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다브(48)와 헨은 14살 때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키부츠 크파르아자에서 가정을 꾸리고 얌(바다, 19), 아감(호수, 17), 갈(파도, 11), 탈(이슬, 9) 네 자녀를 낳았다. 나다브의 부모인 다비드와 바르다는 1960년대 크파르아자에 정착했고, 헨의 부모인 기오라와 슐로미트는 손주들을 가까이에서 지켜보기 위해 20년 전에 옆집으로 이사했다. 키부츠 출신들은 좌파답지 않게 대가족을 이루는 경우가 많은데 시오니즘에서 출발한 농촌 공동체의식의 산물일 것이다. 크파르아자에는 골드슈타인 가문과 알모그 가문의 직계가족 외에도 이들의 사촌과 사돈들까지 이리저리 어떻게든 연결된 사람들이 많다.
Almog 자체가 대가족이다. 헨의 아버지 기오라 알모그의 사촌 도론 알모그가 현재 Jewish Agency for Israel 의장이다. IDF 장군이기 때문에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나서 관계를 공개했다. 또 다른 사촌 모세 알모그 가족은 2003년 10월 4일 맥심 레스토랑 테러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아들, 사촌 5명이 사망했다. 10살이었던 오란은 시력을 잃었다. 당시 자살 테러를 일으킨 28살 하나디 자라다트는 제닌에 살고 있었는데 사촌이 이슬람 지하드 요원으로, 동생과 사촌과 약혼자까지 IDF와 전투에서 사망했다. 테러 이후 하나디의 아버지는 어떤 위로도 받지 않겠다며, 오직 하나디가 벌인 일을 축하만 하겠다고 말했다. 하나디는 며칠 안에 변호사가 될 예정이었던 로스쿨 학생이었는데, 2012년 아랍 변호사 협회가 주는 상을 받았다. 수상 이유는 자살 테러로 팔레스타인과 아랍을 defense했기 때문이란다. 지금도 그렇지만 자살 테러를 옹호하고 권장하던 당시의 레토릭들은 정말 살벌했다. 당시 저 자살 테러의 책임자는 아라파트였다.
2차 인티파다로부터 20년 후, 2023년 10월 7일 크파르아자에 하마스 테러리스트들이 쳐들어왔다. 나다브의 부모와 헨의 부모 네 명은 불가리아를 여행중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랄까. 목숨은 건졌으니. 하지만 이들의 집이 모조리 무너지고 불탄 바람에 돌아갈 곳이 없어졌다. 그들의 부모가 홀로코스트를 겪고 이 땅으로 와서 맨손으로 시작했던 일을, 이제 70대가 되어서 당하게 된 것이다. 그들의 홀로코스트는 부모들보다 덜 참혹하지 않다. 이스라엘로 돌아오자마자 그들은 아들이자 사위인 나다브와 장손녀인 얌의 장례를 치러야 했다. 그후 텔아비브의 한 호텔에서 무한정 쉬브아(애도기간) 중이다.
나다브의 가족은 공습 경보를 듣고 익숙한 쉘터에 들어갔다. 나다브는 철인경기 챔피언인데 지난 여름 자전거에서 떨어지며 다리를 다쳐 목발을 짚고 있었다. 지금에서야 생각해 보니 인질로 끌고다니기 어려우니 바로 살해했던 것 같다. 그날 아침 6시 경에 나다브의 여동생 가족이 여행을 떠났는데 길에서 공습 경보를 들었고 테러리스트들이 몰려오는 것을 보았다. 근처 모샤브에 대피한 여동생은 다른 가족들과 키부츠에 상황을 알렸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큰 규모인지는 미처 짐작하지 못했다. 나다브 가족들은 쉘터에서 소리를 내지 않고 버텼다. 하지만 테러리스트트의 난동과 학살은 끝날 줄을 몰랐다. 4시간이 지난 11시 45분, 드디어 이 가족의 쉘터를 부수고 테러리스트들이 난입했다. 나다브와 얌(군복무중)은 그곳에서 살해됐다.
