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교 에다를 종교성 여부로 구분하면 대단히 복잡해진다.
- 세속인 유대인 힐로님
- 종교가 아닌 유대인 전통만 지키는 마쏘레팀
- 일상에서 키파를 쓰고 종교활동을 하는 종교인 다팀
- 토라 학습만 하는 초정통파 종교인 하레딤
종교 유대인은 다시 개혁파, 보수파, 정통파로 나뉜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에서 공식화된 유대교는 정통파orthodox이다. 정통파의 할라하만 인정된다는 뜻이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지만 여성이 랍비가 되거나 공개적으로 기도문을 읽을 수 없다. 미국과 캐나다 같은 북미 출신 유대인이 아무리 자유를 신봉해도 종교인이라면 정통파이기 쉽다. 결혼한 여성은 머리카락을 가려야 하고 바지를 입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여전히 한다. 그런가 하면 샤밧에 차를 타고 거침없이 사는 것 같아도 의외로 자신을 종교인이라 소개하는 경우가 있다. 개혁파나 보수파이기 때문이다.
여성이 토라 스크롤을 들면 개혁파 아니면 보수파다.
동유럽 복장 중에 남자 양말은 하시딤이다. 초정통파지만 하레딤과 같은 개념은 아니다.
이들의 형성사는 유럽의 근대화와 맞물려 있다. 18세기 계몽주의와 emancipation (시민권리운동)이다. 우리한테 친숙한 계몽주의는 교회에 대한 저항으로서 인간이 자신의 논리를 사용해 스스로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으로, 마르틴 루터의 개신교 개혁이 뿌리다. 프랑스 혁명으로 폭발해, 영국의 개혁과 미국의 건국에 영향을 미치는 사건이다. 카톨릭의 본고장에서 개신교의 태동과 약진에 주목하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의 고향 독일에서는 좀 더 복잡한 일이 일어난다. 독일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 변수이다. 1729년 데사우에서 태어나 베를린에서 활동한 Moses Mendelssohn이 주인공이다. 어찌나 가난했는지 14살인 1743년 토라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베를린까지 걸어갔다는 일화로 유명하다.
1755년 멘델스존이 발간한 히브리어 주간지 "Kohelet Musar"는 토라 외에 자연 과학을 통해 신을 만날 수 있는 방법을 소개한다. 특히 "형이상학의 증거에 관하여"라는 에세이는 임마누엘 칸트를 제치고 프로이센 과학 아카데미의 선택을 받아 멘델스존을 회원으로 선택하기도 했다. 물론 독일 황제가 유대인의 입회를 막았지만. 아무튼 덕분에 멘델스존은 독일 계몽주의자들과 폭넓게 교제하면서 사교계의 명사가 됐고 이렇게 얻은 영향력을 유대인의 시민권리 획득을 위해 사용했다. (*그림은 유대교 개혁파 모리츠 오펜하임이 그린 라바테르, 레싱, 멘델스존)
당시 주로 상업에 종사했던 유대인은 기업과 비슷한 지위로 당국과 교류하며 개인이 아닌 집단으로서 세금을 냈고,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유대인 법정에서 해결을 시도하다가 안 되면 독일 법정으로 갔다. 거주지 역시 당국이 정해준 곳으로 한정됐다. 따라서 시민권리운동은 유대인들이 원하는 곳에 살고, 독일인 기독교 길드에 가입해 더 많은 직업에 접근하며, 독일 학교에 입학할 권리를 의미했다. 모든 기회의 문이 열린 것이다.
당연히 독일은 유대인의 시민권을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볼테르 같은 계몽주의자도 유대인은 본질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에 주류 문화 밖에 남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시기이다. 유대인들은 수세기 동안 유럽에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외부인으로서, 그들만의 문화와 법과 언어를 사용했다. 이제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독일의 문화와 법과 언어에 지식이 있음을 증명해야 했다. 이런 필요에서 1774년 멘델스존이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이두' 같은 방식이다. 독일어 발음을 히브리어 알파벳으로 적는 것이다. 바른 이해를 위해 주석을 사용했는데 이게 비우르(Biur)이다. 유대인 공동체의 계몽주의, 즉 하스칼라השכלה의 최초 저작물이다.
독일 유대인은 독일 민족주의가 현대 국가 건설을 완성한 1871년에 드디어 독일 시민권을 얻는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유대인이 독일 사회에 완전히 통합되는 데 분개했다. 1819년 8월 2일, 뷔르츠부르크에서 Hep-Hep 폭동이 일어난다. "Hep-Hep"은 가해자들의 경멸적인 외침을 뜻한다. 독일 양치기들이 양들을 몰아가는 전통적인 소리라고도 하고, 십자군 시대 사용된 라틴어 슬로건 "Hierosolyma est perdita"(예루살렘이 멸망했다)의 머릿글자라고도 한다.
