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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 메시아 샤브타이 쯔비

현대 국가 터키가 자기들을 영어가 아닌 튀르크어 튀르키예라고 불러 달라는데, 먼저 이 이상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 튀르키예는 튀르크어로 튀르크인의 땅이라는 뜻이다. 그럼 튀르크인은 누구인가? “튀르키예에 살고 있는 모든 시민”이다.

 

알다시피 터키의 인구 20퍼센트는 쿠르드족이고 아르메니아인, 유대인, 아랍인 같은 소수민족이 많이 살고 있다. 튀르키예에 사는 사람이 튀르크인이다? 이것이 20세기 초 나치가 아타튀르크가 세운 공화국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낸 한 가지 이유였다. 폴란드를 침공하기 직전 히틀러는 나치 장군들에게 선포했다. 지금 누가 아르메니아인을 기억하는가? 터키가 아르메니아인을 자기 영토에서 제거해 버린 것처럼 나치 독일은 유태인이 없는 유럽을 건설해야 한다!

 

20세기 터키 건국의 아버지 케말 파샤, 즉 아타튀르크는 살로니카 출신이다. 살로니카는 큰 규모의 유대인 공동체가 있고 기독교인도 만만치 않은 현 그리스 영토이다. 케말 파샤, 당신의 종교는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아타튀르크의 대답이 터키인의 심장을 끓게 만든단다. 나는 유대인, 기독교인, 무슬림을 뛰어 넘는 오직 터키인이다. 

 

그게 무슨 뜻인데?

 

현대 국가 터키는 국민의 신원을 국가 안보급 기밀 사항으로 비공개하는 나라다. 지금도 터키 정부가 부인하는 1915년 아르메니아 대학살로 오토만 제국 안에 사는 150만 명의 기독교인이 학살되었다. 그럼 오토만 제국 안에 있는 기독교는 거의 전부 청산됐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많은 터키 사람이 아르메니아 가계라는 것이 공공연한 사실이다.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출발해 이스탄불과 이즈미르를 거쳐 궁극적으로 시리아로 향했던 행로에 아르메니아 공동체의 흔적이 여전히 남아 있다. 물론 도중에 수많은 기독교 가정이 이슬람으로 개종했고, 수만 명의 아르메니아 젊은 여성이 무슬림 남성과 결혼했다. 그들의 자녀는 무슬림으로 자라며 스스로를 터키 사람으로 여겼지만 절반이 아르메니아라는 것은 잊히지 않았다. 고아원에 거둬져 무슬림 교육을 받으며 자란 사람들도 자신의 뿌리가 아르메니아일 것이라 짐작한다. 하지만 이 사실은 공공연히 거론되지 않는다. 특히 에르도완의 AKP, 정의개발당이 집권하면서 소수민족은 자신의 뿌리가 폭로될지 모른다는 데 위협을 느낀다. 순수 터키 혈통이 아니라는 사실은 공적 지위에 있는 사람을 압박하는 대단히 효과적인 수단이다. 터키에서 도대체 순수 혈통이 있기는 한지 모르지만. 

  

2007년 터키에서 Children of Moses라는 책이 나왔다. 저자 에르귄 포이라즈는 이 책에서 튀르크어로 돈메, 히브리어로 샤브타임이라고 하는 소수 집단을 거론하면서, 터키의 최고 기득권자들이 돈메라고 주장했다. 2003년부터 집권중인 에르도완과 그 부인이 돈메라면서 이들의 목표는 이스라엘 정보국과 손잡고 터키의 세속주의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도 했다. 이 내용 때문에 체포됐고 29년형을 선고받았다. 그때는 에르도완이 이스라엘과 불편함을 내보이지 않을 때라 그런 생각을 했나? 지금 처지 같으면 말도 안 되긴 한다. 사진은 에르도완과 부인의 2005년 유일무이한 이스라엘 국빈 방문 당시 야드바쉠 박물관.  


샤브타이 쯔비는 1626년 오토만제국의 이즈미르, 즉 서머나에서 태어난 유대인이다. 샤브타이란 이름은 샤밧, 안식일에 태어났다는 뜻이다. 그가 태어난 날은 유대력으로 티샤베아브, 즉 성전멸망일이었는데, 유대교 전통에서 메시아의 도래와 관련된 날이다. 신비주의에 심취해 카발라를 연구했던 샤브타이는 20대에 반은둔생활을 하면서 기이한 행적을 보였고 토라와 할라하를 범하면서 죄로 여겨지는 것들이 사실은 정당한 것이라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당시 기독교는 666 짐승의 수가 새천년을 맞는 1666를 겨냥해 온갖 종말론적인 예언을 쏟아놓고 있었다. 유대교에서는 카발리스트들의 특이한 계산법에 따라 1648년을 특별한 해로 여겼다. 실제로 이 해에 현재 우크라이나 땅에서 보흐단 흐엘니츠키가 이끄는 카자크인들의 민중 봉기가 일어나고 이를 계기로 유대인이 학살된다. 유럽에서는 무슨 일로 누가 누구와 싸우든 유대인 학살이 뒤따른다. 카자크인들도 원래는 폴란드 지주들에게 저항한 건데, 폴란드 지주들의 명령에 따르는 일종의 유대인 마름들이 보복당한 것이다. 희생자가 30만명이라는 견해도 있다.

 

키예브에 입성하는 보흐단 흐엘니츠키, 정교회 사제들이 맞이하고 있다.

