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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ivati, 다윗성

원래 이곳은 주차장이었다. 이스라엘 군대 보병 중 기바티 Brigade의 이름을 붙였다. 1986년 10월 15일 통곡의 벽 광장에서 선서식을 가진 기바티 여단 병사들에 대한 테러 공격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사이프러스 나무들에 둘러싸인 회색 돔이 엘악사의 모스크다. 

 

2005년 Eli Shkron이 사이트 발굴을 시작했다. 2007년 히브리대학교의 Doron Ben-Ami와 Yana Chechanovitz가 이어받았고 현재는 텔아비브 대학의 Yubal Gadot 교수와 Yiftach Shalev가 맡고 있다. 발굴 책임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사이트는 나 역시 많지 않다. 하지만 기바티만큼은 일일이 이들의 노고를 헤아리게 된다. 지난 17년 동안 자신들의 전문적인 경력을 모조리 쏟아부은 이들이기 때문이다.

 

발굴 현장에 대한 첫 소감은 뭐 이렇게 보존이 잘 되어 있느냐이다. 이곳이 와디이기 때문에 아무것도 깎여 내려가지 않고 보존된 것이다. 왼쪽이 Western Hill이고 오른쪽이 City of David인데 그 사이 티로포에온 계곡 위에 위치해 있다. 계곡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이유는 이곳을 건설할 때 지면의 갭을 채웠기 때문이다. bedrock을 볼 수 있긴 하다.

Yellow 이슬람

Red 비잔틴

Purple 후기 로마

pale Red 2차 성전 시대 말

Orange 2차 성전 시대

Blue 1차 성전 시대, 9th Century BCE 여호사밧?

가나안 시대가 안 나온 게 이상하다. 다윗성은 가나안 시대 워터 시스템조차 요새화 됐는데? 시대 계산이 잘못됐나 싶겠지만, 천 년이나 건너뛰는 건 이상하다. 조금 더 있으면 뭐가 나올 것이다.  

 

70mX12m 비닐하우스는 진전된 연구를 위해 보호중인데, 히스기야에서 예레미야 시대, 즉 1차 성전 멸망 단계이다. 다윗성에서 다윗 궁전?으로 기대하는 Large Structure 다음으로 큰 건물이다. 매년 새로운 발견이 이뤄지고 있다.

 

그 아래쪽에서 1차 성전 시대 인장이 나왔다. Natan-melech Abd Hamelechלנתנמלך עבד המלך. 열왕기하 23:11에 나오는 인물이다. 요시야 왕이 시행한 종교 개혁에 참여했던 궁정 관리הַסָּרִיס이다. 우리말이 '내시'로 번역한 단어는 메소포타미아 제국에서 공히 발견되는 관직으로 그 수장은 랍사게다. 왕의 최측근으로 적어도 넘버 쓰리다. 우리 관념 속 내시 차원을 뛰어넘는다. 어쨌든 유다 여러 왕이 태양을 위해 말을 드렸는데 이 말들을 여호와의 성전 입구 나단멜렉의 집 곁에 두었다. 요시야 왕은 종교개혁을 위해 이를 제거했고 태양 수레를 불살랐다. 나단멜렉의 집이 이 자리일 수도 있고, 행정부의 고관인 그의 오피스가 있었을 수도 있다.   

 

저 깊숙한 속에 깎은 돌로 된 부서진 아치가 있다. 아마도 궁전의 기초 부분일 것이다. 복원 모델에서 저 부분이다.

확정된 건 아니다. 다만 더 이상 증명할 수가 없고 매우 타당한 추론이다. 

 

2차 성전 시대는 요세푸스가 증언한다. 성전 산 남쪽 다윗 성에 다윗 궁 외에 또 하나의 궁전이 있었다는 것이다. Queen Helena of Adiabene, 기원후 1세기 이라크 땅에서 이스라엘로 와서 유대교로 개종한 여왕이다. 예루살렘에서 헬레나 여왕은 비잔틴 제국 콘스탄티누스의 어머니 헬레나가 아니다. 기근으로 시달리는 예루살렘에 많은 자선을 베푼 인물이다. 이 궁전은 기원후 70년 로마에 의해 파괴되었다. 동전, 도자기, 고대 프레스코 잔해, 지하 mikveh 등이 발견됐다.

 

기바티 사이트가 화제가 된 건 헬레니즘 시대 요새 HAKRA, 혹은 ARKA가 발견됐다는 가능성 때문이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에 돌아갈 때 아닥사스다 왕에게 조서를 청하는데 왕의 삼림 감독에게 목재를 내주게 한 것이다. 그 용도는 성전에 속한 영문의 문과 성곽과 자기 집 들보를 위한 것이었다(느 2:8). 이때 성전에 속한 영문이란 성전에 붙어 있는 fortress의 문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어 비라בירה이다. 

 

느헤미야는 기원전 444년 페하, 즉 총독이라는 직함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그가 말한 비라는 하스모니안 왕조 시대 요새인 Baris와 동일시된다. 아리스테아의 편지에 언급돼 있는데, 직사각형이고 여러 탑이 있었다는 것 외에는 형태에 대해 알려진 바가 없다. 탑 중의 하나는 Straton's tower(케이사랴의 고대 명칭?)로 알려진다. 

