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지 예루살렘에서 가장 중요한 고고학적 업적은 무엇일까. 누가 여기 쉽게 답할 수 있을까. 이 도시에서 가치의 경중을 따지는 건 어려운 일이다. 다 중요하니까. 그런데 가장 위대한 고고학자 한 명을 골라야 한다면, 그래도 몇 명으로 추려질 것 같다. 심혈을 기울여 다섯 명쯤으로 줄이고 줄이면, 그때 이 이름이 반드시 명단에 있으리라 본다. Charles Warren.
영국 군의 공병 장교 찰스 워렌은 1867년 2월 15일 자파 항구에 도착해 거기에서 노새를 타고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빅토리아 여왕이 그에게 바란 것은 솔로몬 궁전의 숨은 보물들을 찾아오는 것이었다. 그는 인디아나 존스의 원조였다. 찰스 워렌이 중심이 된 PEF (Palestine Exploration Fund)는 향후 100년간 이곳의 고고학을 이끌어간다. 물론 당시 이 기관은 레반트 지형을 파악해 향후 전쟁에 활용하려는 군사적 목적이 컸다. 초대 회장을 맡은 윌리엄 톰슨처럼 종교적 야망도 못지 않았다. 유대인 자선가 모세 몬티피오르도 한 몫을 감당했다.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이라 이 기관의 활동을 단지 비판만 하거나 혹은 찬양만 한다면 공정하지 않을 수 있다.
찰스 워렌은 오토만과의 협상에서 "성전 산(엘 악사)을 제외한 모든 곳"에서 탐사할 수 있는 권리를 받는다 (오토만도 참..). 그래서 성전의 서쪽 벽 지하부터 파기 시작한다. 이후 무슬림도 느낀 바가 있기에 비슷한 권리를 부여받은 학자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찰스 워렌은 이 분야에서 여전히 독점적 지위를 갖고 있는데, 그 시절 탐사 수준으로 믿기 어려운 훌륭한 결과물을 남기기도 했다.
1. 성전 산 남쪽 문 훌다 게이트
오토만 당국은 곧 찰스 워렌의 진면목을 알게 된다. 말을 안 들어먹는 인물이었던 것이다. 당시 상식으로 지하를 파는 행위는 그 위에 놓인 건물을 무너뜨릴 위험한 행동이었다 (원칙적으로는 지금도 그렇다). 성전 산 남쪽은 그 유명한 알키블라 모스크가 위치한 곳이다. 그 밑을 파고 있는 찰스 워렌의 행위는 이스탄불 술탄의 궁정을 발칵 뒤집어놓는다.
당국이 감독관을 보내 막으면, 찰스 워렌은 점찍어 두었던 다른 곳으로 이동해 팠다. 이 끝없는 도발 덕분에 찰스 워렌은 오토만 당국으로부터 '두더지'(mole)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요세푸스에 따르면 성전의 남쪽 문 이름은 '훌다 게이트', 바로 '두더지' 문이다 (터널로 연결돼 있었기 때문). 찰스 워렌은 당국을 구슬러가며 성벽으로부터 15미터 거리까지 파들어간다.
현재 성전 남문과 오펠 발굴은 찰스 워렌과 그의 팀이 목숨을 건 결과이다. 당시 경계가 심하지 않았던 북동쪽 모서리에서 수직 갱도 42미터를 파고 내려가, 거기서 수평 터널을 파서 남쪽으로 이동한 것이다.
찰스 워렌의 예루살렘 발굴은 책으로 출간됐지만 이미지가 전혀 없었다. 이에 전쟁 기록 화가 윌리엄 심슨이 스케츠를 남기게 되는데 그중에는 페니키아, 즉 두로 사람들이 만들었다는 사인도 있다. 솔로몬 궁전은 두 기둥을 비롯한 건축 양식이 두로의 Melqart 신전과 흡사한 것으로 유명하다. 성경의 진술과도 일치하는 부분이지만, 이에 대한 검증은 현재는 불가능하다.
이 '두더지'는 남쪽의 저수지들, 로빈슨 아치 지하, 워렌 게이트, 웨스턴월 플라자, 윌슨 아치, 버클레이 게이트, 더블 게이트와 트리플 게이트, 헤롯 시대 다듬은 돌들(courses)까지 모두 드러낸다.