 

성경은 메시아의 도림이 일련의 대격변으로 시작된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래서 탈무드의 현자들은 메시아의 때가 이르는 것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았다. 메시아의 때가 묵시적인 만큼 그러한 시대의 증인이 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전쟁과 분쟁과 죽음과 파괴 같은 끔찍한 사건들이 연속되고 이 모든 고통을 통과하고 나서야 시작될 새로운 세계는 기꺼이 감당하고 싶은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유대력으로 1648년은 타브와 테트로 표기된다(ת"ט).

 

샤브타이 쯔비는 당시 카발라의 중심지였던 살로니카에서 메시아 행적을 시도하다가 랍비들에게 쫓겨나 카이로 알렉산드리아 아테네 등을 전전한다. 샤브타이의 메시아니즘이 날개를 단 것은 1665년 예루살렘을 향해 가다가 가자 사람 나탄을 만나면서였다. 나탄은 자신을 엘리야 선지자라면서 자신이 알아본 샤브타이 쯔비가 메시아라고 확신했다. 이렇게 해서 1665년 샤부옷에 샤브타이 쯔비는 예루살렘에서 메시아로 추대된다. 예루살렘의 랍비들은 이를 반대하면서도 도시에서 추방하는 것 외에는 실질적인 조치를 취하지 못했다. 나탄은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를 상대로 대규모 메시아 운동을 시작하면서, 1년 안에 샤브타이 쯔비가 오토만의 왕관을 차지할 것이라고 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쫓겨난 샤브타이 쯔비는 알렙포와 서머나를 통과하며 붐을 일으킨다. 유대교에서 메시아는 당연히 예루살렘으로 오시기 때문에 그를 맞이하려면 이스라엘 땅으로 가야 했는데, 당시 확신이 강했던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구름을 타고 기적적으로 예루살렘으로 옮겨질 것이라 믿고 출발 계획 자체를 세우지 않았다.

샤브타이 쯔비가 유대교에 미친 부정적인 영향이 워낙 커서 그의 일생이 제대로 알려지지는 않았다. 성적 트라우마가 있었던 사람으로, 20대 초반에 두 번 결혼했지만 아내들에게 강제로 이혼당한 경력이 있다. 그의 추종자들은 이를 동정을 지킨 신성함으로 해석하지만, 오늘날 표현으로는 양극성 장애라고 하는 게 맞다. 훗날 샤브타이는 사라와 결혼하는데 창녀였다. 샤브타이는 이 결혼으로 호세아의 예언을 성취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샤브타이 쯔비의 열풍에 긴장한 오토만 제국은 1666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그를 체포한다. 그에게는 이슬람으로 개종하느냐 아니면 죽느냐 선택이 주어졌다. 그의 선택은 살아남는 것이었다. 유대인 공동체를 큰 충격에 빠뜨린 결정이지만 이제 Aziz Muhammad Effendi가 된 샤브타이는 여전히 메시아라는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10년 후 샤브타이 쯔비는 죽지만 대략 300명의 제자들이 믿음을 지속했다. 이들이 돈메다. 즉 이슬람 속에서 유대교를 전파하는 비무슬림인 것이다. 돈메는 유대인에게 추방됐을 뿐 아니라 오토만 제국으로부터도 환멸을 받았다. 돈메들은 자신들을 Ma'aminim 즉 믿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오토만은 이슬람 제국이지만 시민의 종교 활동에 관여하지 않았다. 돈메는 오토만 제국에서 꽤 번성했다. 당시 돈메의 중심지가 전통적으로 유대인 도시 현재 그리스의 살로니키로, 20세기 초, 살로니키의 돈메는 약 15,000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대단히 결속력이 큰 공동체였는데, 회당, 학교, 법정, 묘지를 갖춘 완벽한 지역사회를 만들고 당연히 자신들끼리만 결혼했다. 케말 파샤가 하필이면 살로니키의 돈메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은 그의 모호한 가계에 의심을 일으키는 매우 합리적인 의심이다. 

 

 1902년 살로니카에 세워진 마지막 모스크, 예니 짜미 (뉴 모스크). 돈메 공동체가 사용했다. 이탈리아 출신 건축가의 서명이 남아 있다. 카톨릭 건축가가 미흐랍을 만들 때 어떤 심정이었을까?

 


1923년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돈메는 무슬림으로 간주되어 그리스와 터키 간의 강제 인구 교환에 포함되었다. 살로니키의 돈메는 이스탄불로 끌려갔고 거의 모든 재산을 잃었다. 튀르키인의 이상한 인종적 순수성이나 수니파 이슬람의 공식적인 정의에 돈메는 너무나 맞지 않았다. 돈메는 잠재적인 배신자로 낙인찍혔다. 터키 공화국에서 돈메는 교육과 공직의 기회를 얻지 못한 채 철저한 소수자로 전락했고, 비밀스러운 유대인이라는 음모론의 주인공이 되었다. 터키 국민은 돈메가 자신들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모든 종류의 재난 뒤에 숨어 있다고 믿는다. 현재 터키에는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잃지 않은 돈메가 고작 2,000명 정도라고 알려져 있다. 전체 인구가 8천 5백만 명인 대국을 2천 명이 좌지우지할 수 있나? 그래서 비밀리에 유지되는 돈메 후손들이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인구 등록부를 보자고 하면 국가 기밀이라고 안 된단다.    

오늘날 터키에는 약 17,000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다. 20세기 초까지 이스라엘 땅의 통치자였던 오토만의 후예 터키 공화국은 독립 신생국 이스라엘을 지지한 최초의 이슬람 국가였다. 아타튀르크의 따뜻한 우정은 지금까지 이스라엘이 곳곳에 그의 기념비를 세워둘 정도였다. 하지만 에르도완과 AKP 이후 상황은 많이 달라졌다. 터키의 통치자 중에 이스라엘에 적대감을 드러낸 지도자는 에르도완이 유일하다. 그래서 인기가 있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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