이 그림이 훌륭한 게 유대인 피해자들의 외양이 가해 독일인들과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이런 반유대주의가 지속되면서 독일 유대인들은 사회적 인정을 받기 위해 기독교 개종을 택한다. 멘델스존의 여섯 자녀 중 네 명이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그중 한 명이 결혼행진곡으로 유명한 작곡가 멘델스존의 아버지였다. 독일 유대인의 독일 시민권은 50년 후 나치에 의해 폐기된다.
하지만 계몽주의가 유대인의 종교적 측면에 미친 영향은 부인할 수 없다. 19세기까지 독일 대도시의 유대인 공동체에는 랍비가 단 한 명이었다. 독일 정부에 의해 임명되는 직책으로 해당 도시 유대인의 모든 문제를 결정하는 전능한 지위였다. 해당 도시에 사는 유대인은 이 랍비의 말을 들어야 했다. 유대교에 과학적 연구를 적용하고자 하는 Wissenschaft des Yubentums, 다시 말해 유대인을 좀 정상적으로 보이게 만들자는 개혁주의 입장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권위였다. 이들은 전통의 현대화를 주장한다.
첫 번째 시도가 기도서 혁신이다. 기도서에서 '예루살렘이 유대인의 진정한 고향'이라는 언급을 제거한다. 그들의 고향은 독일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꿈도 꾸지 않았다. 또 이디시어가 아닌 독일어로 된 설교를 했다. 키파 착용을 중단하고 오르간 음악을 추가했으며 예배 시간도 단축했다. 전통적인 랍비들은 이러한 변화를 전부 거부했지만 결국 일부 도시에서는 서서히 변화가 시작됐다. 마침 베를린은 유대교 회당을 개조했는데, 이 때문에 한동안 유대인들은 작은 공간에 모여야 했다. 소규모 그룹 모임이 시작되자 새로운 흐름이 대중화된다. 특히 1830년대 후반, 랍비 Abraham Geiger를 중심으로 한 젊은 랍비들이 자유로운 개혁 운동에 이끌리기 시작한다.
개혁파reform judaism는 유대교가 항상 진화해야 한다는 이데올로기를 내세우며, 탈무드가 구전 토라, 즉 계시라는 생각을 거부했다. 개혁파 전에는 정통파orthodox judaism라는 것이 없었다. 유대교는 하나였으니까. 정통파는 개혁파를 거부한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가 된다. 구전 토라인 탈무드 역시 시내 산에서 계시되었고, 랍비들이 해석한 토라의 권위를 부인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개혁파는 미국으로 건너가 Hebrew Union College를 세운다. 정통파는 예쉬바 체제를 고수하고 미국에서 Yeshiva University를 세운다.
예루살렘의 HUC 캠퍼스. 모세 사프디 설계로 1998년 완공됐다.
1963년 지어진 첫 건물은 콘크리트 덩어리인데, 정면에 있는 요르단 저격수들을 피하기 위해서다.
정통파에서 신정통파neo orthodox가 파생한다. 랍비 Samson Raphael Hirsch이다. 유대인 남성이 수염을 깎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하나의 유대교가 분리되기 시작한다. 당시 히르쉬 랍비는 교리 논쟁에 질려서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공동체의 공식적 분리를 허용했는데, 이로써 모든 유대인이 공식적으로 하나라는 주장이 깨지고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된 것이다.
개혁파에서 보수파conservative judaism도 갈라져 나온다. 랍비 Zecharia Frankel이다. 기도문을 히브리어가 아닌 독일어로 읽기 시작했다. 자신들의 조부모와 같은 방식으로 기도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신이 말하는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보수파 신학교가 JTS(Jewish Theological Seminary)이다.
19세기 후반 유대교의 개혁주의는 독일에서 다수가 되었고 상당수가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그러니까 미국의 유대인은 이 개혁주의에 더 친숙하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시편 구절은 137편이다. 바벨론 땅으로 유배된 이들이 수금을 뜯으며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는 내용으로, 예루살렘을 잊느니 자기 오른손의 재주를 잊겠다고 선포한다. 임 에슈카헤흐 예루샬라임 티슈카흐 예미니. 예루살렘 곳곳에 써 있는 이 구절은 마치 오늘날 정통파 유대교가, 개혁을 실험했던 18세기의 실수를 다시 하지 않겠다는 결기처럼 보인다. 유대교가 점점 더 극단주의로 변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이유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정통파가 자기만 옳다는 입장을 고수하는데, 그보다 더한 초정통파 하레딤은 변할까?
2065년 이스라엘 인구는 2천만 명에 이를 텐데, 그중 3분의 1이 하레딤이 될 거란다. 인구 세 명 중 두 명이 다른 한 명을 먹여 살리는 사회가 된다는 전망이다. 개혁을 멈춘, 거부한 종교의 귀결은 끔찍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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