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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사렛, 절벽산 낭떠러지

나사렛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회당에 가셔서 성경을 읽으셨다. 이사야 61장이었다. (이 본문은 창세기 첫 번째 파라샤의 하프타라이기 때문에 기독교인은 이때 누가복음 4장을 함께 읽는다.)

 

나사렛 사람들은 놀랐다. 이어서 예수님의 독특한 성경 해석에 화를 냈고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로 그를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려 했다. 

 

예수님은 그들 가운데로 지나서 자기 길을 가셨다.

 

헬라어 에포레우에토는 그 자리를 떠났다는 뜻이다. 그런데 현지 기독교 전설은 예수님이 언덕에서 아래 계곡으로 몸을 날려 이들을 피하셨다고 한다. 그래서 현재 나사렛 남쪽에 있는 해발 397미터의 낮은 언덕을 Mt of Precipice, 혹은 Mt. of Leap라고 부른다הר הקפיצה.

 

예수님이 여기서 뛰어내리셨다는 전설은 더 이상 받아들여지지 않지만 이름의 기원은 그러하다.

 

그래도 이 장소는 나사렛이라는 도시와 이곳으로부터 시작된 복음 사역에 대해 묵상할 이유를 제공한다. 현재 Jesus trail, 혹은 Gospel Trail은 모두 이곳을 시작점으로 삼는다. 전망을 하기에 좋은 지점이기 때문이다.  

나사렛 남서쪽, 저 도시 경계가 점점 더 내려오고 있다. 도시가 확장되고 있다는 뜻이다. 

남동쪽으로 펼쳐지는 비옥한 이즈르엘 평야

동쪽 멀리 있는 독특한 모양이 타볼 산이다. 앞쪽 언덕은 나사렛 지역의 유대인 마을 노프 하갈릴이다. 원래 나사렛이 들어가는 이름이었는데 유대인에게 나사렛이 상관이 없다며 기어이 이름을 바꾸었다. 히브리어로 나자렛은 노쯔림, 기독교인과 같은 어근이다. 산자락의 큰 마을은 Iksal이다. 여호수아서에 나오는 기슬롯다볼로 본다(수 19:12). 

멀리 모스크를 배경으로 Church of Annunciation 수태고지 교회이다.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1950년대 프란체스칸은 교회 건축에 돌입했다. 처음 선택된 설계안은 홀리랜드 교회 건축의 대가안토니오 바를루치의 것이었다. 예루살렘 이탈리아 병원(1914), 다볼산 변형 교회 (1919-24), 겟세마네 애고니 교회 (1922-24), 베들레헴 선한 목자 교회, 여리고 기념 교회 (1924), 비아 돌로로사의 채찍 교회 (1928-29), 갈릴리 팔복 교회(1937-38), 벳바게 나사로의 무덤 교회 (1952-1955), 감람산 주님의 눈물 교회 (1955), 에인 케렘의 Church of Visitation (1955), 예루살렘 성묘교회 갈보리 예배당을 복원했다. 건축가이면서 프란체스칸 수사였기 때문에 가능한 경력이기는 하다. 젊은 시절 그는 무솔리니의 지지자였다. 1938년 건설된 갈릴리 팔복 교회에 무솔리니의 자금이 투입된 경로이다. 

 

1950년대 이스라엘 영토에서 종교의 자유와 파시즘 지지가 공개적으로 병립하기는 어려웠다. 석연치 않은 이유로 베를루치의 설계안은 취소되고 1958년 Giovanni Muzio의 설계가 채택됐다. 베를루치는 마리아의 수태고지를 기념하는 교회에 심혈을 기울였었다. 마음의 병이 깊었는지 이태도 지나지 않은 1960년 사망한다. 

 

나는 교회 건축을 평가할 만한 아무 자격이 없지만 저 교회 건물은 수태고지 사건과 그다지 어울리는 않는다고 생각한다. 무엇을 저렇게 과시해야 할까. 주의 여종이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הִנְנִי שִׁפְחַת יְהוָֹה יְהִי־לִי כִדְבָרֶךָ 했을 뿐인데. 그래서 더욱 우피 골드버그의 시스터 액트 속 Hail Holy Queen이 생각난다. 교회의 제도적 경건함 속에 갇혀 있는 신앙고백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우리 모두는 이미 알고 있지 않은가. 

 

 

나사렛 한복판에 있는 큰 교회 때문에 실감이 안 나는 또 한 가지 사실은 바로 이 도시가 이스라엘 영토에서 가장 큰 아랍 도시라는 점이다. 인구의 70퍼센트가 무슬림이다. 도시의 독특한 역학관계로 가끔 기독교인 시장이 뽑힐 때가 있다. 그로 인한 가장 큰 스캔들이 1999년에 있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을 5개월 앞둔 시점이었다. 나사렛의 기독교인 시장은 의욕을 발휘해 이 복잡한 도시에 주차장을 세우려 했다. 하필 그 주차장이 위대한 살라딘의 조카 Shihab el-Din의 무덤이라고 여겨지는 마캄이었다. 결국 사건은 법정으로 갔고 무슬림이 공공의 영토를 점유할 수 없다는 판결이 나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소유권은 엄중한 사안이기 때문이다. 무슬림의 저항이 길어지자 교황을 초대한 이스라엘 정부도 다급해졌다. 별도의 모스크 건설을 제안했다. 무슬림은 위대한 전사의 마캄에 타협은 없다고 버텼다. 바티칸은 이 모든 게 도발적이라고 받아들였다. 

 

이스라엘 정부는 바티칸과 영토 문제가 있다. 십자군 이래 카톨릭은 성지를 말 그대로 소유하는 중이다. 여전히 많은 분쟁 지역에서 카톨릭 기관이 유대인과 아랍의 충격 흡수 역할을 해주고 있다. 좋은 관계를 유지할 충분한 이유가 된다.   

 

마캄은 가건물로 남아 여전히 수태고지 교회의 위용에 대항하고 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순례자들에게는 해 본 적이 없다. 영화는 현실과 다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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