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eople

키부츠 기노사르

이스라엘 북부, 짜폰에 가게 되면 오는 길에 갈릴리 바다, 킨네렛에 들르는 게 불문률이다. 이 바다를 외면하고 돌아온 적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나는 기독교인이라 당연하지만 유대인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은 교회를 가지 않기 때문에 함께 갈 수 있는 곳을 타협해 가는 곳이 기노사르이다. 아르벨이 정면으로 보이는 기가 막힌 위치이다. 

 

오병이어 기적 이후 한밤중 킨네렛은 풍랑이 거세게 일었다. 제자들은 공포에 빠지고 예수님은 그들을 위해 물 위를 걸으셨다. 그 이적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시다'라는 고백을 이끌어냈다. 유대인들은 기독교의 동정녀 잉태 교리보다 인간이 물 위를 걸었다는 사실에 더 빡치는 경향이 있다. 왜 그게 기분나쁠까? 아무튼 예수님과 제자들이 그 밤을 보내고 도착한 곳이 게네사렛 땅אַרְץ גְּנֵיסָרֶת이다. 고대 유적지로는 텔 킨네렛, 키르벳 아부 슈세 등이 있지만 기노사르의 위치를 확정하지는 못했다. 오늘날 키부츠 기노사르가 아닌 것만은 확실하다.

 

1937년 유대인 용병대 팔마흐는 이곳에 정착지를 세운다. 호마 우믹달이라고 불리는 전략이다. 미리 울타리와 탑을 만들어 두고 밤을 이용해 트럭으로 옮겨 세워놓는 것이다. 영국이 유대인과 아랍인 국가 분리 제안을 하리라 예상하고, 그 분리의 근거는 정착촌 숫자가 되리라는 데 착안한 전략이었다. 기노사르의 땅은 이미 로스칠드가 세운 PICA 소유였다. 

 

 

 

 

Tower and Stockade, הפעיל עו''י

חומה ומגדל Tower and Stockade בין השנים 1939-1936 היה בארץ "המרד הערבי*". ארגון "ההגנה**" הגיב. בין היתר, בהקמת יישובים חדשים. באותה תקופה כבר חשבו הבריטים על

jy4kids.tistory.com

  

근처에 있는 마지달(믹달, 혹은 막달라)에는 사회주의 시오니스트 젊은이들이 와 있었다. 이들이 기노사르에 키부츠를 세운다. 이갈 알론도 여기에 합류한다. 카두리 농업학교 1기 졸업생으로, 1948년 전쟁에서 작전 사령관을 맡게 되는 인물이다. 

벤구리온이 man in the negev라면, 이갈 알론은 man in the galilee이다. 두 사람은 서로를 좋아하지 않았다.ㅋ 두 사람 다 사회주의자이지만 서로에게서 자신과 다른 사회주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1948년 전쟁은 이갈 알론의 전쟁이었다. 고작 30살이었지만 팔마흐의 총사령관, 하가나의 작전 사령관이었고, 전사이자 전략가이며 승부사였다. 이갈 알론은 기본적으로 위에서 내려오는 정치적 오더를 들어먹지 않았다. 벤구리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카이로로 진격했고 하루만 더 있었다면 그 전쟁의 결과는 완전히 달랐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벤구리온은 이갈 알론을 옥스포드로 보낸다. 그 뒤에는 외교부로 돌린다. 이갈 알론이 이스라엘 정치무대에 서는 건 벤구리온의 말년인 1961년 이후이다. 벤구리온은 그의 라이벌 모세 다얀을 선호했고 정치적 후계자로는 시몬 페레스나 이츠하크 라빈을 택했다. 이갈 알론은 너무나 일찍 1980년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이스라엘의 노동당 지지자들이 여전히 멍울처럼 기억하는 게 이갈 알론의 갑작스런 사망과 이츠하크 라빈의 암살이다.  

 

이스라엘의 많은 분야와 마찬가지로 키부츠 역시 상상을 초월하는 대립과 분열을 경험했다.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세워지긴 했지만 냉전 시대를 맞으며 조국의 미래와 관련해 전망이 달랐기 때문이다. 성서 영토에 대한 입장, 아랍에 대한 태도, 공동소유에 대한 이념 등에서 모두 대립한다. 결국 키부츠 운동은 입장 차에 따라 메우하드에서 이후드로 결별하고, 한 키부츠 공동체에서 입장 정리가 안 되면 분열했다. 분열의 시작은 아슈돗 야아콥이었고, 엔하로드, 기브앗 하임 등으로 분열이 번졌다. 최초의 키부츠 드가니야는 복합적인 이유가 겹쳐 드가니야 알렙과 드가니야 베트로 나뉜다. 한 키부츠에서 태어난 어린이들은 형제자매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결혼도 하지 않는 법인데, 이렇게 나뉜 두 키부츠는 평생 말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키부츠를 방문하면 조심스레 이곳이 메우하드인지, 이후드인지 묻게 된다. 