2. 다윗 성
기혼 샘에서 실로암 연못까지 전등을 입에 문 채 터널을 통과했다. 학자가 목숨을 건다는 것은 그로 인한 발견이 대단히 가치 있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겠지. 하지만 그런 도전을 누구나 하지는 못한다. 그렇게 발견한 13미터 수직 샤프트, 찰스 워렌의 이름을 따라 워렌 샤프트로 불리는 곳이다. 찰스 워렌은 이곳이 삼하 5장에 묘사된 '물 긷는 데'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훗날 연구를 통해 이곳은 다윗 시대 이후에 드러난 천연 구멍(natural cavity)이라는 게 밝혀졌다.
3. Struthion Pool
성전의 서쪽 벽은 북쪽으로 뻗어 나가면서 하스모니안 왕조부터 건설한 수로와 이어진다. 날마다 동물 희생 제사가 이뤄지는 성전에서 물의 수요는 절대적이었던 것이다. 이후 헤롯이 성전을 개조하면서 수로를 완성했고, 성전의 북쪽 끝 안토니아 요새와 연결된 저수지가 형성된다. 요세푸스는 그 저수지 이름을 Struthion Pool, 참새 웅덩이라고 명하고 있다.
200년 후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자신의 이름을 딴 로마 도시를 지으면서 이 자리에 포럼을 세운다. 도시 곳곳에 들어선 여러 Triple Arch 중 하나도 포럼을 장식한다.
1857년 이 자리를 차지한 카톨릭 '시온 수녀회' 는 로마 황제의 아치에 ECCE HOMO라는 이름의 교회를 짓는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자색 옷을 입고 가시 관을 쓰고 백성 앞에 나오는 예수님을 보고 '바로 이자다' (요 19) 했음을 기념하는 교회다. 이 지역에서 빌라도의 재판과 채찍질과 군중의 저항이 있었음을 전제로 한 교회 건축이다.
찰스 워렌은 서쪽 벽에서부터 북쪽으로 나아가며 지하를 탐사하다가 '시온 수녀회' 지하에 위치한 저수지에 이른다. 조수와 함께 진흙 뻘을 가로지르기 위해 작은 보트를 타고 왔는데, 계단을 발견하고 오르자마자 검은 형체와 부딪친다. 어둠 속 '악마'인 줄 알았던 이들은 바로 시온 수녀회 수녀들이었다. 식겁한 시온 수녀회는 바로 벽을 쌓아 저수지의 출구를 봉쇄한다. 오토만도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감독관을 보낸다. 찰스 워렌은 터널을 봉쇄하고 감독관을 쫓아낸다. 그 와중에 이 진흙뻘이 요세푸스가 기록으로 남긴 스트루티온 저수지라고 확증한다.
1967년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스라엘은 유대인 지역부터 고고학 발굴을 시작했고, 서쪽 벽을 따라 찰스 워렌의 루트를 밟는다. '시온 수녀회'는 고고학을 핑계로 대규모 관광객이 자기 경내로 유입될 가능성을 거절한다. 서쪽 벽 터널이 대중에게 공개되고 한참 동안 관광객들은 '참새' 웅덩이를 보고, 다시 왔던 길로 돌아가야 했다. 카톨릭은 협상에 응하지 않았다. 1996년 네탄야후 정부는 참새 웅덩이에서 비아 돌로로사로 나가는 길을 뚫어 출구를 만든다. 오슬로 협정 이후 쉴새없이 테러가 일어나던 당시 이 사안에 반대하는 봉기만으로 80명이 사망했다. 나는 당시 상황을 전해 들었을 뿐이므로 당시 참상을 상상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하지만 만약 지금 이 출구가 없다? 그보다 암울할 수는 없다. 교회의 부동산과 세상의 평화는 원래 병합이 어렵기 때문에 한쪽만을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래도 그 시절, 수도원에서 하나님을 외쳐 부르던 이들은 어떤 기도를 했을까 궁금하긴 하다.
수녀원 쪽은 현재 이렇게 봉쇄돼 있다.
예루살렘의 거대한 고고학 현장에서 찰스 워렌이라는 이름을 자주 언급하고 있지만, 그때마다 아쉬움이 들었다. 어딘가에 앉아서 차분히 이 인물에 대해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런 공동의 열정이 데이비슨 센터에 찰스 워렌 섹션을 장만하게 한 것은 아닐까. 타는 듯한 햇살에 쫓겨 우연히 들어간 박물관에서 그를 발견하고 반가웠다. 영국군 장교로서 그의 공을 가늠하는 건 내 몫은 아니다. 그가 무슬림 당국의 감시관들을 속이기 위해 어떻게 그들을 꼬득였는지 역시 내가 정죄할 수는 없다. 다만 진정한 '보물'이 과거를 이해하는 것임을 알았던, 인류 역사상 흔치 않은 학자라는 사실은 알아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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