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올드 시티가 다시 번잡해지고 있다. 텅 비어 있을 때 쓸쓸했으니, 이런 날이 다시 오면 반가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사람으로 붐비는 올드 시티는 역시 질색이다. 툭툭 치고 가면서 미안하다고 안 하는 게 제일 빡친다. 이 나라 사람들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지나친 일반화일 수 있지만, 미안하다를 달고 사는 우리네 정서에서 볼 때 피해의식 같은 게 엿보인다. 미안하다고 하면 미안한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미안하다고 말로 인정하지 않는 거다. 무슨 한국 드라마에서 '미안하다고 말만 하면 다야?" 이런 류의 대사가 나왔는데 같이 보던 이스라엘 친구가 정말 놀라더라. 미안하다고 말했으면 됐지 뭐가 또 남아 있느냐는 거다. 우리는 우리대로 문제고, 여기는 여기대로 참.
아무튼 그런 번잡한 올드 시티에서 그나마 인적이 드문 곳이 아르메니안 쿼터이다.
올드 시티는 네 개의 쿼터로 나뉘어져 있다. 그건 행정을 관장하는 유대인 입장이다. 원래부터 여기 살았던 무슬림들은 자기네 구역을 훨씬 복잡하게 나눈다. 그쪽을 잘 가지 않고, 갈 필요가 없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다. 차이가 있긴 해도 다들 무슬림들이니까.
기독교 지역도 마찬가지다. 19세기만 해도 현재 Jaffa Gate를 지나 David Tower 앞은 무주공산이었다. 이곳을 차지한 게 영국과 독일 선교사들이었다. 오토만과 협상을 통해 두 나라 교회 연합으로 Bishop 교회가 세워졌고, 그래서 한때 이 지역은 프로테스탄트 쿼터라고 불렸다. 현재는 아르메니안 쿼터에 포함시킨다.
유태인 선교를 목표로 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이 지역을 선택한 이유는, 현실적으로 여기밖에 없었기 때문이지만, 종교적으로 대단히 현명한 판단이기도 했다. 일단 기독교 쿼터는 카톨릭과 정교회가 차지하고 있어 공간이 없었고, 무엇보다 이들은 신생 개신교가 예루살렘에 침투하는 걸 못 마땅해 했다. 구르는 돌을 반기는 박힌 돌은 어디에도 없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선교 목적으로 병원을 먼저 세웠는데, 이것이 예루살렘 최초의 근대 병원이다. 1844년 English Mission Hospital이다. 아픈 유대인들은 별수없이 이곳을 찾아 치료를 받았다. 이게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거슬리지 않았겠나. 당시 유대인 쿼터 랍비는 개신교 교회에 들어가거나 선교사들과 교제하는 사람은 헤렘(공동체 추방)에 처했다. 그러니 유대인 쿼터와 조금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결국 유대인들은 바론 로스칠드에게 달려가 제발 유대인을 위한 병원을 세워 달라고, 안 그러면 다 기독교로 개종할 거라고 청원했다. 그렇게 세워진 병원이 1854년 Meir Rothschild 병원이다. 유대인 쿼터에 세워졌으니 스파라딤 유대인을 대상으로 한다고 할 수 있다. 리투아니아계 유대인들은 자신들만의 병원을 다시 세우는데 1867년 비쿠르 홀림ביקור חולים이다. 지금은 느비임 거리로 이사를 가 있다. 비쿠르 홀림은 병든 자를 돌아보라는 유대교 미츠바 중 하나이다.
영국과 독일 연합 개신교회는 런던 선교회의 후원을 받았다. London Society for Promoting Christianity Amongst the Jews이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들은 기독교가 유대교가 큰 차이가 없다는 식으로 어필하려 했다. 왜 차이가 없나. 그런 선교 방식은 결국 큰 문제를 낳는다. 아무튼 이들은 유대인들이 교회에 들어와서도 회당에 있는 것처럼 편안함을 느끼길 바랐다. 그래서 십자가 대신 메노라를 놓았고 제단도 아론 하코데쉬처럼 성전 방향으로 배치했다. 훗날 스테인드 글라스에 십자가를 장식했을 뿐이다. 개신교 선교사들은 교회를 세운 다음 학교와 공방을 세우는데, 헤렘을 당한 이들은 더 이상 공동체가 제공하는 츠다카(자선금)에 의지할 수 없기 때문에 직접 배움을 얻고 직업을 가져야 했던 것이다.