 

이갈 알론의 최대 업적이 1967년 이후 웨스트뱅크 영토에 대한 해결책 '알론 플랜'이다. 당시 이스라엘 정부는 힘으로 차지한 땅이 평화의 조건이 될 줄 믿었다.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의 반환을 요구하며 이집트와 시리아로부터 협상 제안이 오리라 기대한 것이다. 당시 국방부장관 모세 다얀은 핫라인에 언제나 응답할 준비가 돼 있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역사적 가정은 아무 쓸데도 없는 거지만, 이때 웨스트뱅크를 요르단이 돌려받고 훗날 팔레스타인 지역에 이양했으면 오슬로 협정보다 훨씬 넓은 영토를 차지하는 셈이다.  

하지만 수단 카르툼에서 열린 아랍 정상회의는 이스라엘의 평화 모색에 대해 3 Nos로 화답한다. 이스라엘과 평화도 없고 화해도 없고 협상도 없다는 것이다. 그로부터 10년 뒤 아랍 국가들은 팔레스타인과 관련된 문제는 아라파트의 PLO가 알아서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손을 뗀다. 이번 월드컵에서 아랍인들이 '마이 비러브드 팔레스타인'을 합창하던데, 팔레스타인 사람치고 진심으로 고맙다 여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다. 저마다 이 영토에 욕심을 내다가 그게 힘들어지니 결국 귀찮은 혹으로 내치지 않았나.

이스라엘 정부는 시나이반도와 골란고원에 대해서는 장기적인 대책을 세웠지만 웨스트뱅크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는 것을 결정했다." 그래도 궁극적으로는 이갈 알론의 제안이 방향성이 되었다. 웨스트뱅크 동쪽에 유대인 정착촌을 세워 펌핑 존을 조성하고 예루살렘과 에찌온 블록에 연결해 이스라엘로 합병하고, 웨스트뱅크는 팔레스타인 자치를 시행하거나 여리고에서 요르단과 사이에 회랑을 건설해 요르단에 병합되는 것이다. 요르단 후세인 왕은 이 제안을 거절했고 웨스트뱅크로부터 완전히 손을 뗀다. 이것이 계기가 돼 PLO는 아예 요르단을 접수하려 들었고 후세인 왕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우다, 1970년 검은 구월을 맞는다.

 

키부츠 기노사르에 세워진 이갈 알론 박물관은 이스라엘 유물청의 야심작 '산헤드린 트레일'의 시작점이다.  막달라 마리아의 고향 마지달(믹달, 막달라) 회당에서 발견된 메노라 돌이 키부츠 기노사르에 영구 보관될 예정이다. 바티칸이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1978년 이후 이스라엘의 고고학 유물의 해외 유출은 법적으로 금지다. 그러하다. 

 

주후 70년 예루살렘에서 추방된 산헤드린은 야브네를 거쳐 우사와 슈파림, 베트 샤아림, 찌포리를 돌아 티베리야스까지 10번의 이동을 감행한다. 그 와중에 주후 200년 찌포리에서 미쉬나가, 주후 450년 티베리야스에서 예루살렘 탈무드가 완성된 것이다. 이 여정은 공교롭게도 예수님의 사역 루트와 비슷하다. 기독교에서는 Jesus Trail을, 유대교에서는 Sanhedrin Trail을 만든 셈이다. 많은 유대인 청소년들의 교육 활동도 기노사르를 출발점으로 한 산헤드린 트레일에 집중된다.

 

1986년 큰 가뭄으로 킨네렛 수위가 낮아지면서, 기노사르와 마지달 사이 바다에서 고깃배 잔해가 발견되었다. 주후 1세기 배로 여겨진다. 

Carbon 14 테스트를 통해 산출된 유기물은 물론, 함께 발견된 오일 램프, 냄비, 화살촉 등이 2차 성전시대 유물임을 입증한다. 또 마지달에서 발견된 주후 1세기 고깃배 모자이크와도 비슷하다. 많은 기독교인이 예수님 시대의 고깃배라고 믿고 이곳으로 직행한다. 예수님 시대보다 조금 늦은 유대인 봉기 때 마지달 저항군이 사용한 배일 가능성도 있다. 

 

이갈 알론과 아내 룻 알론의 무덤이다. 이름대로 큰 알론 한 그루가 서 있다. 

 

I own no property, I have no wealth, my greatest asset is my friends. 무덤에서 이갈 알론이 한 말의 진가를 느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