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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ed

라헬의 무덤과 헤슈반 월

유대력의 여덟 번째 달 헤슈반은 마르 헤슈반이라고도 한다. 히브리력은 바벨론력에서 도입되었다. 마르는 아카드어로 월月을 뜻한다. 여덟 번째 마르의 이름이 헤슈반인데 다시 헤슈반 월이라고 덧붙인 것이다. 다른 달은 이렇지 않은데 유독 헤슈반 월만 그렇다. '마르'가 히브리어로 쓰디쓰다는 의미이기 때문이 아닐까. 티슈레이 월의 흥겨움을 보내고 나면 에레츠이스라엘은 겨울 준비를 시작한다. 비가 오고 날씨가 추워지고 무엇보다 휴가 없는 지루하고 지치는 일상이 지속된다. 환절기라 꼭 감기도 한번 앓아야 한다. 헤슈반이 쓰디쓰다. 마르 헤슈반이다.

헤슈반에는 두 번의 유명한 기일이 있다.
열한 번째 날이 야곱의 아내 라헬의 기일이다 (올해는 11월 5일이다). 기원전 18-17세기에 날짜를 헤아리긴 했을까. 무슨 수로 라헬이 유대력으로 여덟 번째 달, 11일에 죽었다고 생각하게 됐을까. 창세기 35장 (8번째 파라샤 바이슐라흐)에 기록된 라헬의 죽음은 시간적 배경을 암시하는 어떤 내용도 없다. 장소는 에브랏, 즉 베들레헴 길로만 나왔다. 야곱이 그곳에 마쩨바(묘비)를 세웠다는 사실은 꽤 오랫동안 구전으로 알려져 내려왔을 것이다.

유대교가 숫자를 세는 방식을 기록한 미쉬나의 게마트리아가 단서이다. 유대교에서는 로쉬 하샤나, 즉 티슈레이 월 첫째 날이 천지 창조의 날이다. 히브리어 어머니 אם은 숫자로 1+40, 즉 41이다. 로쉬 하샤나로부터 41일이 지난 후가 헤슈반 월 11일이다. 정말 이 때문이다.
성경에 등장하는 어머니들이 얼마나 많은데 헤슈반 월 11일이 하필 라헬의 기일일까. 라헬이 특별하기 때문이다. 불임으로 고통받은 경험이 있는 라헬이 둘째 아들을 낳다가 죽는 장소가 많은 여성들에게 독특한 정서적 연대감을 제공하는 것 같다. 순적한 임신 출산을 기원하는 수많은 여성들이 라헬의 무덤으로 몰려와 기도한다.

게다가 성경에서 라헬은 단지 아들을 생산하는 역할로만 제한되지 않는다. 라헬이 성경의 주목을 받는 대목은 이스라엘 왕권의 시작과 끝이다. 먼저 사울 때문이다. 아버지의 암나귀를 잃고 헤매던 사울은 선견자 사무엘을 만나 기름 부음을 받는다. 그때 사무엘이 베냐민 경계 셀사에 있는 라헬의 묘실 곁에서 두 사람을 만나게 된다고 예언했다(삼상 10:2). 셀사? 히브리어로 צֶלְצַח 쩰짜흐, 이게 어디일까. 예루살렘 북부의 라마 근처로 본다. 창세기는 베들레헴 길이라고 했는데, 사무엘서는 다른 장소라고 말하고 있다. 사무엘서를 읽을 기회가 많지 않은 유대인 중에는 이 사실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논쟁할 필요는 없다. 유대인에게 사무엘서의 권위는 토라의 권위를 앞설 수 없기 때문이다.

라헬은 유다 왕조가 멸망할 때 또 등장한다.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받기를 거절하는도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의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저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렘 31:15-17).

라헬의 눈물은 포로로 유배된 자신의 자녀들을 구속하도록 하나님의 자비를 불러일으키려는 노력이었다. 하나님은 라헬의 슬픔을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라헬 때문에, 그 삯으로 그의 자녀들이 돌아온다고 약속하셨다. 라헬이 무엇을 했는데? 언니의 수치를 가리기 위해 남편을 양보했다. 자식도 안겨주지 못하는 남편을 끝까지 감쌌다. 아버지를 배신하고 이스라엘을 택했다. 그래서 라헬은 가장 일찍 사망하느라 막벨라에도 묻히지 못했지만 가장 사랑받는 유대인의 어머니이다. 예레미야서도 사무엘서와 마찬가지로 라헬의 묘지를 라마 근처로 묘사한다. 하지만 유대교 전승은 포로로 끌려가는 길에 유대인이 베들레헴을 지나갔고, 그곳에 라헬의 무덤이 있었다고 믿는다(토라는 모세가 직접 받은 율법서다. 토라 기록에 권위가 있다).

