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애굽기의 히브리어 제목은 쉐모트, 이름들이다. 애굽으로 내려간 야곱의 자녀 이름이 먼저 나오기 때문이다. 하프타라는 이사야 27-29장이다. 야곱 족속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마음이 혼미하던 자들도 총명하게 될 것이다.
1알리야: 출 1:1–17
야곱과 함께 애굽으로 내려간 아들들 명단에서 비냐민의 위치가 의미심장하다. 여종들이 낳은 자식들을 앞서기 때문이다. 서출의 개념이 없는 민족이 요세프와 비냐민의 지위를 공고히 한 것은 그럴 만한 정치적 계기가 있기 때문이다. 요세프의 자손은 북이스라엘의 중심 세력이고, 비냐민은 연합 왕조의 첫 왕을 배출했다.
시간은 흐르고 애굽의 바로가 바뀐다. 고생을 시키면 이스라엘 자손의 숫자가 줄까 싶어 비돔과 라암셋을 건설하게 한다. 노동 강도도 엄중해졌다. 이스라엘 자손은 흙을 이겨 벽돌을 굽고 농사를 짓는 괴로운 생활을 이어갔다. 그래도 숫자가 여전하자 바로는 유아 살해를 획책한다. 히브리 산파를 섭외해 히브리 아들을 죽이게 한 것이다. 하지만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해 바로의 명령을 어긴다.
시프라와 푸아라는 이름은 무슨 뜻일까? 산파가 둘이어야 하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바로는 해산을 도울 때 자리를 살피라고 하는데, '자리'에 해당하는 히브리어가 오브나임이다. 예레미야에 등장하는 토기장이의 돌림판이다. 아마도 애굽은 출산과정에 이런 돌림판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시프라의 어근은 개선시키는 것이다. 산통 속에서 산모를 격려해 출산을 완료하도록 돕는 역할이다. 푸아의 어근은 울음을 터트리는 것이다. 탄생 순간에 필요한 역할을 대변하는 이름이다. 애초에 출산을 위해 존재하는 이름들인 만큼 이들이 유아 살해에 동조할 리가 없다.
2알리야: 출 1:18–2:10
바로가 산파들을 불러 왜 이스라엘 아들들이 살아 있냐고 따진다. 산파들은 히브리 여인이 건강해서 해산이 빠르다고 둘러댄다. 바로는 이번에는 모든 백성(!)에게 아들을 낳으면 나일 강에 던지게 한다. 이스라엘 자손 입장에서 기술된 만큼 '모든 백성'은 이스라엘 자손을 가리킨다.
레위 집안에 한 아들이 태어난다. 그 아들은 잘 생겼다(כִּי-טוֹב)! 보기에 좋았다. 창세기의 천지창조에서 하나님이 피조물을 향해 하신 말씀이다. 사실 하나님에게서 창조의 능력을 받은 생명의 어미(하와)들에게 자기 자식이 보기 좋지 않을 리 없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낳은 자식을 버리는 것은 실로 무서운 범죄이다. 아들의 어머니는 잘생긴 아들을 3개월이나 숨긴다. 더는 숨길 수 없게 되자 갈대 상자, 테밧 고메(תֵּבַת גֹּמֶא)를 장만한다. 테바는 노아의 방주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생명을 살리는 공간이다. 바로의 딸이 이 갈대 상자를 나일 강에서 건지고, 영특한 이 집의 딸은 달려가 유모를 알선한다. 아이의 이름은 모세가 된다. MaSha, 건지다라는 뜻이다.
모세의 탄생 이야기에서 대부분의 주어들이 여성이라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대목이다.
3알리야: 출 2:11–25
장성한 모세는 살인을 저지른다. 그가 한 행동은 동포를 위한 것이었지만 그의 동포는 그를 인정하지 않았다. 모세는 바로를 피해 미디안으로 망명한다. 우물가에서 미디안 제사장 르우엘의 딸들을 돕는다. 르우엘은 모세를 집으로 들이고, 모세는 르우엘의 딸 찌포라와 결혼해 게르솜을 낳는다. 한 개인에게 거친 운명이 닥치거나 말거나 무심한 세월이 흐르는 가운데, 하나님은 야곱에게 세운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자손을 기억하신다.
4알리야: 출 3:1–15
모세의 장인 이름이 이번에는 이드로다. 어쨌든 그의 양떼를 이끌고 호렙 산에 간 모세는 떨기나무를 발견한다. 그 떨기나무는 불이 붙었지만(הַסְּנֶה בֹּעֵר בָּאֵשׁ) 타지 않는다. 모세가 다가가자 여호와는 거룩한 땅에서 신을 벗으라 명하신다. 그리고 모세를 바로에게 보내 이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해 젖과 꿀이 흐르는 땅(אֶרֶץ זָבַת חָלָב וּדְבָשׁ)으로 데려가신다고 말씀하신다.
