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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디움, 헤롯의 무덤

2013년 이스라엘 박물관의 전시회 Herod the Great - the king's final journey에서 재구성한 헤로디움의 설계도

 

헤로디움은 3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 산 아래 행정 센터
  • 산 꼭대기 요새
  • 경사면에 의식용 계단으로 연결된 왕실 극장과 헤롯의 Mausolium  

 

헤롯 (74-4 BCE) : 이두메인 할아버지 안티파스는 히르카누스 I세 때 유대교로 개종했다. 유대교 역사에서 거의 유일무이한 강제 개종 케이스다. 아버지 안티파테르는 히르카누스 2세의 고문이었다. 47 BCE 갈릴리 총독으로 임명됐고, 대략 10명쯤 되는 아내들 중 첫 번째 아내를 맞이한다. 유대인 학살을 이유로 산헤드린의 정죄를 받고 도피생활을 하다가, 37 BCE  로마에 의해 유다 총독이 된다.  

  

헤롯은 헤로디움을 왜 세웠을까? 

40-30 BCE에 먼저 하부 Plateau에 도시를 세운다. 종교 문제에 사로잡힌 예루살렘 대신 헤롯의 정부이자 행정 중심지 역할이었다. 사막 끝자리에 걸쳐 있지만 정원과 목욕탕(수영장)을 갖춘 거대한 궁전 복합 단지로 당대 최대 규모였다. 25헥타르에 이르러 멀리서도 보였다. 훗날 왕의 장례식은 이곳에서 거행된다.

Hill에는 요새를 세운다. 예루살렘을 향하고 그곳의 동향을 살폈다. 훗날 마사다처럼 이곳에도 유다 반란군이 모여들어 마지막 항거를 한다.

 

헤롯은 어쩌다 이곳을 통째로 자신의 무덤으로 삼으려는 아이디어를 얻게 됐을까. 헤롯의 건축 프로젝트는 신과의 경쟁을 과시하느라 기괴해지곤 했는데,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처음에는 여기 어딘가에 아름다운 마쩨바, 툼스톤을 세우는 정도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다 결국 언덕에 세워진 모든 건물들을 헐어버리고 언덕 전체를 자기 무덤으로 삼은 것이다.

  
1878년 성경 고고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은 그 장소를 헤로디움으로 확인했다.
1879년 독일 출신 건축가이자 선교사인 콘라드 칙은 부지를 도면으로 옮겨 그렸다.
1962-67년 프란체스칸 Virgilio Corbo 신부가 Studium Biblicum Franciscanum of Jerusalem을 위해 최초로 발굴한다. 코르보 신부는 베들레헴의 목자들 교회, 엔케렘의 세례요한 교회 등 주요 기독교 사이트 발굴에 기여한다.

1967년 HUJ Gideon Foerster가 상부 사이트를 발굴한다. 이후 국립공원으로 공개된다. 이 사이트에서 발견된 스탬핑 링(구리 고리?)이 그리스어로 Pilatus로 해독될 수 있다는 것이 2018년에 알려진다.


1972년 HU Ehud Netzer는 하부 플라토와 지하 터널을 파기 시작했다. 2007년 큰 무덤과 관의 유적을 발견했고, 왕실 극장과 기타 구조물을 발견했다. 그는 헤롯이 묻힌 장소의 미스터리가 이 극장과 연관돼 있으리라 짐작했다. 2010년 현장에서 낙하사했다. 2013년 이스라엘 박물관은 이곳이 헤롯의 무덤이라는 네쩨르 교수의 가설에 근거해 전시회를 열었고 IM 사상 최대 관객을 동원한다.  
 

Hill Fortress, 요새에도 궁전이 있었다. 반은 기둥으로 둘러싸인 정원이었고 서쪽에 목욕탕, 십자가 모양의 안뜰, Hasmonean 왕실이 리셉션 홀로 사용했던(나중에 반란군이 회당으로 사용한) 큰 공간이 있었다. 안뜰에는 미크베가 두 군데나 있었다. 탑의 높이는 40m 정도이다. 날씨가 더운 날에도 산들 바람을 즐길 수 있는 헤롯 왕실 전용 별장이었다.

 

15 BCE 헤롯은 로마의 VIP를 이곳에서 접대하기로 한다. Marcus Vipsanius Agrippa이다. 이미 완성도 높은 궁전들이 전국에 걸쳐 여러 곳 있었지만, 헤롯은 다시 한번 자기 실력을 과시하고 싶었다. 왕실 극장을 짓는다. 약 32m 직경에 4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좌석이 있고 꼭대기에 왕을 위한 전용 방이 있어서 거기에서 예루살렘을 볼 수 있었다. 그 방의 회반죽 벽에 인상적인 프레스코 벽화를 그려 넣는다. 

 

바다를 이해하는 선박 전문가의 작품이라는 해석이다. 알렉산드리아 출신의 예술가들을 고용했을 수 있다. 아우구스투스의 악티움 해전과 이집트 정복을 염두에 둔 주제 선정이다. 헤롯의 정치 감각은 이 정도였다. 예루살렘이 아니기 때문에 인간의 형상도 벽을 장식했다. 

 


언덕 바깥쪽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정상에 도달하기 20 m 전 기념비적인 계단이 궁전 요새 복도로 이어진다. 헤롯이 죽기 직전, 인공 원뿔이 건설되기 직전에 이곳에 아치가 지어졌을 것이다. 그 후 극장을 완전히 해체해서 덮어 버리고 무덤을 강조하기 위한 완벽한 원뿔을 만들었다. 안쪽 궁전에서 바깥쪽은 터널이 건설됐다. 기원후 132년 바르 코흐바 시대 반란군들이 이곳에 숨었다. 

헤롯의 마우솔리움, 영묘는 3층 구조이다. 1층은 정사각형 기초로 10x10m, 전체 높이는 25m이다. 2층은 18개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원형이고 원뿔 모양의 지붕을 갖고 있다. 장엄한 장식이 용이한 단단한 석회암으로 지어졌다. Hill의 경사면에서 유일하게 덮이지 않은 지역이다. 석관 세 기가 영묘 부근에서 발견되었는데, 장미꽃 장식이 있는 붉은색 사르코파거스는 분명 헤롯의 것이다. 다른 두 개는 흰 돌로 만들어졌다. 바르코흐바 반란 다시 반군이 영묘와 석관을 부수었다. 헤롯에 대한 미움을 표출한 것이다. 다른 2개의 관은 부서진 채 발견되었다.  

 

헤롯은 여리고 겨울궁에서 죽었다. 왕의 주검은 남쪽으로 내려와 헤로디움에 이르렀고, 하부 플라토에 큰 미크베가 딸려 있는 장례 단지까지 350여 미터의 길이를 행진해갔다. 그도 결국 죽을 인생이었다. 

 

 

 

 

 

 

  

 

 

 

마우솔리움은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는 마우솔루스의 무덤에서 파생한 단어다. 케베르(무덤-석관)와 네페쉬(비문 등으로 추모)가 있는 건물로 이해한다. 예루살렘 기드론 계곡에도 인상적인 마우솔리움이 있다. 야드 압살롬, 압살롬을 기념하는 마우솔리움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헤롯의 영묘와 너무 닮았다. 헤롯의 손자이자 유다의 마지막 '왕'으로 기능했던 아그리파 2세의 영묘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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