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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데스다, 자비의 집

 

베트 헤세드 בית חסד가 위치한 무슬림 쿼터의 아랍어 지명은 벳자타 계곡이다. Βηθζαθά 헬라어 영향일 것이다. 19세기 말, 이곳에 도착한 학자와 연구자들은 이 단어만으로도 벅차올랐을 것이다. 요한복음 5장 베데스다와 너무 비슷한 이름. 지금이야 모든 게 밝혀져 인터넷에 쉬운 자료들이 넘쳐나지만, 허허벌판에서 성경만으로 단서를 찾아야 했던 이들에게 아랍어가 지켜온 이 지명이 얼마나 귀했겠나. 만약 학자가 이과생이었다면 성경 본문이나 지명 외에 지형도 의미심장하게 살펴보았을 것이다. 이곳은 빗물을 저장하기 좋은 고지대다. 남쪽으로 물이 흘러내려가게 되어 있다.

 


여기서 구약을 읽은 보람이 있는데, 열왕기에 따르면 히스기야 왕 시대 예루살렘에는 윗못 הַבְּרֵכָה הָעֶלְיוֹנָה 이라 불리는 연못이 있었다(왕하 18:17). 그럼 아랫못도 있어야 하지 않나. 게다가 윗못은 수로תְעָלַת로 연결돼 있었다. 유대교 외경이면서 가톨릭교회 성경에 포함되는 집회서에는 예루살렘의 인프라 정비과정이 묘사되는데, 오니아의 아들 시몬 대제사장이 저수지를 팠다는 내용이 나온다(집 50:3). 현재의 모습에 가까운 연못을 만든 이는 헤롯일 가능성이 크다. 북쪽 연못은 순수한 저장소 역할을 했지만 남쪽 연못은 미크베나 질명 치유를 목적으로 한 사람들이 드나들 수 있도록 계단이 있었을 것이다. 

 

 

하드리아누스 황제는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라는 로마 도시로 뒤바꾸는데, 로마 도시다운 특징은 여전히 남아 있다. 에케 호모 아치가 그 유명한 삼중 아치문의 일부다. 지금이야 스테판 게이트로 이어지는 길이 주도로지만, 로마 시대에는 그보다 북쪽 grid가 더 중요했을 것이다. 해당 도로는 두 개의 못을 가르는 dyke 제방 앞에서 멈추는데, 그곳이 신전이었을 것이다.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연못 앞에 서 있을 만한 신은 세라피스나 아스클레피우스, 바로 질병을 치료하는 신들이었다. 특히 세라피스는 프톨레미우스가 이집트와 그리스의 연합을 위해 만들어낸 신이다. 좋은 건 다 몰아준 신인 셈이다. 기원전 1세기 로마 건축의 대가 비트루비우스도 건축론에서 모든 신전에는 적합한 샘이 있는 곳을 택해 병자를 위한 장소를 마련해야 한다고 기록했다. 

 

비잔틴 세계가 성 스데반의 문이라 부른 문은 원래 Lion Gate다. 아랍어는 Bab al Asad, 그런데 현지인들은 Bab Sittna Maryam 성 마리아의 문이라 부른다. 마리아가 태어난 곳이라 믿기 때문이다. 중세 전통은 마리아가 일찍부터 하나님께 헌신했고 그래서 주로 성전에서 지냈다고 전한다. 안나와 요아킴은 원래 나사렛 출신이지만 예루살렘 북쪽에도 집이 있었다고 한다. 부잔데? 하지만 이 전통은 뿌리 내리지 못했다. 성 안나 교회는 세포리스와 벳구브린(Eleutheropolis)에도 세워진다. 세포리스야 나사렛에서 가까우니 그렇다치고, 벳구브린은 너무 뜬금없다. 십자군은 성서 지리에 너무 약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가자로 가는 길 위에 있는 이 도시가 브엘세바인 줄 알았다. 

 

 

 

벳구브린, 쉐펠라 계곡

이스라엘은 100년 만에 가장 건조한, 비오지 않는 겨울을 보내는 중이다. 농업 분야에는 매우 불길한 뉴스다. 지구가 마이 아파 그런 거니, 손쉬운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매일 염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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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세기 비잔틴 시대 두 연못 자리에 드디어 교회가 지어진다. 요한복음 5장의 기적을 기념하는 교회였다. The Church of the Sheep pool where the Lord healed the lame man. 다섯 주랑이 있었다는 본문 기록을 건축에 반영했을 것이다. 

 

앱스 자리에 있는 방이 치유의 공간으로 신전에서 신들이 놓여 있던 자리일 것이다. 교회 벽을 지탱하는 piers(1)와 나베를 나누는 포르티코의 일부였을 plinth 받침대(3)가 지금도 남아 있다.

 

6세기가 되자 성모 마리아의 이름이 등장한다. 두 번째 교회의 이름이었을 수도 있다. 양 연못의 성모 마리아 교회다. 고대 로마 건물, 바실리카 위에 세워졌다.    

614년 예루살렘은 사사니아 왕조에게 함락된다. 많은 교회들이 파괴됐고 이곳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예루살렘의 총대주교 자카리아스는 포로로 잡혀가고 모데스투스가 임시 총대주교가 되어 도시 복구에 매진한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마침 유세비우스가 황제가 되어 모데스투스의 재건 노력에 힘을 실어준다. 성묘교회가 재건되고, 네아 교회가 새로 건설된다. 성모 마리아 교회는 작은 경당 수준으로 축소된다. 

638년 예루살렘은 이슬람 손에 들어가고, 연못들도 버려진다.

1009년 파티마 칼리파 알하킴이 성묘교회를 파괴한다. 미스터리지만 성모 마리아 교회는 어쨌든 살아 남았다.

1099년 십자군이 도착한다.  

1104년 십자군은 7세기 경당 자리에 수도원을 세운다. 지하에 묘지와 물 저장소가 있었다. 현재 두 연못 사이 아치 안쪽으로 앱스가 남아 있다. 예루살렘 왕 볼드윈 1세는 정략 결혼한 아르메니아 출신 부인 Arda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아르다를 수녀원에 버리는데, 그게 이곳이라는 추측도 있다. 아닐 수도 있다. 

1132-1138년 안나와 요아킴의 집터 위에 성 안나에게 봉헌된 로마네스크 양식의 교회가 세워진다. 중세를 주름잡은 기독교 건축 양식이다. 매우 프랑스스럽기도 하다.

 

 

1192년 살라딘이 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 성 안나 성당은 이슬람 신학교 미드라사로 변신한다. 

1856년 크림전쟁에서 이긴(이긴 게 맞나?) 오토만은 동맹국 프랑스에게 성 안나 성당을 양도한다. 당시 교회 꼭대기까지 쓰레기로 덮혀 있었다고 한다. 발굴이 시작되고, 1878년 교회는 White Fathers에 위탁된다. 그래서 WF의 설립자 Charles Lavigerie 추기경의 동상이 있다.  

 

 

십자군이 세운 로마네스크 양식 교회 앞에서 식민주의를 언급하는 건 부적절하다. 그러나 ifpo는 불편하다. 그러하다. 이라크, 요르단, 레바논, 시리아, 팔레스타인 영토에 in situ하고 계신 Institut français du Proche-Orient 프랑스 근동 연구소다. 프랑스 외무부와 CNRS, Centre national de la recherche scientifique 프랑스 국립과학연구원의 후원을 받고 있다. 펠리컨을 상징으로 하는 아프리카 선교회의 로고에서 Caritas가 히브리어로 헤세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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