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32장 파라샤 하아지누를 읽는다. '들으라'로 시작되는 본문이다. 유대력으로 תשפ''ב 해(2021-2022)의 마지막 샤밧이다. 이제 토라는 초막절의 마지막 날 심핫토라שמחת תורה에 읽는 파라샤 베조트 하브라하(וזאת הברכה 신 33-34장)만 남았다. 마저 읽고 얼른 끝내고 싶은 한국인 본성이 꿈틀거린다. 토라 리딩 마지막 절차가 이렇게 복잡하니, 읽다 마는 것이 아닌가. 별 희한한 핑계를 댄다.
파라샤는 짧을수록 의미심장하다. 해설하는 사람 입장에서도 할 말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아지누는 '시'이다. 시에 녹아 있는 은유와 상징은 시대에 따라 저마다의 의미를 갖는다. 토라의 마지막에 시가 있는 것은 해석의 시대성, 적용의 확장성을 보장해준다. 그래서 새삼 토라는 은혜롭다.
첫 번째 알리야: 1-6절. 모세가 자기 말을 들으라고 부르는 대상은 하늘과 땅이다. 종교가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 별개로, 진리는 우주에 차 있다. 가끔 하늘과 땅을 향해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할 필요가 있다. 혹시 아나. 미쳐 돌아가는 세상이 정신을 차릴지. 핵심구절인 2절은 정말 아름다운 히브리어다. 내 교훈לקח과 내 말אמרה / 비מטר와 이슬טל / 내리다ערף와 맺히다נזל / 가는 비שעירים와 단비רביבים / 연한 풀דשא과 채소עשב가 대구를 이룬다. 예쁜 단어 총동원인데 리듬까지 맞췄다. 하지만 이들이 서로 대구 짝을 바꾸면 재앙이다. 메테르가 아라프이고 탈이 나잘이어야 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전파하는 일은 그렇게 정확해야 한다. 무엇보다 스며들어 생명을 자라게 해야 한다. 말씀 선포의 사명을 받은 자들은 부디 이걸 기억해야 한다.
두 번째 알리야: 7-12절, 어리석은 백성 עם נבל이여, 과거를 기억하라. 여호와의 몫이 야곱이고, 그의 백성이 대를 이어갈 유산이다חבל נחלתו. 그런데 이들은 사막, 짐승이 부르짖는 광야에 거했다. 그 황무지에서 여호와가 야곱을 보호하시기 위한 행위는 말할 수 없이 번잡스러웠다. 그의 주위를 푸닥푸닥 돌고, 진행 방향으로 쌔액쌔액 이끌고, 후다다닥 이숀 아인, 자기 눈동자처럼 지켰다. 저자가 뭘 보고 이런 거친 동사들을 차용했는지 다음에 나온다. 네쉐르, 독수리다.
네쉐르נשר는 단순한 eagle이 아니라 vulture이다. eagle은 עיט 히브리어가 다르다. 성경이 여호와의 속성을 묘사하는 데 차용한 날짐승 네쉐르가 전 세계적으로 멸절 위기이다. 이들이 죽어가는 이유는 독한 농약을 이어주는 먹이사슬 때문이다. 여호와의 표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이 세상을 절묘하게 비유하는 현실이 아닌가. 세상의 관영한 악으로 인해 여호와의 영광은 사라지고 있다. 이스라엘 자연보호청은 네쉐르를 보호하기 위해 안간힘이다. 골란 고원 감라גמלה를 보호지역으로 정하고 돌보고 있다. 비록 조각이긴 하지만 이 네쉐르의 라하프와 파라쓰, 즉 부드럽게 버티고 몸을 뻗는 동작이 갈릴리 바다를 배경으로 전달하는 시각적 쾌감은 대단하다. 네쉐르가 이 동작으로 새끼의 보금자리를 보고 있는 것처럼, 여호와의 시선이 우리에게 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다른 신은 없다.
