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올드시티에 갔다가 외형이 너무나 바뀐 다윗 성채에 들렀다. 입장료도 많이 올랐지만, 그보다 매표소 옆에 커피숍이 자리해서 놀랐다. 장년층이 많이 찾는 곳이지만 피곤해도 앉을 곳이 없어 원성이 자자했는데 드디어 여론을 의식한 모양이다. 대신 입구가 또 바뀐 현실에 얼떨떨하다. 수도없이 자주 레노베이션이 이뤄지지만 여전히 미진해 보인다. 이유가 뭘까. 예루살렘 입구에서부터 다윗을 추억하려는 갸륵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곳이 기독교 유산이기 때문이 아닐까.
시온산 위치를 착각한 비잔틴 세력은 이 서쪽 궁을 다윗의 왕궁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탑 역시 다윗의 탑이라 불렀다. 수차례 파괴됐지만 적어도 7세기 이슬람의 성채가 됐고 1099년 7월 십자군이 입성해 1128년 기사단의 거처가 되었다. 살라딘 이후 다시 이슬람 지배를 받게 된 예루살렘에서 맘룩크가 들어와 성벽을 재건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여부스의 요새 예루살렘을 어떻게 얻었든, 이곳 주민들이 도시의 서쪽 성벽으로 둘러싸인 곳 안으로 확실히 들어간 것은 기원전 2세기 후반, 하스모니아 왕조 때다. 요세푸스는 헤롯이 하스모니아 성벽에 세 개의 탑을 세웠다고 기록한다. 세 탑의 이름은 헤롯의 먼저 죽은 형 파짜엘, 아내 미리암, 친구 히피쿠스의 이름으로 불렸다. 현재 남은 것은 파짜엘 탑이다(5). 헤롯 시대의 탑 (12, 21)이 흔적으로 남아 있다. 그래도 파짜엘 탑을 둘러싸고 뻗어나간 성벽은 모두 비잔틴 시대 성벽이다. 헤롯의 전매특허 같은 marginal stone은 중간에 버티고 있어서, 그 아래 하스모니안 시대의 기초 성벽과, 그 위로 비잔틴 시대의 증축을 증명하고 있다. 성채를 확장하면서 세워진 다른 탑들(1, 29, 32)은 십자군 요새의 구성이고, 이슬람은 7세기 우마야드 왕조가 탑(23)을, 오토만이 모스크(25)와 미나렛(27)을 추가했다. 1635년 세워진 이 미나렛이 Tower of David이라 불렸고 예루살렘의 랜드마크 역할을 했다. 해자를 두고 세워진 Entrance Gate(7)는 1531년 술레이만 대제 때 성벽과 함께 놓였고, 1873년 Stephan Illés의 모델에서 확인되는 입구(2)와 뒷문(25)이 있다.
이 탑들의 안쪽이 경이로운 왕궁이었는데 최근의 발굴 결과, 헤롯의 왕궁은 남쪽 성벽까지 뻗어 있었던 것 같다. 아르메니아 정원에서 그 증거를 볼 수 있다. 헤롯의 왕궁이 중요한 이유는 로마 총독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 헤롯 궁에서 묵었을 가능성 때문이다. 로마 총독은 수도격인 가이사랴에 머물렀지만, 유대인의 명절 등 주요 행사 때는 예루살렘에 와야 했고, 그의 거처는 안토니아 요새보다야 헤롯 궁이 어울린다. 주후 70년 티투스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이 서쪽의 탑들로 둘러싸인 왕궁을 제10군단의 주둔지로 만들었다.
이제는 출구가 돼 버린 오토만 시대 Entrace gate. 이곳에 알렌비가 서서 이 도시에 평화를 선포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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