대제사장이 바리스에 거주하면서 성전을 감독했다. 요세푸스는 히르카누스 1세가 자기 궁전보다 바리스에서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고 기록한다. 아마도 바리스의 지하 통로를 통해 성전으로 연결되었고 대제사장의 의복도 보관했던 것 같다. 바리스는 기원전 63년 폼페이우스에 의해 포위되었고 일부가 무너졌다. 건축왕 헤롯이 재건했고 자신의 후원자 이름을 따서 안토니아 요새라고 명명했다.

느헤미야와 헤롯까지 매끄럽게 연결된 건 문서 자료가 확실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사이에 있었던 일이다. 

 

기원전 300년대 프톨레미는 예루살렘 성전을 살피기 위해 수비대를 배치했다. 그게 헬라어로 아크라이다. 높다는 뜻이다. 아크로폴리스에서 그 아크로다. 히브리어로는 하크라로 발음한다. 

기원전 200년대 셀류키드 왕조도 예루살렘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별명이 미치광이인 에피파네스가 왕이 되자 핍박은 절정에 달했다. 여러 가지 정신 나간 정책을 실시하면서 프톨레미의 아크라를 재건하고 강력한 감시체계를 구축한다. 같은 헬라 제국이라 역시 이름이 아크라이다. 이 아크라가 얼마나 지긋지긋했는지 헬레니즘 제국에 반기를 든 하스모니안 왕조의 시므온은 아크라를 완전히 파괴해 버린다. 지반까지 파버려서 다시는 재건할 수 없게 했다고 요세푸스는 강조한다. 

그 아크라가 여기 기바티에서 발견됐다는 것이다. 도론 벤아미 교수의 작품이다. 탑의 남쪽 코너가 보이고, 왼쪽으로 벽이 이어지고 흙으로 덮인 부분이 Glacies (artificial sloping sturucture - 적이 다가오는 것을 막기 위한 구조물)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두 가지 때문에 반론이 생긴다. 다시는 재건할 수 없게 파괴했는데 흔적을 어떻게 찾았을까. 성전을 감시 감독하는 요새가 성전으로부터 이렇게 멀리 있어도 되나? 게다가 여긴 그다지 높지 않은데?

 

기원후 2세기 하드리아누스는 예루살렘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재건하는데, 그 경계가 현재 Jewish Quarter였다. 기바티는 변두리였던 것이다. 그러다 4세기 비잔틴의 기독교 도시로 변모하면서 도시 인구가 폭발하고 여기까지 로마 시대의 빌라가 세워진다. 정원을 가진 대단한 구조물이다. 아마도 행정 중심지 역할을 했을 것이다. 이곳에서 흥미로운 게 발견됐는데 주조된 금화이다. 콘스탄티노플에서야 금화 주조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변방에서 금화 씩이나? 샐러리를 지급하기 위해서거나 세금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중 사용된 적 없는 금화 무더기가 (264개 금고째) 발견됐다. 헤라클리우스 황제 시대 주조된 것으로, 기원후 614년 이란의 사사니드(사산조 페르시아)가 예루살렘을 정복할 때 해를 피하기 위해 금고째 넣었다가 그대로 파괴된 듯하다. 

 

638년 이슬람이 도착했을 때 예루살렘은 상당한 파괴를 경험한 직후였다. 그래도 기바티는 여전히 성벽 안에 있었다. 기원후 8-9세기 초기 이슬람 시대 건물이 발견됐는데 거주지는 아니고 일종의 산업체 (도축장) 용도였다. 이 지역은 예루살렘 안에서 지형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소외됐을 것이다. 11세기 파티미드 왕조 때 예루살렘에 큰 지진이 두 번이나 일어나 많은 성벽과 건물들이 파괴됐다. 파티미드 왕조는 어쩔 수 없이 성벽을 재건했는데 그게 현재 예루살렘 올드 시티 성벽의 기초이다(1538년 술레이만이 그 위에 현 성벽을 재건한 것이다). 그래서 1099년 십자군이 도착했을 때 Givati와 City of David는 예루살렘 밖에 위치했다. 당시 이곳은 묘지나 쓰레기처리장으로 변해 있었을 것이다. 지리학에 무지했던 십자군은 당시의 성벽 위치를 근거로 시온산의 위치를 추정했고 성경 기록에 따라 그곳을 다윗성으로 보았다. 다윗은 죽어 다윗성에 묻혔으니 시온산에 다윗의 무덤도 두었다. 공식적으로 유대교 종교인은 다윗성의 위치가 정정된 이후 다윗의 무덤을 인정하지 않는다.   

 

다윗 성이 자기 주장을 완성하려면 다윗의 무덤이 나오면 된다. 

 

 

 

 

다윗성, 실로암 연못에서 성전까지

오랜만에 답사를 갔다. 예루살렘 이르 다비드, 다윗성이다. 저기를 차를 타고 가려고 하면 안 된다. 어마어마한 차 막힘이다. 엘악사 모스크와 감람산을 보면서 걷는다.  다윗의 성답게 다윗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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