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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윗성, 실로암 연못에서 성전까지

오랜만에 답사를 갔다. 예루살렘 이르 다비드, 다윗성이다. 저기를 차를 타고 가려고 하면 안 된다. 어마어마한 차 막힘이다. 엘악사 모스크와 감람산을 보면서 걷는다.  

 

 

다윗의 성답게 다윗이 애정한 악기 킨노르가 조각돼 있다. 저게 우리말로 수금이다. Harp가 아니라 Lyre로 옮긴다. 오늘날 다윗성에는 두 개의 집단이 가장 많이 방문한다. 군인들과 초등학생. 둘 다 시끄럽기로 막상막하다. 엘악사 모스크와 마주보고 있기 때문에 12시경에는 하잔이 기도하러 오라고 마이크에 대고 노래(기도?)까지 한다. 이렇게 시끄러운 곳이 지구상에 또 있을까 싶은 소음이다.   

아마 예수님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이곳은 예루살렘에서 가장 번잡한 곳이었다.

  

이 그림이 현재 다윗성의 고고학 발굴에 새로운 전환점을 보여준다. 가장 남쪽 실로암 연못에서 성전 남서쪽 코너 로빈슨 아치까지 연결된 대로가 있었다는 가설이다. 히브리어 이름 דרך עולי הרגל 명절에 올라가는 길, 이라는 뜻이다. 영어로 Pilgrim's Road이다. 

 

유대인은 일년에 세 번 모에드(명절)에 여호와 앞에 제사를 드리러 와야 했다. 가장 먼저 남쪽에 있는 실로암에 가서 씻었다. 먼지를 뒤집어쓰고 하나님의 전에 갈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상쾌해져서 성전으로 올라갔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שיר למעלות)를 불렀을 테지. 이 길은 꽤나 큰 대로였고 양쪽에는 상점들이 즐비했다. 이곳에서 돈도 바꾸고 물건도 구입했다. 오랜만에 친구와 친지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 길 아래로는 drainage tunnel, 즉 예루살렘 성의 배수로가 놓여 있다. 헤롯 시대에 성전에 물을 끌어오며 배수 공사까지 확실히 했던 것이다. 훗날 로마군이 닥쳤을 때 예루살렘 주민들은 이 길로 대피한다 (배수로는 하수구가 아니다). 이들이 사용했던 동전, 다음 농사에 사용하려고 소중히 보관해 들고 가던 씨앗 등이 남아서 시대를 판명해 주었다. 

 

성전 근처의 interchange 로빈슨 아치 옆에는 헤롯 시대에 재건된 거리가 있는데 '헤로디안 대로'다. 그럼 이 길도 헤롯 시대에 건설된 게 아닐까? 최근 연구를 통해 이 대로는 아래 있는 배수로와 달리, 기원후 30년, 본디오 빌라도가 로마 총독이었던 시대로 확정됐다. 시대 확정은 유기물의 탄소 화합물 반응을 보는 Carbon 14, 절대적인 시대 구분을 보여주는 동전이나 도자기 등으로 판단한다.

 

로마 총독이 유대인의 성전 방문을 원활하게 돕기 위해 공사를 한 이유는 뭘까? 성전은 고대 예루살렘의 ATM이나 마찬가지였다. 유대인은 이곳에 돈을 가져왔고, 덕분에 도시는 물자가 유통되고 매매가 이뤄졌다. 당시 유대 땅의 총독 자리는 로마의 세력가들이 말년에 한건 땡기기 위한 노후 보장책이었고 발령을 받기 위해 상당한 뇌물을 써야 하는 자리였다. 빌라도는 어마어마한 양의 세금을 뜯어서 로마 지배층에 돌려주어야 했다. 자기 주머니도 채우고.

