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의 도시 케이사랴Caesarea는 천혜 항구가 아니라 그런지 어정쩡한 위치이다. 항구는 수송 목적이 가장 크기 때문에 도시 근처에서 발전하는 법이다. 고대 가자 항은 이집트와 블레셋의 본진이고, 아슈켈론은 페니키아의 거점이고, 욥바 항은 예루살렘의 창구였고, 아코 항은 북쪽의 관문이었다. 케이사랴는 왜 여기 있는지 모를 항구다. 지금은 하이파와 아슈돗이라는 현대 항구가 세워졌기 때문에 더 의아하다.
케이사랴는 주전 30년 헤롯이 만든 인공항구이다. 로마로 오가는 항구가 필요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자신의 위대함을 건축을 통해 과시할 필요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건축 프로젝트는 신을 향한 도전이었고, 바다를 막아 항구를 만드는 것은 포세이돈 급의 야심이었다.
고고학은 상상력이 기반한 학문이다. 나로서는 보이지 않는 것들과 싸우는 기분이다. 저 바다에 헤롯의 항구가 묻혀 있다.
(미친) 인간이 만들어낸 인공 항구 Sebastos이다. 아우구스투스의 헬라어 이름이다. 약 200두남이다. 해저 아래에서 기초 역할을 하는 거대한 콘크리트 틀을 만들어 바다를 메웠는데, 화산재로 만든 Pozzolana라는 이름의 콘크리트이다. 아무리 헤롯이라도 이 땅의 지형학적 생성 원리를 거스를 순 없었다. 시리안 아프리카 리프트의 균열로 이뤄진 지형은 수시로 지진을 일으켰고 결국 인공 항구는 바닷속에 수장된다.
이스라엘 박물관이 복원한 케이사랴 항구 조감도
항구의 건너편에 제우스와 로마 여신을 위한 신전이 있었다. 현재 고고학 발굴이 이뤄지고 있지만 신전의 모양이 어땠으리라 상상할 만한 단서로는 부족하다.
헤롯은 야심가이고 당연히 대부분의 건축 양식은 로마에서 베꼈다. 로마에 있는 Ara Pakis, 평화의 제단이다. 일종의 옥외 신전이다. 케이사랴 신전에 계단이 있는 이유일 수 있다. 기원후 4세기 제우스와 로마의 신전은 그대로 교회로 변한다. 8각형 octagonal 형태의 교회가 선다.
헤롯은 로마에서 온 VIP들을 접대하기 위해 케이사랴에 궁을 짓는다. 아마도 이 궁에 로마의 총독들이 머물렀을 것이다. 바울을 가둔 감옥도 궁에 딸린 시설이었을 것이다. (미친) 인간의 야심은 결국 허무하게 사라졌지만, 그걸 굳이 복원해서 확인해 보고 싶을 만큼 대단하긴 했다.
주후 1세기 풀빌라. 로마 VIP들은 낮에는 히포드롬에서 전차들의 경주를, 밤이면 극장에서 연극을 보며 헤롯이 제공하는 향연을 만끽했을 것이다.
본디오 빌라도의 비문.
너무 진짜 같아서, 저게 설마 했다. 오리지널은 이스라엘 박물관에 있고 이것은 당연히 레플리카이다. 1961년 로마 고고학 팀이 발굴했다. 그래서 밀라노 고고학 박물관에도 레플리카가 있다.
본디오 빌라도는 26-36년까지 유대 지방을 다스린 로마의 governor였다. 케이사랴는 그의 행정 수도였다. 로마인들은 종교적 광인들이 모여 있는 예루살렘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디오 빌라도는 필요할 때만 예루살렘으로 여행했다. 아마도 나사렛 예수의 재판 때도 잠시 들렀다 골치 아픈 재판에 끼어야 했을 것이다.
로마의 governor들이 오가야 했기 때문에 케이사랴에서 로마로 가는 배편은 자주 있었다. 바울은 이곳에서 출발하거나 이곳으로 돌아오는 등 케이사랴에 익숙했을 것이다.
