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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ed

욤키푸르, 카파롯

나는 아직도 욤키푸르를 잘 모르겠다. 종교인들이야 하던 대로 하면서 이날을 좀 더 빡세게 보내는 거니까 그러려니 한다. 어차피 이들의 삶의 방식을 범인이 이해할 필요는 없으니까. 일 년 내내 아무런 종교활동을 하지 않고, 심지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확신도 없는 세속인 유대인들이 의아하다. 욤키푸르에 상당수의 세속인들이 회당을 찾아가 유대교 열 순교자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읽으며 눈물을 흘린다. 딩연히 금식도 한다. 왜 이날만, 갑자기 존재의 이유가 달라진 것처럼, 아무 갈등 없이 (종교적인 내러티브에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것인가. 더 깨는 것은, 그다음 날 조금의 여운도 없이 완전히 세속인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 이토록 종교적인 행위에 자신의 본질이 변화되지 않는데도 참여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본질은 어쩔 수 없고 밖으로 보이는 것만이라도 살펴보자. 

  

유대교 종교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는 입장에서 쉽게 비판하고 싶지는 않다. 욤키푸르 전날 아침, 그러니까 그날 저녁부터 금식을 시작해야 하는 날, 종교인 동네에는 이런 천막이 쳐진다. 하레딤 남성들은 자기 식구 수대로 구입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다가와 흥정을 한다. 저녁이 다가오면 이 근처는 범인은 지나기가 어렵다.  

 

닭이다. 성경에서 인간의 죄를 대신해 동물제사를 드린 것처럼, 오늘날에도 약식으로 자기 죄를 전가하는 의식을 한다. 카파라, 라고 하는데 속죄를 뜻하는 키푸르와 같은 어근이다. 성구 두 절을 읽고 나서 닭의 날개를 잡고 사람 머리 위에서 세 번 흔든다. 어린아이나 여성의 경우는 성인 남성이 대신 흔들어 준다.

 

시편 107편 17-20 (가스펠송, 말씀으로 고치시네 주는 나의 치료자, 구절이다)

 

 어린석은 이들은 자기 범죄 때문에 그들의 과오 때문에 고통받으리라 אֱוִלִים, מִדֶּרֶךְ פִּשְׁעָם;    וּמֵעֲוֺנֹתֵיהֶם, יִתְעַנּוּ
그들의 영혼이 모든 음식을 기피하고 죽음의 문 앞에 이르리라  כָּל-אֹכֶל, תְּתַעֵב נַפְשָׁם;    וַיַּגִּיעוּ, עַד-שַׁעֲרֵי מָוֶת
그들의 고통으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그들을 고난으로부터 구원하시리라    וַיִּזְעֲקוּ אֶל-יְהוָה, בַּצַּר לָהֶם;    מִמְּצֻקוֹתֵיהֶם יוֹשִׁיעֵם
그의 말씀을 보내셔서 그들을 고치시고 그들을 위험에서 구하시리라    יִשְׁלַח דְּבָרוֹ, וְיִרְפָּאֵם;    וִימַלֵּט, מִשְּׁחִיתוֹתָם

 

욥기 33:23-24

 

일천 천사 중 하나가 중재자로 있어서 그가 정직하다 말하면 אִם-יֵשׁ עָלָיו, מַלְאָךְ--מֵלִיץ, אֶחָד מִנִּי-אָלֶף:    לְהַגִּיד לְאָדָם יָשְׁרוֹ
하나님이 그를 불쌍히 여기시고 말씀하신다. 그가 구덩이로 내려가지 않도록 내가 코페르를 찾았다 וַיְחֻנֶּנּוּ--וַיֹּאמֶר, פְּדָעֵהוּ מֵרֶדֶת שָׁחַת;    מָצָאתִי כֹפֶר

 

어쩌다 읽는 하프타라에도 나오지 않기에, 이 구절들을 외우지 못하는 종교인이 많다. 카파라 행사를 관장하는 이들이 구절을 인쇄해서 나눠준다. 값을 치르고 산 닭으로 카파라를 치르고 나면, 기다리고 있는 쇼헷, 즉 코셔 도축을 하는 이에게 넘겨준다. 그때부터는 닭고기인 것이다. 공동체가 함께 금식을 앞둔 식사로 먹거나 가난한 이들에게 자선으로 보내진다.  

 

당연히 동물보호협회에서 잔인하고 시대착오적인 관습이라고 여러 차례 지적했지만, 이게 종교다! 이성과 상식이 통하지 않는 영역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동물의 생명도 귀합니다, 해봤자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유대교가 강성해지면서 더 이상 소수의 종교로 남지 않는다면 아마도 이런 비판들은 더 강해질 것이다. 유대교 내부에서도 카파라 의식을 강하게 비판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아무튼 이름은 유대교지만 그 안에 셀 수 없는 자기 소견들이 있기 때문에, 카파라는 초정통파 종교인 하레딤의 의식, 이라고 말하는 게 옳을 것이다. 

 

히브리어는 묘한 언어다. 이 카파라를 Honey, Sweetie의 의미로 사용한다. 예루살렘 시장 같은 곳에서 물건을 사다 보면, 나를 카파라라고 부르는 상점 주인을 많이 만난다. 이게 무슨 희귀한 소린가. 이 맥락을 해석해 보자면, 내가 당신의 카파라가 되어주겠다, 당신에게 나로 인해 구원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러니까, 내게 당신은 그렇게 귀한 사람이다, 이런 뜻이다. 물론 이런 애정이 실제에 가깝다면 그때는 모텍이라든가, 네샤마를 쓴다. 카파라는 아무 의미없는 남발하는 애정에 가깝다. 여기서 또 골치아픈게 히브리어 단어의 액센트다. 카파라가 구속의 의미로 쓰인다면 울티마에 액센트가 와서 kapaRA이고, Sweetie면 페널트에 와서 kaPAra이다. 의외로 울티마와 페널트의 액센트 구분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단어가 많다. 

 

예루살렘에서만 욤키푸르 대속죄일을 보냈다면 유대교의 아주 단면만을 보았을 수 있다. 텔아비브는 또 다른 세상이다. 많은 세속인 자녀들은 욤키푸르를 '자전거의 날'로 보낸다. 이맘 때 자전거 판매가 의미심장하게 늘어날 정도다. 사죄의 간청을 드리며 Kol Nidre가 울려퍼지는 시간, 교통의 흐름이 완전히 끊긴 고속도로는 자전거나 씽씽카를 타고 활개치는 어린이 청소년들로 가득하다. 이것도 이스라엘이다.      

 

 

 

  이스라엘 출신인 펄만의 Kol Nidre, 모든 맹세 (자원제). 욤키푸르 저녁 모든 회당에서 울려퍼진다. 

유대인 유전자에 가장 많이 녹아 있는 시와 멜로디가 아닐까? 경쟁 상대는 시편 1편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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