 

콘테이너 휠로 공간을 만들고 그 사이를 파서 바닥을 발굴한 것이다. 안쪽에서 파낸 흙을 저 검은 바구니나 천에 담아 밖으로 내보내는 컨베이어가 작동중이다. 고고학 발굴 방법론에서 아마도 엄청난 업적으로 남게 될 공법이다. 이 공사가 인근 아랍 동네 실완 거주민들의 삶의 환경을 파괴한다는 민원이 있었다. 다윗성을 발굴하는 민간기업 엘라드는 그런 민원이 정치적으로 번지지 않기 위해 조심중이다. 현재 일부가 개방돼 있고, 조만간(?) 로빈슨 아치까지 전체가 개방될 전망이다. 당시 인구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넓적한 돌바닥들이 일부 발견됐다. 

켄베이어를 돌아 나오는 포대들을 밖에서 받아서 연구실로 보낸다. 

 

빌라도의 대로는 두 겹으로 있었다. 왼쪽에 있는 길은 실로암에서 성전까지 연결되고, 오른쪽의 길은 중간에서 끊긴다. 왜 끊겼을까. 로마 건축에서 대칭 구조가 얼마나 중요한데 짓다 말았나? 길이 끊기는 자리에 이런 단이 있다.

 

상점들이 있어야 할 공간이 벽에 가로 막히고 벽 뒤로 공간이 있다. 그리고 근처에서 그곳과 관련이 있을 것 같은 나무 막대기가 발견됐다. 현재까지 고고학자들의 의견은 설교단, 선포단이라는 것이다. 이곳이 도시 소식을 전달하는 플라자였다는 뜻이다. 이렇게 복잡한 곳에서? 물건을 잃어 버리는 사람과 발견한 물건의 주인을 찾는 기능을 했을 수도 있다. 누가 주목해서 듣는다고?  

에얄 메론 박사는 이 동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2008년 다윗성 근처 기바티 고고학 발굴지에서 기원후 7세기 비잔틴 황제 헤라클리우스의 얼굴을 새겨넣은 금화 264개가 발견됐다. 하얀 천막 뒤에 벽에 세로로 구멍 뚫린 곳이다. 614년 이란의 사사니안 왕조가 예루살렘을 침략한다. 적군이 다가오자 일종의 금고 같은 곳에 금화를 넣어놓았는데, 건물이 통째로 파괴된 것으로 보고 있다.

 

비잔틴 시대 십자가는 기독교의 상징이었다. 십자가 상징을 네 개의 단 위에 올려놓은 것이다. 그렇다면 네 개의 단은 골고다인가? 예수님이 못 박히신 곳 골고다는 아람어로 해골이라는 뜻이다. 라틴어로 갈보리도 그렇다. 이곳이 언덕이나 산으로 묘사된 적은 없다. 하지만 십자가가 '높이' 서 있다를 표현하기 위해 단으로 묘사하지 않았을까? 게다가 근처에서 나무 막대기가 발견됐다고 했다. 나무 십자가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필그림스 로드는 이교도 로마가 건설한 것이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이 되기 전에도 로마는 반역자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다. 한껏 애국주의가 치솟는 유대교 명절,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지나다니는 거리, 가장 시끄러운 곳에서 로마는 경고를 보내고 싶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유대인들이 저주의 상징으로 여기는 십자가를 전시한 게 아닐까? 이 길은 고작 40년 만에 로마가 이 도시를 완전히 무너뜨리면서 사라졌다. 로마군을 피해 달아나던 유대인들은 이 길 아래 있는 배수로에서 불에 타죽었다. 

 

실로암이 처음 발굴될 때부터 이곳은 논란의 중심이었다. 아랍인들의 거주지이기 때문이다. 많은 정치적 사안이 엉켜 있었다. 그 세월을 뚫고 현재 실로암 연못 주위는 이렇게 많이 달라졌다. 기독교 순례자들은 예수님 시대의 대로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유대교 역사를 탐구하는 사람들은 그 아래 배수로에서 자기 조상들에게 닥친 재앙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앞으로 더욱 더 실완의 영토 문제는 복잡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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