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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ly life in Israel

최고의 율법

드디어 이스라엘 사람들이 자신들의 대화 습관에 문제가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다. 미디어에 능동적 경청 הקשבה פעילה 이란 표현이 눈에 띈다. 이들이 날마다 읽고 있는 토라만 해도 허구헌날 말하는 장면만 나온다. 조용히 듣고 있는 건 체질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고? 제대로 들었으면 그 지경이 됐겠나? 

 

어디서나 줄을 서는 게 일상인 이스라엘에서는 툭하면 언성을 높이며 싸우는 광경을 접하게 된다. 일차적으로 그것은 언어적 장애 때문이다. 이민자로 구성된 이 나라는 모든 시민에게 일정한 히브리어 수준을 기대하기 어렵다. 히브리어로 안 통하는 것 같으면 영어를 쓰는데, 마치 영어가 2류 언어인 것처럼 굴지만 솔직히 못 들어줄 수준도 많다. 러시아 쪽 이민자들은 영어 활용도가 낮고, 하레딤 중에는 간단한 영어 스펠링도 못 읽는 사람들이 많다. 천차만별이지만 영어 그까잇것 못 한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튼 이렇게 의사소통을 하니 서로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은데, 그걸 인정을 안 한다. 뭘 모르던 시절, 내가 히브리어가 부족하니까, 잘 못 알아듣겠으니까 배려를 부탁해서 제대로 된 경우는 없었다. 그 멸시와 모멸감이라니, 나 역시 점점 목소리를 높이는 쪽으로 변했다. 무슨 일을 이 따위로 하냐고 쏘아주는 편이 애로사항을 신속히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이민자 생활에는 울분이 따른다. 단순히 낯선 환경에서 오는 어려움이 아니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이 현상은 내가 이들과 다르기 때문에 닥치는 일들로 결국 인종차별이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나 됨으로 인해 당하는 일이라 폭발하게 되어 있다. 터무니 없지만 이 폭발은 대개는 내게 친절했던 이들에게로 향한다. 그럴 줄 몰랐다며 배신감에 치를 떤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자신이 혐오스러워지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의 문을 닫게 된다. 생의 기쁨이 될 만한 기회들을 스스로 회피하며 무미건조한 하루하루를 택한다. 내 결론은 이렇다. 이 울분을 다스리는 길은 인격을 다듬는 것이다. 말이 통하지 않을 때 신경질부터 나지 않도록, 나를 벌레 취급하는 사람과 똑같이 자신을 경멸하는 일이 없도록, 무엇보다 저들과 같은 수준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나 자신의 고결함을 지키는 것이다.     

 

신앙이 만사형통의 첩경인 줄 아는 사람들이 잊지 말아야 할 금과옥조가 있다. 신앙은 인격을 만들어주지 않는다. 인격을 만드는 것은 명백한 의도성과 새로운 관점이다. 유대교는 토라를 '생명나무'라는 별명으로 부르는데, 나는 이 비유가 정말 좋다. 나무에는 수많은 가지와 잎들이 달린다. 시들고 벌레 먹은 것들 사이로, 반드시 아름다운 새순이 돋는다. 거기 시선을 고정하고 그것에 가치를 두려는 일관성이 필요하다. 예수님은 이 점에서 힐렐과 같은 견해를 갖고 계셨는데, 토라를 하나로 요약하신 것이다. וְאָהַבְתָּ לְרֵעֲךָ כָּמוֹךָ 네 이웃 사랑을 너 자신처럼. 여기에서 내가 타협한 게 한 가지 있는데, 나 자신을 딱히 유별나게 사랑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남 탓을 덜하려면 자기 연민이 줄어야 한다. 그렇다고 자신을 멸시받게 두어서는 안 된다. 딱 거기까지, 엄청난 사랑으로 남을 보듬어 안는 것은 불가능해도, 저들도 나만큼 대접해서 내려보지 않는 것이다. 

 

전문의 검진을 서두르느라 모디인 일리트 מודיעין עילית에 가게 됐다. 하레딤들만 살고 있는 굉장한 도시다. 별칭이 키리아트 세페르, 토라 공부만 하는 사람들이 산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메아 쉐아림은 양반이다. 차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따끔하다. 이 사람들은 대놓고 쳐다본다. 그러다 보면 눈이 마주치는데 찔끔도 않는다. 가벼운 눈인사와 스몰톡이 사회성을 지향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했나. 순서를 기다리는 사람들 틈에서 아무도 내게 말 거는 사람이 없다. 늦게 왔으면 먼저 온 너는 몇 시 예약이냐고 물어야 하는데 나만 건너뛴다. 데자뷰가 느껴진다. 이런 일 다른 데서도 겪었는데 그게 어디였더라. 내슈빌이었다. 내 앞뒤로 선 놀라울 만큼 하얀 분들이 내 머리 위에서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었었지. 그게 20년 전인데 나는 이제 다른 나라에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다. 인격이라니까. 속이 부글거린다. 

 

내 앞뒤로 예약한 두 사람을 알아냈다. 자기들끼리 주고받은 말이 충분히 많았으니까.

저기, 내가 당신 다음이야. 당신은 내 다음이고. הבנתם?

누가 나한테 Understood? 하는 것처럼 빡치는 일이 없다. 그래서 הבנתם?은 히브리어 중에서 내가 가장 많이 쓰는 표현이다. 대기실에 침묵이 찾아왔다. 옆사람이 묻는다. 너는 어디서 왔어? 어쩌다 그 지경이 됐냐고 묻는 거겠지. 

-나? 한국에서 왔어. 중국하고 일본 사이에 있는 나라야.

-우리 나라에 얼마나 있었어?

-십 년 넘었어.

-일이 힘들지? 여기 사는 거 어때?

-너무 좋아. 너희는 참 친절한 사람들이야.  

니들 참 주옥 같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영 거짓말도 아니다. 내게 말걸어준 친절한 사람들이 봐라, 여기도 있지 않나. 

 

검진을 마치고 나오자 대기중인 사람들이 역시나 그런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 개중에는 아시아 사람은 참 화가 많구나 인류학적인 깨달음도 얻었을 거다. 샤밧 샬롬. 하르베 브리우트. 그래도 내 도리는 해야 하니 축복의 말을 던진다. 모디인 일리트는 안 되겠다. 내 인격으로는 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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