세 번째 알리야: 13-18절.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해진 여수룬은 여호와를 저버렸다. 너를 창조하신 하나님אל מחוללך을 잊었다. 메홀렐은 혼돈 속에서 generate한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단어다. 토후 바보후, 온 세상이 카오스 상태이다. 여호와가 거기서 질서를 만드신다.
כרים ואלים בני בשן 바산에서 난 숫양과 염소들, 그리고 말들! 발로 찰까 봐 가까이 갈 수가 없다. 주인이 가도 저 자세다.
네 번째 알리야: 19-28절. 여호와가 분노하시고 얼굴을 감추시니 이 백성에게 재앙이 쌓인다. 굶주림, 불 같은 더위, 독한 질병, 들짐승의 이, 티끌에 기는 것의 독. 지금 우리가 걱정하는 것들이 아닌가. 27절에는 유명한 하나님의 의인화, 하나님의 걱정이 등장한다.
다섯 번째 알리야: 29-39절. 이 백성의 힘이 다했을 때 여호와의 보복의 날이 닥친다. 그분은 죽이기도, 살리기도, 상하게도, 낫게도 하시는 분이다. 이때 살린다를 '부활시킨다'로 보는 해석이 있다. 히브리어가 חיה다.
여섯 번째 알리야: 40-43절. 여호와의 복수로 이 땅이 정결해진다.
일곱 번째 알리야: 44-52절. 모세와 여호수아가 이 모든 것을 백성에게 들려주고 당부한다. 이것은 헛짓이 아니라 생명이다. 그리고 바로 그날, 모세는 자신의 생과 사역이 끝났음을 알게 된다.
유대교는 아침 기도 샤하릿에 아돈 올람 기도가 들어간다. 하나님이 세상을 다스리신다는 선포이다. 이 세상이 창조되기도 전부터 그렇게 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이 영광을 차지하신다. 이는 인간의 지식이나 인정 여부와 상관없는 우주적 질서이다. 이것이 유대교를, 기독교를, 이슬람교를 고등 종교로 특징짓는 신관이다. 인간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누군가가 세상을 다스린다는 개념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것이 특이하지 않나.
아돈 올람 아쉐르 말라흐 אדון עולם אשר מלך
베테렘 콜 예찌르 니브라 בטרם כל יציר נברא
레에트 나아싸 베헤프쪼 콜 לעת נעשה בחפצו כל
아자이 멜레흐 아자이 멜레흐 쉐모 니크라 אזי מלך אזי מלך שמו נקרא
베아하레이 키클로트 하콜 후 레바도 임로흐 노라 ואחרי ככלות הכל הוא לבדו ימלוך נורא
베후 하야 베후 호베 베후 이히예 베티프아라 והוא היה והוא הווה והוא יהיה והוא יהיה בתפארה
아돈 올람은 수백 년 동안 전해 내려 온 기도문이고 상당히 많은 곡조가 시대별로 붙었다. 다양한 변주가 있지만 오늘날 세속인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곡조는 우지 히트만이 작곡했다. 종교인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세속인으로 살아가기를 선택한 그는 유대인이라면 그들의 역사와 함께 해온 피윳을 알아야 한다고 믿었다. 히트만의 많은 히트곡(!)이 있지만 아돈 올람만큼 특별한 느낌을 주는 곡이 없다. 무엇보다 이 노래를 듣고 즐기는 세속인들을 보고 있자면 복잡한 심경이 된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이 우주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에 거리낌이 없는 저 특이한 상태는 어떻게 빚어진 것일까.
'Parasha'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파라샤 브레쉬트 (창 1:1-6:8) (0) | 2022.10.22 |
---|---|
심핫 토라 파라샤 (0) | 2022.10.17 |
욤 키푸르 파라샤, 요나 (2) | 2022.10.04 |
샤밧 슈바 (0) | 2022.10.01 |
아케다, 로쉬 하샤나의 파라샤 (1) | 2022.09.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