 

라헬의 무덤에 대한 여러 후보지 가운데, 현재 장소와 형태는 오토만 시대에 정해졌다. 이 일대는 적어도 맘루크 시대부터 기독교와 이슬람 묘지였다.
1841년 모세 몬티피오레 경이 오토만과의 협상을 통해 유대인 공동체를 위해 이 장소를 개조하고 공개할 권리를 얻는다. 1840년 일어난 다마스커스 포그롬 직후였다. 몬티피오레 경은 무슬림의 반발을 완화하기 위해 무슬림도 와서 기도할 수 있도록 미흐랍을 포함한 대기실을 추가했다.

UN은 에레츠이스라엘의 분리안을 상정할 때 종교적으로 의미가 큰 지역들이 결국 분쟁의 대상이 되리라는 것을 내다보고 Corpus Separatum 별도의 중립 지역을 따로 두었다. 예루살렘과 베들레헴이 그 대상 지역이다. 1948년 5월 14일 영국군이 떠난 다음날 요르단군은 암만에서 알렌비 다리를 건너와 5월 17일 동예루살렘을 점령했고, 여리고, 베들레헴, 헤브론, 나블루스를 장악했다. 1967년 6월 이스라엘이 베들레헴을 점령하면서 유대인은 라헬의 무덤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됐다. 하지만 팔레스타인과 분쟁이 격화되면서 베들레헴 북쪽 입구에 있는 라헬 무덤은 주요 테러 현장이 되었다. 결국 1995년 오슬로 협정 결과 베들레헴과 라헬의 무덤은 A지역, 즉 팔레스타인 통치 지역이 되었다.

여기에서 헤슈본 월을 기일로 삼는 또 한 사람이 등장한다. 이츠하크 라빈 총리이다.

오슬로 협정에 따라 라헬 무덤이 팔레스타인에게 넘겨지게 되자, 당시 국회의원이자 구쉬 에무님 운동의 창시자 므나헴 포라쉬가 총리 라빈의 사무실을 찾아와 울며 외쳤다고 한다.

איך אתה יכול לעשות לה את זה?! עם ישראל לא יסלח לך לעולם אם תפקיר את אמא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만약 당신이 어머니를 내버린다면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을 용서하겠습니까?"
우파들이 만들어낸 말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라빈 수상은 마음을 바꾸어 라헬 무덤을 이스라엘 아래 남겨둔다.

 

이 이야기는 대체 어디서 마치게 될까. 포로가 되어 울며 길을 떠났던 이들은 돌아왔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라헬의 자손은 전 세계로 다시 흩어져야 했고,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나서야 이 땅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70년이 지나도록 평화는 이뤄지지 않았고 수차례 테러 대상이 됐던 라헬의 무덤은 분리장벽에 둘러싸이게 된다. 베들레헴 거주민들은 바로 몇 걸음 너머에 있는 라헬의 무덤을 분리장벽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다.
이 땅에 평화를 가져오는 길이라 믿었던 신념 때문에 이츠하크 라빈 총리는 1995년 11월 5일 암살되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유대인의 어머니 라헬을 사랑했을 이갈 아미르에 의해서였다. 그날이 유대력으로 헤슈본 월 열두 번째 날, 라헬의 기일 다음날이다.

라빈 총리가 암살된 텔아비브 시청 계단 옆이다. 현재 추모비가 마련돼 있고 라빈 광장, 키카르 라빈이라 불린다. 매해 이곳에서 라빈을 추도하는 행사가 열린다. 올해는 헤슈반 월 12일, 즉 11월 6일이다.

11월 1일 선거를 마치고 열린 라빈의 추도식은 그의 지지자들에게 묘한 감상을 불러 일으켰다. 그때 예루살렘에서 우파를 상대로 라빈을 향한 증오를 설파하며 집권에 성공한 네탄야후가 돌아왔고, 그를 결국 살해한 종교 시오니즘 세력이 명실상부한 제3당으로 부상했기 때문이다. 라빈의 가족들은 선거에 대한 논평을 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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