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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Alber Elbaz, 회고전 Dream Factory

2000년대 대부분의 시간을 랑방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보낸 알베르 엘바즈는 이스라엘 사람이고, 파트너와 30년을 함께한 게이였으며, 2021년 4월 코로나로 사망했다. 천정부지 랑방 원피스 가격만큼이나 나와는 상관이 없는 사실들이었는데, 그의 회고전  Dream Factory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오늘부터 패션피플이다.ㅋ

 

이스라엘의 홀론이라는 도시에는 인상적인 디자인 박물관이 있는데, 엘바즈는 어렸을 때 이 근처에서 자랐다. 엘바즈의 인생 로드맵을 회고하는 데 이보다 좋은 장소는 없었다. 엘바즈의 아트디렉터 케이티 라이스, 파트너 알렉스 구, 그리고 가족들이 모여 그의 복잡하고 영감있는 생을 편집했다. 박물관 입구의 오프닝 갤러리에서 그의 삶을 형성한 지리적 틀을 돌아볼 때부터 엄청난 감정의 소용돌이를 느끼게 된다.

 

엘바즈는 1961년 모로코 카사블랑카에서 태어나 1964년 홀론으로 이민했고 군복무를 마친 후 라마트간 Shenkar 학교에서 디자인을 공부했다.

25살 어머니가 마련해 준 800달러를 들고 미국으로 가서 제프리 빈에게서 배웠다. 미국 사람들은 그의 이름에서 t 발음을 하지 않았다. 그는 아예 t를 떼어내고 Alber가 되기로 한다. 유대교에서 이름을 바꾸는 것은 운명을 바꾸는 행위이다.

36살 파리로 건너가 기라로쉬, 입생 로랑을 거쳤다.

2000년 중국을 여행했고 40세 때 랑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랑방의 소유주는 장개석의 오른팔 왕척오 장군의 딸 왕효란이다. 개인적으로 그의 스케치에서 중국 모티브가 떠올랐다. 특히 붉은 드레스와 큰 꽃. 하지만 그의 랑방 콜렉션이 중국적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나. 모티브를 잊을 만큼 새로운 형태로 태어나는 그의 디자인이 경이롭다.   

TMI: 엘바즈의 파트너 알렉스 구는 한국계이다. 랑방에서 제작부 일을 했다고 한다. 한섬이 라이센스 계약으로 랑방을 가져다 한국에서 옷 만드는 게 이런 인맥 때문인가? 

 

6살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가 애호했던 피베르카스텔 연필 세트. 7살 때 날마다 선생님의 옷을 스케치했다가 학년말에 선물했다고 한다. 어렸을 때부터 스윗했다. 

 

전시관 2층은 그의 주요 커리어와 사건들이 연대별로 소개된다. 짧은 문구들이지만 그가 한 말과 생각들이 많이 박힌다. 엘바즈는 패션 세계에서 희귀한 사상가였다.

완벽함을 좋아하지 않아요. 그건 위험하다고 생각해요. 완벽함 뒤엔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The only thing I do not do is summarize. I do not do retrospectives.

모두가 젊고 마르기를 바라죠. 곡선은 놀라워요. 주름은 최면이에요. 왜 당신 자신으로 행복하지 못하나요?

 

2012년 63세의 메릴 스트립이 '철의 여인'으로 오스카 여우주연상을 받을 때 시상식에서 입은 골드 드레스이다. 알베르는 자신의 성향이 취약함에서 나왔다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도도한 사람들 틈에서 자신은 너무나 자신감이 없고 그래서 속삭이는 것을 선호한다는 것이다. 또 자신이 여성들에게 제공한 것은 아첨이 아니라 보호 수단이었고, 특히 레드 카펫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여성들과 연대하고자 했다고 말했다. 자신의 뚱뚱한 몸매에 언제나 주눅이 들었다는 그는 여성들의 사이즈가 다양하다는 것을 이해한 거의 유일한 패션 디자이너였다. 입생 로랑에서 빼빼 말라 비틀어진 옷으로 여성들을 괴롭히던 이상한 디자이너들 생각난다.   

 

2015년 디자이너 최고의 영예인 Superstar award를 받았고 이어서 갑자기 해고됐다. 패션 디자이너란 맨하튼 고급 호텔의 콘시어지와 비슷하다고 말한 적이 있는 엘바즈의 생각이 옳았음을 실감하는 계기였다. 많은 결별 사례들처럼 매우 볼썽사나운 과정이었지만 사람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았던 그를 위해 330명 랑방 직원이 그의 복귀를 회사에 정식 요청하기도 했다.   

 

이후 엘바즈는 세계를 여행하면서 패션 대회를 심사하고 패션에 대해 연설하고 다음에 해야 할 일을 계획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2016년 한국도 방문했는데 신라 호텔에 묵으며 명동 길거리 음식과 노래방을 인스타그램에 남겼고 바로 그 가수 승리(!)와 친분을 쌓고 갔다.

 

2019년 엘바즈는 새로운 경영자(Richemont)와 제휴한다. 브랜드 이름은 알베르 엘바즈의 첫 자와 마지막 자인 AZ Factory가 되었다. 2021년 그 첫 번째 컬렉션을 선보이자마자, 이내 코로나로 사망한 것이다. 그는 패션이 민주적인 사치품 a democratic luxury이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패션 디자이너로서 명백히 high fashion을 옹호하지만 (mass market은 너무 messy하니까) 유니클로처럼 모든 사람을 끌어들이는 패션 산업을 동경하기도 했다. 아마도 그런 고민이 AZ Factory에 녹아 들지 않았을까. 

 

2021년 10월 5일 파리의 팔레 갈리에라에서 AZ Factory와 44명의 디자이너들이 모여 엘바즈를 추모하는 회고전을 열었다. 그의 평소 소신대로 사랑을 주제로 했다. Love Brings Love. 홀론 디자인 박물관은 이 오리지날 꾸뛰르를 미디어와 함께 재탄생시켰다.

 

내 의견은 안 중요하겠지만 베르사체, 지방시, 아르마니 순서로 좋았다. 

 

이 회고전에 존 갈리아노가 참석했다. 지방시와 크리스찬 디올에서 전성기를 맞았던 갈리아노는 2011년 성공한 사람치고는 한심한 실수를 한다. 파리의 한 바에서 술에 취해서 관광객에게 욕을 했는데, 그게 반유대주의 발언이었던 것이다. 혐오 발언을 공공연히 뱉는 것은 적어도 유럽에서 법적인 처벌이 따른다. 그 후 갈리아노는 유대인 공동체에 사과했고 절친인 엘바즈에게 이스라엘에서 함께 패션 수업을 하자고 제안하기도 했다. 엘바즈가 태어난 카사블랑카와 갈리아노가 태어난 지브롤타는 작은 바다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나이도 비슷하고 배경도 비슷한 두 사람의 연대감이 아무리 커도, 엘바즈 혼자 용서하고 매듭지을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갈리아노는 2014년 메종 마르지엘라에 들어가 조용한 행보를 이어가고 있다. 갈리아노가 복귀하는 첫 컬렉션에서 엘바즈는 애호하는 연필 세트를 선물했다고 한다. 연필은 표현의 자유를 허락하고 지우고 용서할 능력도 준다는 메모와 함께. 

 

그는 3살 때 이민와 transit camp 생활을 했던 이스라엘 바트얌이라는 해안도시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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