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1일, 이날을 빼빼로 데이나 싱글 데이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은 태평성대를 산 것이다. 유럽과 미국에서 이날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날이다. 이스라엘의 외국 공관들은 자기 처지에 맞게 기념식을 갖는다. 전승국 프랑스의 기념식은 매년 11월 11일 아코 근처 야드 나탄 칼리지에서 1969년 발견된 Caffarelli 무덤에서 치러진다. 아코의 공성전을 지휘하다가 사망한 프랑스 장군 카파렐리 뒤 팔가의 무덤이다.
발굴 당시 현장에는 아무 표시도 없었는데, 주변의 이슬람 무덤과는 닮지 않아서 눈에 띄었다고 한다. 아무 표시가 없었던 이유는 이슬람 지역 주민들에게 모욕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카파렐리 장군은 나폴레옹 군대에서 가장 다채로운 인물 중 하나였다, 에레츠이스라엘에 오기 4년 전 유럽 전투에서 왼쪽 다리를 잃어서 군인들은 그를 "나무 다리" 또는 "목발 짚는 아빠" 등으로 친근하게(장애인 모욕인데?) 불렀다고 한다. 나폴레옹 군대가 아코를 포위하는 동안 카파렐리는 운하 너머에서 오토만 저격수가 쏜 총에 부상을 입고 한쪽 팔까지 절단하게 된다. 부상이 심해져 2주 후에 사망했고 임종 직전 오랜 친구인 나폴레옹이 방문했다고 한다. 주이스라엘 프랑스 대사관은 카파렐리의 공동묘지에서 1차 세계대전 휴전 협정과 무명 용사 추도식을 거행한다. 카톨릭 예배를 기초로 한다.
8월 15일이 생일인 나폴레옹은 코르시카의 작은 도시 아작시오에서 태어났다. 나폴레옹이 유럽에 한 일도 대단하지만 중동의 판도를 바꾸어 놓았다는 점에서도 엄청난 인물이다. 1798년 5월, 30세의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향한 이유는 여전히 주적이었던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프랑스 혁명 정부의 요구대로 영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런던으로 진군하는 방법도 있었지만, 외국에서 영국의 영향력과 싸우는 것이 더 쉬워 보였기 때문에 이집트로 향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에는 정치적인 목적 외에도 과학과 문화와 언어와 고고학적 목표도 있긴 했다. 그 결실이 1809년부터 출판된 Description d'Egypte이다. 전체 23권인데 이 중에서 3권은 지금까지 인쇄된 책 중 가장 큰 책으로 높이가 1미터가 넘는다. 또 피에르 자코탱과 지리학자들이 이집트와 레반트의 지도를 완성했다. 훗날 영국은 이를 토대로 1차 세계대전에서 오토만을 제압한다.
나폴레옹 군대가 이집트를 정복하자 1798년 9월, 오토만은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고 영-오토만 동맹을 맺는다(a.k.a. 국제 정세를 이렇게 못 읽으니 보스포로스의 환자 취급을 당한다). 나폴레옹은 선제공격을 결정하고, 레반트로 진격한다. 13,000명의 프랑스군을 이끌고 성지로 들어가 맘루크, 아랍, 터키군과 격돌하고 엘 아리쉬, 가자, 자파, 하이파는 점령한다. 하지만 1799년 4월 엘 자자르 파샤가 지키고 있는 아코에서 덜미가 잡혀 한 달 반이나 시간을 끈다. 이 기간에 갈릴리를 확보하기 위해 보낸 군대가 4월 16일 타보르 전투에서 이긴다. 그 후 나사렛, 쯔팟, 야곱의 딸 다리 (골란고원과의 경계, 다메섹으로 가는 길) 까지 도달한다. 요르단 강을 가로지르는 (야곱의 딸) 다리 옆에 1170년 프랑코 십자군이 지은 요새가 있었다. 히브리어로 메짜드 아테렛מצד עתרת이고 프랑스어로 샤스틀레 (Chastelet) 이다.
끝내 나폴레옹은 아코를 점령하지 못하고 1799년 5월 17일 이집트를 거쳐 프랑스로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에 남은 군대는 흑사병으로 거의 전멸하지만, 워낙 영웅적이었던 타보르 산 전투 승리를 위로삼아 6월 14일 카이로로 의기양양하게 진군한다.
'자파의 전염병 희생자들을 방문하는 보나파르트' 앙투안느 장 그로스의 그림이다. 배경에 그려진 수도원이 아르메니안 성 니콜라스 수도원이다.
