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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sha

욤 키푸르 파라샤, 요나

금식하는 날 유난히 하루가 길다. 그래서 읽어야 할 본문이 많다는 게 반갑다. 토라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해 하나님의 13가지 속성을 진술하는 장면을 읽는다(출애굽기 33:12-34:9). 속죄의 날인 만큼 거룩하라는 명령도 새삼 중요하다(레위기 19:1-18). 이사야에서는 회개와 금식의 본질을 다루는 본문을 읽는다(57:14-58:14). 오후에는 생명과 죽음 사이의 선택(신명기 30:8-20)과 요나서를 읽는다. 

 

요나서는 재미있는 책이다. 금식하는 하루 중에 지금 뭘 하나 멍해질 시간인 만큼 텍스트의 재미는 아주 중요하다. 요나서의 재미는 단연 요나라는 인물의 캐릭터와 휘몰아치는 전개에 기인한다. 아미타이의 아들 요나는 여호와가 명령하자 배를 타고 달아난다. 폭풍이 배를 깨려 하자 밑층으로 내려가 쿨쿨 잔다. 재앙의 원인으로 지목되자 자신을 바다로 던지라 한다. 여기 선장과 선원들은 착하기도 하지. 이 지경을 만든 '넛 때문이야'가 밝혀졌는데 그래도 같이 살자고 힘껏 노를 젓는다. 요나 역시 이유없는 긍휼함을 경험한 것이다. 하지만 무죄한 피를 흘리지 않기 위해 요나는 물에 빠지고 바다는 잠잠해진다. 민폐라고는 모르는 요나의 똑부러짐 좀 보라지. 차라리 죽겠다.

이제 무대는 큰 물고기 뱃속으로 옮겨진다. 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펼쳐진 모노 드라마는 신을 아는 자의 딜레마를 드러낸다. 요나는 서원을 갚는 것으로 타협에 이른다.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다시 니느웨다. 여호와의 명령에 성심성의껏이란 조건은 없었다. 요나는 할 만큼 한다. 그런데 심판이 선포되자 니느웨의 왕부터 가축까지 악한 길을 떠난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키신다.

요나는 죽는 게 낫겠다며 화를 낸다(חרה). 네가 성내는 것이 옳으냐 (הַהֵיטֵב חָרָה לָךְ). 니느웨에 내리는 심판을 보기 위해 성에서 빠져나와 초막을 짓고 앉는다. 어서 심판하시라는 일종의 시위다. 박넝쿨이 올라와 땡볕의 괴로움을 피하게 해 준다. 다음에는 벌레가 그걸 시들게 하고 뜨거운 동풍이 불어와 요나를 혼미하게 한다. 정말로 죽는 것이 나은 지경이다. 하나님은 이것이 옳으냐고 하신다(הַהֵיטֵב חָרָה-לְךָ עַל-הַקִּיקָיוֹן). 

   

나는 요나의 신학적 고뇌를 이해할 만큼 인생을 알지 못한다. 여호와께 구하는 진리는 역경에 직면해 위안을 찾는 일반적인 범주를 뛰어넘는 거니까. 다만 이 춥고 쓸쓸한 인생의 위로를 종교에서 찾는 사람들이 신학적 진리를 모른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통과하느라 어리둥절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역할은 무엇일까 답을 찾는 중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셨다(וימן). 큰 물고기, 박넝쿨, 벌레, 뜨거운 동풍 모두. מנה라는 동사는 숫자를 세는 행위와 관련돼 있다. (회당의 공동 기도를 가능하게 하는 최저 숫자가 미니안이다. 기도는 최소한 예비돼야 하는 행위인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예비하셔도 인간은 시련을 만난다. 아니 시련으로 느낀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화가 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완전하심에 비추어 나의 시련이 답을 찾을 수 없을 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울증은 종교인의 특색있는 몸부림이다.   

 

욤키푸르의 종교적 인사말은 Gmar Hatima Tova (גמר חתימה טובה)이다. 하나님과 생명책에 죄의 결산을 하는 서명을 잘 마무리하라는 뜻이다. 그런 날 요나서를 펼치는 건 무슨 의미일까. 모든 사람이 죄를 짓기 때문에 그러므로 회개해야 한다는 뜻일까. 하나님 앞에서 도망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을까. 인간은 그렇다치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들려주고 싶으실까. 하나님은 당신의 자비를 보여주고 싶으신 것 같다. 인간을 용서할 준비가 돼 있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나사렛에서 티베리야스 가는 갈릴리 도상에 텔 가드헤벨(Gat Hefer)이 있다. 성경에서 요나의 출생지로 밝히고 있는 장소다. 아랍어로 나비 유누스인데 선지자의 무덤이라는 전승이 있다. 유대인 지명은 그 동쪽의 산을 하르 요나, 요나의 산이라 명명했다. 요나가 인기가 많은 선지자여서 그런지 그의 무덤 장소가 여러 군데이다. 아슈돗 북쪽 해안가에 있는 요나의 무덤은 기원후 6세기 마다바 지도에도 표시돼 있다. 가자 지역에 있는 칸 유니스도 요나의 무덤과 관련된 지명이다. 레바논의 베이룻트와 시돈 사이 바닷가에도 요나의 무덤이 있는데 큰 물고기가 요나를 토해놓은 바닷가라는 전승이 있다. 헤브론 근처에 있는 할훌에도 요나의 무덤이 있고 근처 베이트 움마르는 요나의 아버지 이타마르의 무덤이 있다. 

 

이렇게 요나의 무덤 전승이 많은 것은 그와 같은 고뇌를 하는 이들이 많았다는 증거는 아닐까. 

 

요나를 삼킨 것은 고래와는 상관 없는 그냥 큰 물고기, 하다그 하가돌이다. 그런데 물고기 뱃속으로 들어간 요나는 하다가(הדגה), 즉 암컷으로 옮겨간다. 유대교 랍비들은 본문상의 이런 변화를 놓치지 않는데 수컷 물고기 뱃속의 크고 쾌적한 환경에서 돌이킬 줄 모르는 요나를 하나님이 암컷 물고기의 작고 불편한 환경으로 옮기셨다는 해석을 한다. 이 해석이 억지처럼 들리는 것과 별개로, 나는 하나님이 울증 있는 인간을 위해 이렇게 많은 배려를 하신다는 사실이 너무나 놀랍다. 나의 깨달음을 위해 하나님이 예비하신 이 모든 우주 만물과 함께 욤키푸르의 거룩함을 누리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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