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한글날은 10월 9일이다. 라떼는 세종대왕 생일이라 그렇다고 배웠다. 정말이다. 나는 정형화된 집단 교육에서 탁월한 성과를 낸 사람인데, 기관에서 배운 걸 잘못 알고 있을 리가 없다. 물론 이렇게 항변을 해봤자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뭘 배우든, 왜 그럴까 질문하지 않으면 잘못된 지식이 주입되고, 그런 지식은 꽤 오래 가서 문제다. 아, 우리 한글날은 1446년 9월 상순이, 훈민정음 해례본이 완성된 날이므로, 그 마지막 날을 양력으로 계산해서 10월 9일이 된 것이다. '상순'이 뭔지 모르는 사람은, 별 수 없다.
이스라엘에서 히브리어의 날은 엘리에제르 벤예후다의 생일로 삼는다. 국가기념일은 아니고, 히브리어 연구 기관 "히브리어 아카데미"(האקדמיה ללשון העברית)가 그렇게 정했다. 딴 기관은 딴 날로 정할 수도 있다. 원래 이름이 펄만인 벤예후다는 1858년 1월 7일, 오늘날 벨라루스의 루스키에서 태어났다. (그의 모국어는 이디쉬였다. 언어 천재 중에 독일어계가 유독 많은 느낌?) 그날이 히브리력으로 테벳 월 21일이다. 그래서 매년 날짜가 달라진다. 2025년 테벳 월 21일은 1월 21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히브리어의 날이 제정된 2015년, 언어학자 베레드 세이든 박사가 가사를 쓰고, 하난 유발이 작곡하고 부른 노래가 선보였다. 중등교육 기관에서는 히브리어 주간으로 특별 수업을 하는 곳도 많다.
벤예후다는 2000년 동안 사어가 되었던 히브리어를 spoken language로 부활시킨 인물이다. 전 세계 흩어진 유대인을 하나로 이어주는 히브리어의 중요성이야 두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 언어의 부활 과정은 사뭇 잔인했다.
벤예후다는 옥서도스 하시딤 가정에서 태어났고, 어머니는 문맹이었다. 5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종교 교육을 시작했다. 12살에 삼촌이 있는 폴로츠크로 이주해 예쉬바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 예쉬바의 선생 랍비 요시 블로이케르는 하스칼라 운동, 즉 Jewish Enlightenment를 지원하는 인물이었다.ㅋ 하스칼라 작가들은 세속적인 외국 서적을 히브리어로 번역했고, 젊은 벤예후다는 히브리어의 매력에 빠졌다. 독실한 삼촌 엘리에제르 울프슨은 조카의 세속주의에 대한 관심에 식겁해 글루박으로 전학을 시킨다. 이미 늦었지만.
글루박에서 벤예후다는 부유한 유대인 솔로몬 요나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의 딸 드보라와 훗날 결혼하게 된다. 드보라는 벤예후다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쳤다. 우리가 백러시아로 알고 있는 이 지역은 공용어가 네다섯 가지 되는 엄청난 인종 집결지이다. 이 정도 돼야 언어학의 소양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결국 벤예후다는 베이트 미드라쉬를 떠나 세속주의를 선택한다. 1873년 어머니에게 돌아와 뒤네부르크의 김나시움, 즉 근대적인 고등교육 기관에서 공부했다. 1년 만에 3년 교육 과정을 마쳤고, 이듬 해 4학년부터 시작해 3년 만인 1877년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고 졸업했다. 당시 유대인은 러시아 대학에서 공부할 수 없었다. 그래서 1878년 파리 소르본으로 가서 1년 동안 프랑스어를 공부하고 1879년 의대생으로 입학한다.
파리는 병걸리기 좋은 도시다. 벤예후다도 결핵에 걸렸다. 공부를 중단하고 따뜻한 이스라엘 땅에서 일하기로 결심한다. 에레츠이스라엘에는 유일한 고등교육 기관 "미크베 이스라엘 농업 학교"가 있었다. 교장 칼 네테르는 파리에 있는 엘리앙스 학교에서 공부를 마치면 미크베 이스라엘의 교사로 임명하겠다고 제안했다. 1880년 2월 벤예후다는 교사가 되기 위한 공부를 시작하지만 이내 결핵이 악화되어 파리의 로스차일드 병원에 입원했고, 결핵 환자를 위한 알제리의 요양원으로 보내져 겨울을 보낸다. 이후 파리로 돌아와, 드보라에게 청혼했고, 1881년 여름 두 사람은 비엔나에서 결혼한다. 루마니아와 이스탄불을 거쳐 카이로에 간 뒤, 1881년 10월 드디어 욥바 항구에 도착한다.
