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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 돌로로사, 예루살렘

매주 금요일 오후 3시, 프란체스칸 수사들의 비아 돌로로사 procession이 있다. 프로세션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걷는다는 뜻이다. 걷는 행위를 비효율적인 구시대 유물로 여기는 시대에 성지를 걷는 것은 내가 누구인지, 이곳이 어디인지, 사람은 무엇인지 느끼게 해 주는 일이다. 다시 예루살렘에 폭탄 테러가 시작됐음을 알린 2022년 11월 23일 이후 마음 한구석이 무너진 것 같다.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에 걷기로 한다. 예수님의 고통의 길 비아 돌로로사, 나의 호흡을 느끼고 내 근육의 움직임을 통제하고 머릿속으로 잡념을 몰아내고 들려오는 기도소리에 집중한다. 

    

제1처소: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선고받은 곳이다. 현재 우마리야 초등학교이다. 평소에는 공부해야 하는 학교이므로 닫혀 있고 금요일에만 개방한다. 많은 성서학자들이 이 자리가 무너진 안토니아 요새라고 믿는다. 지형적으로도 타당하다. 성전산의 북쪽 미나렛 살라히야(the tribes gate minaret)도 보인다. 이슬람 유적지를 근거 없이 깎아내리는 경우가 많은데 13세기 맘룩 시대면 본격적인 카톨릭의 건축 프로젝트를 앞선다. 아시시의 프란시스가 성지에 도착한 건 1217년 (그래서 2017년이 카톨릭의 성지 도착 800주년)이고, 카이로에서 알 카밀 아유비드 술탄을 만난 다음 1229년부터 성지에 머물 권리를 받았다. 프란체스칸의 부동산이 점차 늘어나자 교황은 이슬람이 통치하는 위험한 땅을 프란체스칸에게 수호하라고 맡긴다. 1342년 클레멘스 6세의 칙령이었다. 하지만 1517년 오토만이 들어오자 다시 협상을 벌여야 했고 몇 차례 쫓겨난 끝에 16세기에 가서야 프란체스칸의 지위가 확고해진다.

 

뒤늦게 성지 연구에 착수한 학자들은 이상한 점을 느낀다. 왜 예수님이 안토니아 요새에서 십자가형을 받나? 다시 말해 유다 총독 본디오 빌라도가 왜 로마 군인들의 요새에 있나? 유다 총독이 예루살렘에 왔는데 헤롯 궁전에 머물지 않았을까? 헤롯은 기원전 4년에 사망한다. 헤롯의 세 아들을 믿지 못한 로마는 유다 총독 헤롯 아겔라우스를 실각시키고(기원후 6년) 그 자리에 직접 로마 총독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갈릴리 총독인 헤롯 안티파스는 마침 예루살렘에 왔다가 예수님을 조우한 것이다(눅 23). 물론 로마 총독은 자신의 수도를 카이사랴로 여겼지만 유다 총독이 예루살렘에 출장왔는데 그의 처소는 과거 유다 왕의 궁전이지 않을까? 그래서 베니틱트회나 카톨릭 일부에서는 헤롯 궁 키슬레에서 프로세션을 시작한다. 키슬레는 '감옥'이란 뜻인데 오토만과 영국이 차례대로 이곳을 감옥으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현재 발굴을 마치고 공개중이다. 성지에서 논란은 그저 논란이다. 전통은 별개의 문제이다. 

   

제2처소: 예수님이 십자가를 강제로 지신 곳이다. 채찍질과 저주를 당하셨다. Church of Flagellation은 안토니오 바를루치가 1929년에 완공했다. Church of Condemnation에서 가바타, 즉 큰 포장도로가 발견됐기 때문이다. 근처에 있는 ECCE HOMO 교회로 입장료 내고 들어가면 잘 발굴된 로마의 포장도로를 볼 수 있다. 에케 호모 교회는 하드리아누스가 예루살렘을 아일레아 카피톨리나로 개조할 때 세운 3중 아치의 동쪽 포럼 위치이기도 하다. 이런 종류의 논란에 안 빠지는 요세푸스는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에 오면 헤롯 궁전에 머물렀고 바로 그 밖에 있는 포장도로에서 유죄 판결 받은 이들을 채찍질했다고 쓰고 있다.  

 

제3처소: 예수님이 처음 쓰러지신 장소다. 프로세션 전체에서 예수님이 쓰러진 장소는 모두 세 곳이다. 원래 이 장소의 소유권은 아르메니안 카톨릭이 갖고 있었고 터키식 목욕탕이 있던 곳이었다. 1차대전 때 성지를 통치하는 영국군을 돕기 위해 폴란드 부대가 조직됐다. 대개 러시아에 핍박을 받아 시베리아 등지로 유배를 갔던 이들인데 탈출해서 팔레스틴 땅으로 온 것이다. 훗날 이스라엘 우파 리쿠드의 거봉으로 성장하는 므나헴 베긴도 이 부대와 함께 들어와 에레츠이스라엘에 남았다. 폴란드 부대는 고국으로 돌아가 훗날 이 교회 건축에 막대한 재정을 댄다. 대부분 카톨릭 신자들이었던 것이다. 