바다를 향해 있는 극장은 오케스트라와 카베아와 보미테리움 모두 확인되는 대단한 수준이다. 헤롯은 뭐든 확실히 했다.
스피나(반환 트랙?)까지 갖춘 엄청난 규모의 히포드롬이다. 이 정도에서 이상한 생각이 든다. 헤롯은 (미쳤으니) 그렇다 치고, 이걸 무슨 수로 전부 고고학 공원으로 유지할 수가 있지? 정답은 돈이다.
200두남 이상의 고고학 공원은 물론, 신도시 150두남까지 전부 사들인 인물이 있다. 에드몽 베냐민 로스칠드이다. 사실 여기에는 함정이 있다. 로스칠드에게 한꺼번에 팔아넘긴 전 소유주도 만만치 않은 것이다. 베이루트에 거점을 두고 있던 Sursock 기독교 패밀리에게서, 유대인은 19세기 이래 200,000 두남, 즉 5만 에이커의 땅을 사들였다. 이중에 22개 마을을 로스칠드가 샀다. Sursock이라는 이름은 지금도 그냥 넘기면 안 된다.
1923년 오토만을 대신해 영국의 위임통치가 시작되자 로스칠드는 PICA(Palestinian Jewish Colonization Association)를 설립해 자신의 모든 땅을 협회로 이전했다. 이스라엘이 훗날 아랍 국가들과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살아남은 건 분명하지만, 로스칠드가 아니었으면 전쟁을 할 이유도 없었다. 에드몽 베냐민 로스칠드는 1934년에 사망했고, 로스칠드 가문은 1948년 세워진 이스라엘 국가에 토지 소유 대부분을 증여한다.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토지 증여이다. 당연히 국가 발전에 중요한 동력이 되었다. 그러고도 남은 땅이 있었는데 그게 케이사랴다. 현재 케이사랴는 공식적으로 이스라엘 국가 영토가 아니라, 로스칠드 재단 소유이다. 이스라엘 국가는 로스칠드 재단의 파트너로서 경영에 개입한다. 케이사랴의 1차 발굴에도 당연히 로스칠드 재단이 돈을 댔다. 이스라엘 유물청은 새롭게 발굴된 유물들을 기초로 케이사랴를 레노베이션할 야심찬 5년 계획을 세웠는데 약 4천만 달러의 경비 역시 로스칠드 재단이 댔다. 그러하다.
케이사랴는 주후 66년 유대인 항쟁이 시작된 도시이다. 항쟁의 시발점은 이방인이 유대인의 회당을 더럽혔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특성상 회당은 한두 개가 아니었을 것이다. 약 60년 후 바르 코흐바 반란의 지도자 랍비 아키바는 가이사랴에서 순교했다. 그가 활동한 회당도 있었을 것이다. 아쉽게도 케이사랴에는 다소 엉뚱한 곳에 모자이크 바닥을 가진 주후 5세기 회당만 발견됐다.
기능은 멈췄지만 '보스니아 모스크'라고 부르는 건물이 남아 있다. 레스토랑과 샵으로 개조 작업이 진행중이다. 사실 우마야드 압달 말리크 시대에 지어진 유서깊은 모스크로, 맘루크 시대에 재건되었다가 19세기 무슬림 피난민 보스니안이 모스크로 사용했다. 수차례 지진을 겪어서 오리지널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스킨스쿠버 비슷한 활동이 이뤄지는 곳이라, 해저 고고학 발굴이라는 거창한 타이틀도 있다. 고고학 공원을 나가서 케이사랴 신도시 쪽으로 가면 헤롯이 세운 아쿠아덕, 수로가 있는 해안을 볼 수 있다. 이스라엘 최고 부촌 케이사랴는 거기를 말한다. 이스라엘 유일의 골프 클럽과 스파라딤 미술관이 있다. 베냐민 네탄야후 전 총리의 사저도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