예루살렘 올드시티에 살고 있던 부부에게 1882년 7월 31일 아들이 태어난다. 집에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에 "첫 번째 히브리어 아이"로 불리는 인물, 벤찌온, 혹은 이타마르 벤 아비이다.
곧 벤예후다는 아슈케나짐 종교인들과 원수가 된다. 종교인들은 성스러운 히브리어를 세속적 목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반대했고, 벤예후다는 그들의 종교적 보수주의를 공격하며 남의 후원금을 받아 생활하는 것을 부패라고 비판했다. 시오니즘과 하레딤의 유구한 전쟁은 19세기 말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스파라딤 유대인들과는 상대적으로 좋은 관계를 가졌다고 알려진다. 비서였던 모셰 바르 니심은 심지어 어머니가 아랍인인 개종자였다.
1891년 9월 드보라가 결핵으로 사망한다. 다섯 자녀를 나았는데 그중 셋이 디프테리아로 사망했다. 1892년 드보라의 여동생 헴다와 재혼한다. 당시에는 이런 결혼이 꽤 흔했다. 성경에서도 금지하지 않는다. 다만 1873년생인 헴다가 12살이 된 1885년 드보라가 병상에 누웠고, 그때 이미 헴다와 결혼을 결심했다고.
벤예후다는 히브리어 부흥을 위해 자녀들이 히브리어만 사용하도록 강요했다. 요즘 상황이라면 아동 학대로 고발조치될 일이다. 이타마르는 세 살이 될 때까지 전혀 말을 하지 못했는데, 그러자 어머니 드보라가 비밀리에 러시아어를 가르쳤다가 발각돼 난리가 났다고. 벤예후다는 아들을 위해 성경에 없는 아이스크림이나 자전거 같은 새 단어를 만들기도 했다. 아무튼 이 실험은 가정에서 주로 사용하는 언어가 히브리어이고 부모가 히브리어를 사용한다면 자녀들도 히브리어를 사용한다는 교훈을 남겼다. 이 신념은 교육 분야로 이어져, 1913년 그 유명한 언어 전쟁의 계기가 된다.
언어 전쟁, תרגיל התפעל
להתכוון, להתבסס, להתווכח, להתנגד, להתפתח, להשתמש, להתפשר, להתחדש מלחמת השפות כשמדברים על "מלחמת השפות" מתכוונים למלחמה, שהתרחשה בתחיל המאה הזא
jy4kids.tistory.com
벤예후다는 1922년 12월 16일 예루살렘에서 결핵으로 사망해 감람산 묘지에 묻혔다. 장례를 주관하는 종교인 기관은 그를 이단자로 간주하고 매장을 거부하는 해프닝도 있었다.
벤예후다의 아들 이타마르는 가난하고 괴팍한 아버지의 명성 때문에 상당히 고달픈 인생을 살았는데, 특히 부유했던 아부샤디드 가문의 딸 레아와 결혼하는 데 애로가 컸다. 이들 사이의 딸 드보라가 모세 호바브와 결혼해 낳은 자녀가 길 호바브라는 요리 평론가이다.
1230 달리아트 알카르멜
가슴 아픈 날이다. 우리나라 세월호 참사 때 자식을 잃은 부모들이 어떻게 우는지 알게 됐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억눌린 슬픔의 무게에 가슴이 쥐어뜯기는 느낌. 이스라엘 사람들은 특히 종
jy4kids.tistory.com
매년 히브리어의 날이 되면 히브리어 아카데미는 작년도를 규정하는 단어를 선정한다. 온라인 투표를 하는데, 관심이 뜨겁다. 올해 히브리어의 날, 2024년의 대표 단어가 뽑혔다. 하투핌, 바로 인질들이다. 히브리어에서 hostage는 쉐비שבי나 아씨르אסיר 등의 어휘가 있다. 쉐비는 전쟁 중에 잡힌 포로를, 아씨르는 감옥에 갇힌 이를 뜻한다. 하투프는 갑작스런 공격으로 납치된 상태를 가리킨다. 참, 이런 식으로 어휘가 확장되는 걸 봐야 한다니, 이 민족의 역사는 꽤나 고달픈지 않나.
코로나가 한창이던 2020년 어휘는 마토쉬מטוש, 면봉이었고, 이듬해는 티를롤 טרלול이었다. 코로나가 가져온 광기, 소득의 격차가 더욱 커지고 엄청난 인플레가 시작됐기 때문이다. 2022년의 단어는 볼란בולן sinkhole이었다.
2024년 히브리어, 하투핌 חטופים hostages
'Moed'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25 사순절 복음서 읽기 (1) | 2025.03.04 |
---|---|
투 비슈밧 (1) | 2025.02.01 |
이스라엘의 장례 (4) | 2024.11.04 |
로쉬 하샤나, 5885년 (1) | 2024.10.03 |
2024 티샤베아브 (0) | 2024.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