기독교 쿼터와 거리를 두고, 유대인 쿼터에서 떨어져 있지만, 시온 산에서 너무 멀지는 않은 곳에 개신교는 자신들의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현재의 Christ Church, 임마누엘이다.
이들의 직업 훈련소에서 일한 사람이 콘라드 칙이었다. 손재주가 좋았던 그는 견습생들과 여러 가구를 제작하는데 특히 못을 전혀 쓰지 않고 올리브 나무를 조립만 해서 만든 의자가 인기였다. 지금도 남아 있다.
콘라드 칙은 1822년 독일 남서부 뷔르템베르크의 작은 마을 Bitz에서 태어났다. 올해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세미나가 열리기도 했다. 그의 고향은 템플러 운동의 본산지였다. 메시아가 이스라엘 땅으로 오실 테니 가서 기다려야 한다고 믿었던 극단주의 종말론자들이었다. 템플러는 1868년 하이파에 최초로 정착했고, 수십 년에 걸쳐 여러 도시를 건설하며 살았지만 반유대주의는 극복이 안 됐는지 1930년대 나치에 동조했고 결국 영국에게 쫓겨난다. 콘라드 칙은 템플러는 아니었지만 영향을 안 받지는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성지에 가는 꿈을 키운 것이다. 가난한 소년은 목공소에서 견습생으로 일하면서 시계나 신발을 수리하고 대장장이 일도 배웠다. 20세 때 스위스 바젤에 있는 St. chrishona 신학교에서 공부했고, 선교사가 되기 위한 전도와 공예 훈련을 받았다.
1846년 10월 30일 콘라드 칙은 페르디낭 팔머와 함께 파송을 받아 예루살렘에 도착한다. 전문인 선교사였다. 지역 사회와 일상적으로 소통하고 자기 직업으로 생계를 꾸려 나가고 형제애를 통해 모든 이들을 섬긴다는 계획이었다. 아무도 이들을 반기지 않는 낯선 땅에서 콘라드 칙과 팔머는 ‘형제의 집’을 마련하고 뻐꾸기 시계를 수리 판매하고, 나무로 조각품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했다. 아랍 소년들에게 시계 수리를 가르치며 아랍어를 익히기도 했다.
하지만 1850년 콘라드 칙은 자신을 파송한 선교회와 결별한다. 선교회는 형제들이 독신을 서원하기 바랐지만, 콘라드 칙은 결혼을 원했기 때문이다. 형제의 집을 나와 오갈 데 없는 콘라드 칙을 영국과 독일 선교사들이 직업학교 선생으로 고용해 주었다. 당시 개신교회 지도자가 사무엘 고밧 주교였다. 스위스 개혁교회 바젤선교회가 파송한 선교사다. 예루살렘에서 많은 사역을 진행하기 위해 다양한 건물들을 짓는데 콘라드 칙은 재능을 발휘한다. 선교회로부터 받은 급여로 생활이 안정되자 콘라드 칙은 결혼을 준비한다.
1852년 결혼한 부인은 첫 아들을 출산하다 사망한다. 이 아들도 일 년도 못 돼 죽는다. 두 번째 결혼으로 여섯 명의 자녀를 낳는데 그 중에서도 3명이나 잃는다. 당시 성지는 그런 곳이었다.
콘라드 칙은 60세인 1882년 느비임 거리에 Tabor House를 짓고 거주하기 시작했다.
콘라드 칙과 부인 Friederike Pauline이다. 가족 채플 바깥쪽에 부부의 이름 이니셜이 새겨져 있다. 1901년 콘라드 칙이 사망하고 남은 자녀들은 유럽으로 돌아갔다. 어쨌든 독일인들이었기 때문이다. 버려진 집은 1951년 스웨덴 신학교가 구입해 재건했다. 현재 채플에 걸려 있는 그림은 기독교와 유대교와 이슬람교를 통합했다. 성전에 오르신 아기 예수를 주제로 각 종교의 요소들이 잘 묘사돼 있다.
템플러인 Gottlieb Schumacher와 함께. 프로이센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방문했을 때 콘라드 칙이 동행했다.
