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에인 케렘에 갔다. 세례 요한의 고향으로 알려진 곳이다. 원래 누가복음에는 산골에 있는 '유대 한 동네'(1:39)일 뿐이다. 유대인은 벧학게렘(렘 6:1 בית הכרם)으로 알고 있다. 이곳 가까이에 쿼리가 있는데 베트 하케렘에서 나는 돌이 성전 제단으로 공납됐다는 미쉬나 기록이 있다.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는 마리아와 엘리사벳의 잉태 중 만남을 이 마을과 연관시켰고, 얼마 후 그들의 만남이 마을에 있는 인상적인 우물 옆에서 이뤄졌다는 전설이 완성됐다. 그래서 1948년까지 아랍인이 거주하던 이 마을 이름은 Ayn Karim이었다. '포도밭의 우물.'
1922년 영국은 예루살렘의 초라함을 견딜 수 없었다. 리처드 카우프만이라는 건축가를 청해 예루살렘에 6군데의 Garden cities를 건설한다. 그중 하나가 아인 카림 근처였다. 유대인들은 이 동네에 히브리성경에 나오는 베트 하케렘(포도밭의 집)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하지만 성경과는 관계가 없는 일반 거주지이다.
1930년대 르우벤 루빈이 그린 아인 카림. 우물 위 모스크가 선명하다. 나훔 구트만이 그린 아인 카림에는 세례 요한 교회가 선명하다. 당시 시오니즘은 이 땅의 풍경을 그대로 묘사하고 사랑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르우벤 루빈은 오토만 터키 영향이 남아 있는 에레츠이스라엘과 아랍인을 자주 그렸다.
1948년 아인 카림의 아랍인들은 전쟁의 흉흉한 소문을 듣고 집을 떠나기로 결정한다. 유대인 군인들이 아랍인을 마구 학살한다는 소문이었다. Deir Yassin에서 일어난 일은 오늘날까지도 논란의 대상이다. 이스라엘 군사기관은 하가나, 에쩰, 레히로 분열돼 있었고 이들은 서로 통제되지 않았다. 예루살렘의 우파 견해를 반영하는 에쩰과 레히는 유대인 국가 독립을 위해 아랍인을 모두 몰아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하지만 학살의 전말은 아랍 민족주의 배경 속에 숫자가 과장되었고 결국 두려움에 사로잡힌 주변 아랍인들은 자발적으로 마을을 떠난다. 아인 카림에 있던 교회와 수녀원은 문을 닫고 안에 숨었다. 이스라엘 군대는 전투 한 번 없이 아인 카림을 접수했다. 현재는 아랍 기독교인 가정 하나만 남았고(수녀원 수녀들에게 먹을 걸 챙겨줘야 해서 못 떠나고 남은), 유대인 마을이 되었다.
아인 카림에 가장 먼저 반응한 인물은 정보력과 인맥이 충분한 라헬 야나이트 벤츠비였다. 남편 이츠하크 벤츠비는 벤구리온의 정치적 동지이고, 전쟁 이후 이스라엘의 2대 대통령이 된다. 라헬 야나이트는 그저 내조만 하는 아내는 아니었다. 에레츠이스라엘 최초의 고등학교인 김나지움에서 가르쳤고, 그녀 자신이 유대인 무장조직 하쇼메르의 창립 멤버였다. 야나이트는 하스모니안 왕가 절정기를 구가한 알렉산더 야나이 왕의 이름을 여성형으로 바꾼 것이다.
라헬 야나이트는 아인 카림에 Youth Village를 세운다. 그림같은 뷰를 자랑하는 유대 산지의 완벽한 별장촌이 된 현재로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당시 아무도 선뜻 여기 살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근처가 전투다발 지역이었다.
라헬은 재빨리 움직여 유럽에서 고아가 된 아이들을 데려와 이곳에 머무르게 했다. 자신과 남편의 모든 정치적 역량을 다 동원한 것 같다. 자신이 탈피옷에 세운 학교가 위험해서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벤구리온은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전쟁중인 이 신생국이 가난하고 병든 자들을 제대로 보호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이민자를 받아들일 때 젊고 직업이 있는 사람을 우선시한다. 이스라엘은 전쟁에 나갈 청년들이 필요했고, 그 이후는 산업의 역군이 될 이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이 잔인한 현실을 교묘히 왜곡해, 이스라엘이 홀로코스트 피해자를 핑계로 나라를 세웠으면서 실제로는 이들을 거부했다는 주장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 1949년 3월 체코에서 무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이 나라는 다 함께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라헬 야나이트의 학생들은 이곳에서 집단 합숙을 하면서 낮에는 농업을 공부했다. 마을의 우물 위에 있던 모스크를 학교로 개조해 공부했다. 라헬 야나이트는 우물 곁에 큰 플래카드를 걸었는데, 거기 히브리어 성경 구절(사 55:1)을 적었다.
הוֹי כָּל-צָמֵא לְכוּ לַמַּיִם 호이, 목마른 자는 모두 이 물로 오라.
1952년 이후 카르미트 농업학교는 정식 부지를 장만해 이사할 수 있었다. 여기서 성장한 고아 가운데 아론 아펠펠트가 있다. 예루살렘을 대표하는 작가 중 하나가 된다.
히브리어 에인 케림으로 불리게 된 마을은 1950년대 보물 소동을 겪는다. 아랍인들이 마을을 떠나면서 재산을 묻고 갔다는 소문이었다. 실제로 도로를 넓히는 공사가 시작되고 수천 개의 금화가 발견된다. 사해에서 발견된 Copper Scroll에 따르면 여기 언급된 63개 장소에는 금과 은이 묻혀 있는데, 에인 케렘 역시 그 중 하나였다.
이 마을이 전쟁의 상흔과 일확천금을 노린 투기꾼들의 사연으로 점철되는 것은 반대다. 이곳은 신약성경에서도 흔치 않은 두 여성이 주인공으로 활약하는 장소이다. 사가랴는 예루살렘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장이었고, 이곳은 그들의 여름철 별장격이었다. 임신한 엘리사벳의 소식을 듣고 나사렛에서 친척이 찾아온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방문한 사실을 기념하는 Church of Visitation이다. 카톨릭 성지의 수호자 프란체스칸은 1679년 이미 사가랴와 엘리사벳의 집으로 추정되는 장소를 구입했다. 하지만 교회가 세워진 건 1950년이 되어서야다. 이스라엘 전역에 교회를 남긴 안토니오 바를루치가 설계했다. 마리아의 감사기도 Magnificat이 47개의 세라믹에 각기 다른 언어로 기록돼 있다. 유대인들은 한나의 기도가 Magnificat의 전조 Prefiguration이라고 본다.
정원 한켠에 사가랴는 동상으로 서 있다.
현재 에인 케렘에는 발달 장애 아동들을 돌보는 기관이 있다. St. Vincent 수녀원이다. 유대인이 카톨릭 수녀회에 자녀를 보내는 게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의 수녀님들은 불안한 부모의 마음을 충분히 안심시켜 주신다.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많은 자원봉사자들이 이들을 돕는다.
마초이즘이 우세할 수밖에 없는 이 나라에서 여성들의 온전한 순종만으로 완성된 위대한 신앙의 역사가 살아있고, 여성의 힘으로 운명을 개척한 토대가 남아 있으며, 여성들이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주인들을 섬기고 있는 이 마을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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