다음날 일요일, 북부 모샤브 스데 엘리에제르에 살고 있는 헨의 오빠 오므리는 나다브와 얌이 죽었을 가능성과 함께 나머지 가족의 행방은 모르겠다는 연락을 받는다. 가능성이라니? 하루만에 왜 시신이 확인이 안 될까. 하마스가 불을 질러 모든 것을 검댕이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 다음날 비행기를 수소문해 돌아온 조부모들이 DNA 샘플을 제공했다. 화요일이 되서야 나다브와 얌의 시신이 확인됐다. 나다브의 수술로 삽입한 금속판과 얌의 나비 문신이 이들을 시신들 더미에서 그나마 빨리 특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죽은 그날 장례를 치르는 게 유대인 관습이다. 하지만 남편과 아버지를 확인할 아내와 자녀들의 행방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들을 땅에 묻나. 열흘이 지나서야 IDF 정보부는 실종된 나머지 네 가족이 가자에 납치됐음을 확증했다. 망자를 묻을 가족이 당분간은 없는 것이다. 10월 23일, 전투 현장으로 변한 크파르아자를 대신해 피난 지역인 키부츠 슈파임에 나다브와 얌은 임시로 묻혔다. 공교롭게도 이날은 헨의 생일이었다.
헨의 오빠 오므리는 지난 여름 사고를 당하고 중환자실에 있는 나다브를 방문했는데 그때 나다브는 이렇게 말했다. "Hope dies last." 마치 유언과도 같은 이 말은 가족들을 절박하게 했다. 오므리는 납치자 가족 대표들과 EU 대표, 유니세프 대표, 벨기에 외무부장관 등을 만났다. 누구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법률은 만들지언정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꾼들과 이야기하는 것은 벽에 대고 외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크파르아자를 쳐들어온 테러리스트들의 의료 장비에는 유니세프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하마스라는 테러조직과 산소통을 함께 쓰며 연명하는 국제기구가 너무 많은 것이다. IDF조차 하마스에 돈을 대는 이스라엘 정책을 따르고 있다.
인질 석방을 위한 휴전 이틀째, 헨은 세 자녀와 함께 돌아왔다. 헨의 얼굴에는 무의식적인 미소마저 없었다. 그리고 기오라 알모그, 그도 웃지 못했다. 20년 전 동생의 가족들을 테러로 잃었던 그는 상실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이제 자신의 딸과 손주들도 그 상실의 그늘 속에서 살아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어린이 교육자다. 가자 오테프 어린이들이 공습이 울리면 어째야 하는지, 쉘터에서는 어떻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지 소위 '회복력' mindfulness을 강조해왔다. 이런 상황에서 회복력은 의미가 있을까. 그날 쉘터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직 알려지지 않았다. 1년쯤 후에 사연많은 가족 이야기로 찾아올 수도 있다. 아직은 그날을 상상하기도 힘들다. 이들의 생환을 기뻐하면서도, 이 자리에 함께 있지 못한 나다브와 얌으로 인해 이들의 웃음은 반쪽짜리이다. 그래도 삶은 계속될 것이다.
PS. 2012년 11월 14일 IDF는 1주일에 걸친 가자 작전을 펼쳤는데 이름이 아무드 아난(구름 기둥, 보호 기둥)이었다. 당시 스데롯 주민들이 언덕에 앉아서 가자에 폭탄 떨어지는 걸 웃으며 보고 있는 사진이 돌아 엄청난 욕을 먹었었다. 사실 그때 가자 오테프 주민들은 정부를 향해 절규를 했었다. 날마다 가자에서 로켓을 쏘아보냈는데 IDF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도 네탄야후 총리였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이분은 그냥 시종일관 베포가 없었다. 가자와 전쟁을 억지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척하다가, 결국 1주일 지상 공중전으로만 하마스 진지들을 폭격하고 그만이었다. 그걸 해마다 반복했던 것이다. 아무드 아무드 아난 때 나다브와 아감이 방송에 나왔었다. 아감은 막 1학년이 돼서 학교생활을 시작했는데 천진하게 즐거운 일이 많을 것 같다 신난다고 말했다. 나다브는 오테프 아이들이 공습과 대피 생활에 너무나 익숙해진 게 서글프다고 말하며 정부의 대책을 촉구했었다.
'People'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드 하리리 (0) | 2024.02.20 |
---|---|
케이다르 가족 이야기 (1) | 2023.12.03 |
로만-가트 가족 이야기 (1) | 2023.12.01 |
브로다트 가족 이야기 (0) | 2023.11.30 |
하버드 왜 저러나 (0) | 2023.11.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