콘라드 칙은 1881년까지 house of Industry를 책임지면서, 팔레스타인 탐사 기금(PEF)과 협력했다. 성서 고고학의 세계를 선도한 기관이다. 아마도 콘라드 칙의 고고학적 업적으로는 1880년 발견된 실로암 비문을 들어야 할 것이다. 비문을 발견한 16살 유대인 고아 Jacob Eliahu는 선생이었던 콘라드 칙을 가장 먼저 현장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1863년 프랑스의 De Saulcy가 발굴한 ‘왕들의 무덤’도 콘라드 칙의 노력으로 유다 왕들의 무덤이 아닌 아디아베네 헬레나 여왕의 무덤이라는 게 밝혀진다. 주후 1세기 예루살렘에 살면서 가난한 유대인들을 구제했던 인물이다.
콘라드 칙은 아직 엘악사 모스크가 종교 전쟁의 도화선이 되기 전 성전 산을 탐사한 거의 유일한 인물이다. 1872년 황금돔과 엘악사를 탐사한 결과로 모형을 만들어 남겼다. 성전산을 관장하는 이슬람 waqf가 서구인 가운데 이런 연구 기회를 준 것은 콘라드 칙이 유일하다. 이 모형은 1873년 비엔나 국제 전시회에서 오스만 파빌리온에 전시됐다가, 몇 년 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Christ Church에 상설 전시중이다.
콘라드 칙은 2차 성전 시대 예루살렘 모형과 홀리세퓰커 성묘교회 모형도 만들었다. 1856년 크림 전쟁 이후 여러 기독교 정파들이 대대적으로 교회를 개조하기로 결정했는데, 이를 시행하기 앞서 교회 구조의 복잡성과 단계들을 설명하기 위해 모형을 만든 것이다.
3차원 모형뿐만 아니라 직접 건물을 짓기도 했다.
1863년 사나토리움, 즉 개신교 병원 (느비임 거리 82번지)을 짓는데 훗날 이곳에서 알렌비 장군과 아라비아의 로렌스의 만남이 있었다. 1917년 12월 9일 당시 예루살렘에 변변한 건물은 이거 하나였으니까.
1868년에는 Talita Qumi 여학교의 건물을 디자인했다. 1948년 독립전쟁 당시 폭격을 맞아 현재는 정문만 재건된 상태다. 예수님이 죽어 있는 소녀를 일으키시며 '일어나라 소녀야' 하셨는데 그게 아람어로 탈리타 쿠미이다. 주로 고아였던 이 학교의 소녀들은 개신교 기관의 간호사와 수녀들에게 바느질과 언어를 배우고 간호 기술을 익혀 낮에는 병원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공부하는 생활을 했다.
1874년 신도시 건설 프로젝트를 맡는데, 그게 현재 초정통파 유대인들이 모여 사는 Mea Shearim이다.
1887년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지저스 힐페라는 이름의 병원도 짓는다. 콘라드 칙은 꾸준히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을 지었는데 모두 세 곳이다. 1860년대까지도 예루살렘의 문둥병자들은 시온 게이트 가까이에 있는 버려진 오두막에서 살았다. 폐쇄적인 공동체 안에서 결혼하고 구걸로 생계를 유지했다. 이걸 보고 충격을 받은 개신교 그룹이 성 바깥에 부지를 구입해 이들을 위한 거주지를 지었고, 십 년 후에는 실완 근처에도 병원을 지었다. 콘라드 칙의 딸 Lydia와 결혼한 Dr. Einsler가 지저스 힐페 병원의 감독이었니다. 빌헬름 카이저는 1898년 성지를 방문해 이 병원에 기부금을 냈다. 병원은 1950년 이스라엘 국가로 이양되어 현재 베짤렐 예술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콘라드 칙이 디자인한 교회 건물도 많다. 1873년 아랍인 성도들을 위한 영국 성공회의 성 바울 교회다. 서예루살렘 지역이기 때문에 1948년 이후로는 아랍인이 사용할 수 없어 기능을 멈추었다. 이 교회는 2011년 개조되어 다시 문을 열었고, 러시아 기독교인 공동체 등 새로운 회중들의 예배 장소로 대여되고 있다.
콘라드 칙은 1901년 예루살렘에서 사망해 시온 산에 있는 개신교 묘지에 묻혔다. 반세기 동안 예루살렘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긴 그를 가리켜 예루살렘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라고 부르기도 한다. 예루살렘의 역사가 얼마나 다양한지, 그 다양함 속에 생동하는 수많은 인물들과 그들의 사연들이 조금 더 알려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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