 

제4처소: 예수님이 어머니 마리아를 만난 장소다. 폴란드 작가가 두 처소 모두 부조를 제작해 이곳 사건을 시각적으로 전달한다. 교회 지하에 생명나무가 있고 고고학 발굴물이 있다. 비아 돌로로사에서 기도하기 가장 좋은 곳이다. 사실 내가 기억하는 4처소는 한참 떨어져 있었다. 언젠가부터 이곳으로 통합됐다. 이해는 간다. 여기가 너무 붐빈다. 역시 아르메니안 카톨릭이 소유권을 갖고 있다. 

 

제5처소: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레네 시몬이 대신 지다. 1229년 성지에서 활동해도 좋다는 카이로 술탄의 허락을 받은 프란체스칸은 5처소 곁에 집을 장만하고 그곳에 거주했다. 그래서 여기에 프란체스칸의 Emblem이 크게 있다 (사실 5처소도 원래 장소는 조금 떨어져 있었지만). 가로지른 두 팔은 예수님과 프란시스의 것이다. 맨손이 예수님이다. 프란시스도 예수의 상처 성흔 stigmata를 가지고 있었다. 큰 십자가 하나에 네 개의 작은 십자가가 채워진 걸 '예루살렘 십자가'라고 부른다. 성지의 수호자 프란체스칸의 상징이다. 프로세션 전체에서 예수님의 만남이 있는 경우는 네 번이다. 어머니 마리아, 구레네 시몬, 베로니카, 그리고 여인들이다. 많은 그리스도인은 이곳에서 시몬의 사역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다. 앞뒤에서 밀어대는 군중들에 휩쓸려 정신없이 지나쳐 갈 장소가 아닌 것이다. 예수님이 무거운 십자가 때문에 쓰러질 뻔해서 벽에 기댔다는 전설의 돌도 하나 붙어 있어서 기념 촬영으로 세상 바쁘다. 그런데 어떤 점에서는 예수님과 시몬의 조우가 이 시장 판복판이었다는 것도 현대인에게 엄청난 레퍼런스이다. 오늘 내게 다가와 부딪친 십자가를 너무 바빠서, 너무 번잡해서, 외면하기 쉬운 거니까.  

  

제6처소: 예수님이 베로니카 (vera icon)가 건넨 천에 땀을 닦으시다. 그 천에 예수님의 얼굴이 새겨졌다나 보다. 

  • 베로니카는 진실한 형상이란 뜻이고 일부러 맞춘 듯한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사건은 중세 카톨릭의 전설에 가깝다. 솔라 스크립투라 개신교인으로서 이곳에서 프란체스칸이 어떻게 기도하는지 궁금했다. 다른 처소들은 당연히 관련된 성경 본문을 기준으로 한다. 여기서 읽는 본문은 시편 27편이다. "내 얼굴을 찾으라." 신을 믿는 모든 인간은 자기 신의 얼굴을 보고자 한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서 한 여인이 그 기적을 경험했다. 로마 군인들의 잔인함,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조차 사로잡힌 두려움, 무도한 군중의 소란과 절망 속에서 여인은 선의에서 비롯된 작은 친절을 베풀었을 뿐이다. 덕분에 피투성이 멍 들어 있는 그분의 인간적인 얼굴을 보았다. 오직 마음으로만 우리는 예수님을 볼 수 있다. 이 깊은 슬픔 속에서 선의만이 우리를 지탱시켜 준다. 오직 사랑만이 사랑 그 자체이신 하나님을 알아볼 수 있게 한다.
  • 프란체스칸 수사들의 Habit와 세 매듭이 있는 Cinture가 잘 보인다. 세 매듭은 빈곤, 순결, 순종이다. 중세 시대 갈색은 염색되지 않은 가장 싼 천으로 이들이 섬기던 농민들이 기중한 천이었다고 한다.
  • 현재 6처소는 말키트, 즉 그릭 카톨릭 수녀회가 운영하고 있다. 성화를 제작해 판매하신다. 이 종파는 시리아 정교회가 이집트 콥틱, 아르메니아 사도교회, 에티오피아 테와히도 정교회와 함께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화될 때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물론 이런 존재가 있다는 걸 로마는 12세기 십자군으로 와서야 알게 됐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마당에 반갑긴 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완전히 아랍화되어 아랍어로 예배를 드리고 있었고, 인종주의는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이기 때문에 십자군의 학대도 없지는 않았다. 16세기 변화가 일어난다. 종교개혁이 일어나 로마가 상당수의 신도를 잃어버린 것이다. 아, 근동 어딘가 우리 신도가 있지 않나. 그래서 팔레스타인의 아랍계 기독교인은 카톨릭에 통합됐다. 예전으로는 카톨릭을 따르지만 완전히 같을 수는 없는 그런 종파이다. 현재 이스라엘 땅에서 가장 많은 기독교인 인구가 이 멜키트이다.   
  • 안쪽에 안토니오 바를루치가 설계한 작은 채플이 있다. 