한편 영국은 단지 팔레스타인만이 아니라 이집트에서 인도, 홍콩에 이르기까지 commonwealth 과거 영연방국가가 전쟁을 수행한 나라들에서 war graves를 운영하고 있다. 전 세계 153개 국에 170만 묘지라고 한다. 영국이 얼마나 전쟁을 많이 벌였는지 실감이 간다. 전 대륙에 걸쳐서 전투를 수행하는 와중에 전사자들의 운구를 일일이 본국으로 옮기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법적으로 해당 국가에 영국 군대 전사자의 무덤을 마련한다. 남의 나라 군인들한테 묘지로 쓰라고 영구적인 영토를 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지만 다들 식민지였으니 말을 들을 수밖에.
이스라엘에는 여섯 군데 (예루살렘 전망산과 탈피옷, 하이파, 브엘세바, 람레, 나사렛), 팔레스타인에는 세 군데 (가자, 툴 카름)에 영연방 전쟁 묘지 위원회가 운영하는 묘지가 있고 약 16,000 묘지가 있다. 누가 묻혔든 묘지는 역사와 문명에 대해 사고를 자극하는 법이라, 여전히 폭력과 야만의 전쟁터인 이 땅에서 시간을 들여 방문해 볼 만한 장소가 분명하다.
전사자 이름과 생몰시간만 적혀 있는 군인 무덤에서 쓴 웃음이 날 만한 일도 있다. 예루살렘 무덤 중에는 윌리엄 세익스피어가, 람레 무덤 중에는 해리 포터가, 가자 무덤에는 프레데릭 코헨이 발견됐기 때문이다. 매년 11월 11일에서 가장 가까운 샤밧에 예루살렘 묘지에서, 욤리숀(일요일)에 람레 묘지에서 영국 대사관이 주관하는 기념식이 열린다.
대부분 영국군이고 영연방 중에서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군(ANZAC)의 희생이 크다 보니 묘지에는 십자가가 두드러진다. 그래서 이곳을 훼손하는 시도가 계속돼 왔다. 2019년 10월에는 하이파 묘지의 십자가와 유대인 비석에 나치 문양 낙서가 뒤덮였었다. 범인이 잡혔나?
람레는 전통적인 아랍 도시지만 현재는 유대인 인구가 조금 더 많은데, 해안 평야 교통 요지에 자리잡은 도시치고는 이해할 수 없는 낙후함이 여전하다. 무엇보다 세 군데나 되는 교도소가 이 도시에 드리운 우중충함이 장난 아니다. 무슨 교도소를 한 도시에 세 개나 몰아넣나, 정말 이상하다. 여자 교도소 네베 티르짜, 부패사범들의 쾌적한 교도소로 유명한 마아씨야후, 그리고 이 아얄론 교도소다. 아얄론 교도소에서 한두 블록 지나면 람레 영국군 묘지가 있다.
1917년 11월 13-14일 에레츠이스라엘의 운명을 바꾼 무가르 리지, 혹은 Junction station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현재 네메르라는 시멘트 공장이 서 있다. 소렉 골짜기, 즉 Wadi sarar라고도 한다. 네메르는 독수리라는 뜻이고 람밤 (Rabbi Moses ben Maimon)의 별명이기도 하다. 그래서 현재 이 Junction은 네메림이라고 불린다.
이스라엘 영토에 있는 여섯 군데 영국군 전사자 묘지 중에 가장 큰 규모의 람레 묘지이다. 약 3500개 묘비석이 있다. 두 번에 걸친 세계대전은 에레츠이스라엘, 혹은 팔레스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이제 찾는 이는 거의 없어서 혼자 고즈넉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람레 묘지의 뜻밖의 셀럽 해리 포터이다. 19살의 해리 포터 이등병은 1939년 7월 헤브론에서 전사했다.
할머니는 로스칠드 가문 출신이고 아버지는 영국 전직 수상이었던 Neil James Archibald Primrose. 사망 당시 본인도 영국 자유당 하원 의원이었다. 기독교인이 분명하다. Royal Bucks Hussars가 갈리폴리에서 큰 타격을 입자 군 복무를 재개해 전장에 왔고 결국 사망했다.
1차 세계대전 초반만 해도 벤구리온이나 모세 샤레트 같은 지도자들은 오토만 편에 서야 한다고 믿었다. 하임 바이츠만의 영국 노선으로 재조정되기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결국 이민자 유대인들만으로 Batallion이 꾸려져 영국 군대에 편성됐고 희생된 군인들의 묘비는 다윗의 별과 함께 세워졌다.
아랍군, 터키군은 따로 한쪽에 자리를 잡고 있다. 마침 묘지 너머로 모스크가 세워져 정기적으로 알라 알아크라를 틀어준다. 묘지에서 일하는 분들이 너무 심심해서 그런지 방문자에게 몹시 친절하시다. 일할 곳도 많지 않은 람레에서 꽤나 좋은 일터라고 한다. 영국 성공회 예전으로 진행되는 기념식에는 스코틀랜드 스커트를 입은 분이 백파이프를 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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