밤에 작전을 시작했는데, 서둘러 발견되거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혀 맹렬한 포격을 받으며 후퇴해야 했다. 그날 하룻밤에 50명의 군인이 전사했다. 전술적으로는 실패했지만, 이를 계기로 이집트군은 텔아비브로 진군한다는 생각을 포기하고 방어 전략으로 전환했다. 이렇게 이집트군의 진군을 막았기에, 이곳은 "여기까지만" 이라는 의미로 Ad Halom이라 불린다. 1978년 이스라엘과 이집트가 맺은 캠프 데이비드 협정에서 이집트는 전사한 이집트군을 위한 기념비 건설을 요구했다. 이집트가 선택한 장소가 Ad Halom이라, 이곳에 이집트 오벨리스크가 서 있다.

 

IAF는 이때의 교훈을 잊지 않고 조종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1951년 첫 졸업생 중에는 여성 조종사도 있었는데, 바로 야엘 롬이다. 하지만 곧 적에게 포로가 될 여군의 운명에 대한 사회적 우려가 제기되면서 여군은 조종사를 포함한 모든 전투 위치에서 배제되었다. 여자가 군대를 안 가서 불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우리말에 화냥이나 공녀 같은 어휘가 얼마나 부끄럽고 민망한지도 모를 거다.  

1994년 앨리스 밀러가 이스라엘 사법부 바가츠에 청원을 한다. IDF에서 가장 엘리트 부대인 조종사 아카데미에 여성이 배제되는 것은 차별이라는 것이다. 앨리스 밀러는 남아프리카 출신으로 6살 때 가족과 함께 이스라엘로 이주했다. 항상 항공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있었기에, 고등학교 졸업 후 민간 조종사 면허를 취득하고 항공 우주 공학 학위를 취득했다. 23세에 조종사 아카데미에 입대할 권리를 요구했고, 이스라엘 대법원은 여성을 조종사 양성 과정에서 배제하는 게 옳지 않다고 판결했다.

 

밀러는 조종사 과정에 지원할 기회를 얻기는 했지만 의학적으로 부적격 판단을 받았다. 하지만 밀러의 행동은 이스라엘 군대와 사회 전체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1998년 셰리 라하트는 F-16 전투기 네비게이터가 됨으로써 창군 50년 만에 첫 여성 졸업생이 된다. 2001년 바르샤바 게토 봉기의 지도자를 조부모로 둔 로니 주커만이 최초의 전투 조종사로 졸업했다. 2011년에는 5명의 여성 조종사가 과정을 마쳤다. 앨리스 밀러 이후 현재까지 38명의 여성이 IAF로부터 조종사 날개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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