 

제7처소: 예수님이 두 번째 쓰러지신 곳이다. 서쪽 카르도의 한복판이기 때문에 다양한 주장이 있다. 예수님의 사형 선고가 여기 게시됐다고도 하고, 심판의 문이 서 있던 곳이라고도 하고, 골고다로 나가는 예루살렘의 옛 성벽이 있던 자리라고도 한다. 현재 홀리 세퓰커, 성묘교회의 가장 큰 논란은 성 안에 있다는 것인데 이를 해결하려면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은 제2성벽을 찾는 것이다. 요세푸스가 기록하고 있는 헤롯이 세운 성벽인데 아직 찾지 못했다. 이유는, 지금 그 위에 사람들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어쨌든 요세푸스 말대로라면 골고다는 성벽 밖에 있었고 그 경계점이 제7처소인 셈이다. 로마 시대 카르도는 지금도 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매우 번잡하다. 처소 안으로 들어가 지하 동굴을 방문할 필요가 있다. 

 

제8처소: 예수님이 우는 여인들을 만나 "네 자녀를 위해 울라'고 하신 곳이다.

  • 예수님의 마지막 길에 수많은 여성들이 동참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여인들은 잃을 게 없으니까.
  • 교회가 서지 못한 것은 동방 정교회 Saint Charalambus 수도회에 접해 있기 때문이다. 샬랄람부스는 현재 터키 남부 마그네시아의 주교였던 인물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시절 탄압을 받고 처형됐다. 기원후 202년 순교 당시 113세였다는 설이 있다. 노인이어서인지 아이콘으로 굉장히 많이 접할 수 있는 분이다. 몇 년 전 14개 처소 공히 저런 반원 바닥을 설치했다. 거룩한 곳이라는 뜻이다.
  • 제8처소 아래쪽에 성요한 기사단의 독일 개신교 지부가 있다. 호스텔로 사용하고 있는데 시설도 좋고 당연히 위치도 최상이다. 문제는 너무 예약이 많아서 여유로울 때가 없다.   
  • 제8처소 위쪽으로 예루살렘 최고의 호무스 가게로 자처하는 60년 역사의 리나Lina가 있다. 한때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건너편까지 가게를 확장했는데 알다시피 코로나는 모든 것을... 이상한 의리를 지키며 거의 반드시 올드 시티에서는 리나를 들르곤 했는데 요즘은 잘 안 가게 된다. 나만의 문제는 아니다. 

 

제9처소: 예수님이 세 번째 쓰러지신 곳이다. 전체 경로에서 벗어나 성묘교회 윗길로 가야 나온다. 저 십자가는 콥틱 교회의 것이다. 한때 저곳에 프로세션에 사용한 십자가를 두게 했던 게 사람들을 끌어들인 묘수이긴 했다. 그게 없어진 요즘은 거의 이곳을 들르지 않는다. 길도 복잡하고 너무 폐쇄돼 있기 때문이다. 이길 너머로 성묘교회에 입장하면 에티오피안 수도회 Deir es-Sultan이 나온다. 헬레나 채플의 지붕이기도 하다. 프란체스칸 프로세션도 성묘교회 정문으로 입장한다. 

 

제10처소: 예수님의 옷이 벗겨진 곳이다. 홀리 세퓰커, 성묘교회의 입구이다. 오른쪽에 대리석 기둥이 프랑코 교회, 즉 십자군이 건설한 채플이다. 성묘교회의 이중문은 살라딘에 의해 하나가 막혔다. 출입장 세금을 징수하는 데 용이하기 때문이다. 아치 아래 린텔 부분에는 예수님의 생애를 묘사한 조각이 있었는데 낙하 위험이 있어 떼어서 록펠러 박물관에 보관중이다. 2층 창문 아래 사다리는 그 유명한 1757년 오토만 통치 아래에서 예루살렘과 베들레헴 성지의 Status Quo, 즉 기독교 여섯 정파의 전체 합의가 없다면 아무것도 건들지 않는다는 협약의 상징이다. 저 창문으로 드나들던 에티오피아 수사들이 사용하기 위해 두었던 사다리다. 1852년, 1853년 Status quo가 개정됐기 때문에 그 사이에 사다리가 치워진 희귀한 사진들도 볼 수 있다. 프란체스칸 종탑 위에 그리스 정교회 깃발이 나부끼고 있다. 

 

 

 

제11처소, 12처소, 13처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11) 사망하신(12) 골고다이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눅 2:20-25). 심장에 비수가 꽂힌 마리아(13)를 중앙에 놓고 왼쪽은 카톨릭의 골고다, 오른쪽은 정교회의 골고다이다.

이곳의 고고학적 가치를 믿을 수 없어서, 역사성을 검증할 수 없어서 기독교 타정파의 성지에서 아무것도 느낄 수 없다고 토로하는 개신교인이 많다. 맞다. 나도 그럴 때가 있다. 하지만 신앙이 신념이 되는 것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건 매한가지다. 그보다는 다른 이유 때문에 씁쓸하다. 수천 년 동안 싸움을 계속해 온 두 기독교 정파가 한 장소를 두고 여전히 패권을 겨누고 있는 곳이 하필 예수 그리스도의 골고다인 것이다. 내가 짖궂을 수도 있는데, 저 그리스 정교회 수사가 카톨릭 제단에 예를 갖추는지 보고 싶었다. 나는 이곳에 오면 정중앙에 앉아 마리아의 칼로 찔리듯 하는 마음에 대해 생각한다. 

 

제13처소의 이동: 원래 13처소는 사망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내려진 장소로 믿는 곳이었다.성묘교회를 와본 사람은 교회를 들어서자마자 큰 돌이 놓여 있고 그곳에서 사람들이 그 돌 Unction에 키스하며 기도하는 것을 보았을 것이다. 연간 방문자 백만 명에 육박하는 성묘교회의 통행에 대단한 지장을 초래하기도 하지만, 코로나 기간에 이 돌에 직접 입을 맞추려는 순례자들을 통제할 수 없어 큰 문제가 되었다. 그래서 13처소를 이동했으니 협조해 달라는 공문을 받았다. 프란체스칸 프로세션도 성묘교회에 들어서면 진행이 상당히 어렵다. 많은 인구가 일시에 계단을 올라가야 하고, 모두 함께 서 있기에는 너무 협소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제14처소: 예수 그리스도가 묻히시고 부활하신 빈 무덤이다. 로툰다(round의 뜻)는 기원후 4세기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 때 건설됐고 십자군 시대에도 유지됐지만 1808년 대화제 때 손실됐다. 1809년과 1810년 사이에 미틸레네의 그리스 건축가 Nikolaos Kalfa Komnenos가 재건했다. 이런 사람 이름 좀 기억했으면 좋겠다. 그 아래 에디큘은 상자라는 뜻이다. 역시 콤네노스에 의해 재건됐고 그 이후 수차례 이어진 지진 때문에 피해를 입어 2016년과 2017년 사이에 재복원됐다. 여기에 400만 달러가 투입됐는데 요르단 압둘라 2세가 대부분 냈다. 그분은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팔레스틴 '모든(유대교 제외)' 성지의 수호자이기 때문이다. 안으로 들어가면 시신을 놓았던 장소가 있다. 코로나 기간에는 저렇게 입장을 금지했는데 그 기간에 덕분에 에디큘을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다. 평소에는 에디큘을 감싸며 줄을 서 있는 사람들 때문에 접근도 힘들기 때문이다. 카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안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를 상징하는 대형 촛대들이 서 있다. 시리아 정교회는 별도의 골고다와 빈무덤을 갖고 있고, 이집트 콥틱 교회는 에디큘 뒤에 임시 제단을 세웠고,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제단 없이 더부살이를 하고 있다.   

 

성묘교회 안에 상주하는 수사들이 있다. 그들을 위해 저녁 7시(동계 6시)가 되면 밖에서 문을 잠근다. 1187년 예루살렘을 십자군 손에서 탈환한 살라딘은 이 중요한 교회의 관리를 알 후세이니 집안에 맡겼다. 공식적으로 교회 열쇠를 보관하는 가족이다. 850년 전통은 오늘날 Judeh al Husseini에게 이어졌다. 무슬림 이름이 '유다'이다. 대개 문 옆에 의자를 놓고 앉아 계시므로 지나가다 인사를 건네면 너무 좋아하신다. 일년 중 고난주간에 이 열쇠는 상징적으로 프란체스칸에게 전달된다. 그리고 성일주일의 목요일, 예수님이 겟세마네에서 체포되신 날 성묘교회 안에서 봉쇄된 채 철야할 수 있는 기회가 모든 이에게 주어진다. 무지하게 춥고 시간이 너무 천천히 흐르는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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