모세는 차분하다. "내가 뭔데요?"
하나님은 답하신다. "너는 내가 함께 하는 자이다."
모세는 반론한다. "당신은 뭔데요?"
하나님은 다시 답하신다. אֶהְיֶה אֲשֶׁר אֶהְיֶה 이 표현을 헬라어로 옮기면 예수님의 자기 선언, 에고 에이미가 된다 (Ἐγώ εἰμι ὁ ὤν). 스스로 있는 자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낸 것이다.
5알리야: 출 3:16–4:17
하나님의 메뉴얼은 정교했다. 일단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바로에게는 제사를 위해 사흘 길을 가겠다 청하는데, 바로는 쉽게 허락하진 않겠지만 내가 강한 손으로 칠 것이며, 그럼 너희는 은혜를 입어 빈손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모세는 다시 항변한다. "그걸 믿겠어요?"
여호와는 모세의 지팡이를 이적의 도구로 만들어 주신다. 땅에 던지면 뱀이 되고, 꼬리를 잡으면 다시 지팡이가 된다. 또 손을 품에 넣었다 빼면 나병이 생기고 다시 넣었다 빼면 멀쩡해진다. 이 두 개의 표징(הָאֹת)이 하나님이 모세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될 것이다. 그래도 안 믿으면 나일 강물을 떠다가 땅에 부으라고 하신다. 강물이 땅에서 피가 될 것이다.
모세는 만만치 않은 인물이다. 40년의 도피 생활이 그를 완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저는 말주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시 설득하신다. "내가 할 말을 가르쳐주마."
"아니오! 그럴 싸한 사람을 다시 골라 보세요."(שְׁלַח-נָא, בְּיַד-תִּשְׁלָח)
드디어 여호와께서 분노하신다. "네 형을 붙여주마!"
왜, 모세는 이렇게 지리한 공방을 해야 했을까. 유대교는 자신들의 랍비 모세가 하나님과 이렇게 긴 논쟁을 했다는 데서 무엇을 느끼는 걸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쉽게 확신하는 자들은 모세가 스스로를 검증해낸 과정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모세조차 이렇게 치열했다.
6알리야: 출 4:18–31
갑분 딴 얘기가 나온다. 모세가 그만 돌아가 형제들의 생사를 확인해야 한다고 느꼈고, 여호와가 애굽으로 가도 좋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아무튼 모세는 아내와 아들들과 함께 길을 떠난다. 출 2장에서 장자 게르솜의 이름은 소개됐고 출 18장에서 또 다른 아들은 엘리에제르로 소개된다.
Pietro Perugino, "애굽을 향해 떠나는 모세"
애굽으로 가는 여정에 이상한 이야기가 나온다. 모세가 호텔에 있는데 여호와가 모세를 죽이려 하셨고, 이에 찌포라가 돌칼로 아들의 포피를 베어 그의 발에 댄 것이다. 그리고 모세가 자신에게 피남편(חֲתַן-דָּמִים)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여호와가 모세를 놓아주신다.
그 전에 여호와가 이스라엘이 장자라고 지칭하시는 것으로 보아, 찌포라가 할례를 행한 아들은 게르솜일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 본문은, 모세가 아들의 할례 의식을 소홀히 했고 이방 제사장의 딸이지만 찌포라가 이를 눈치채고 신속히 반응했다고 해석한다. 탈무드는 할례를 서두르지 않으면 죽을 수도 있다는 엄포를 놓기도 한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납득이 안 된다. 일단 히브리어 인칭대명사가 매우 헷갈린다. 문맥상 아들의 포피를 모세의 발에 댔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데, 히브리어에서 '발'은 '성기'를 은유한다. 또 피남편이 대체 무슨 뜻인지도 아리송하다. 많은 현대 해석은 이 이야기에서 고대 신화를 유추한다. 특히 여성의 잠재의식 속에 남편과 큰아들의 연결성이 인칭대명사의 모호성으로 드러났다고 본다.
7알리야: 출 5:1–6:1
모세와 아론이 바로 앞에 선다. 그들의 요구는 바로의 반발만 샀고 오히려 이스라엘 백성의 노역을 더 무겁게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짚을 주지 않고 벽돌을 바치게 한 것이다. 원인이 모세와 아론이라는 걸 알게 된 백성은 모세와 아론을 원망한다. 모세가 여호와께 한탄하자, 여호와는 이제 강한 손을 사용하시겠다고, 두고 보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뭐라도 할 줄은 알았겠지만,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들에 모세는 놀랐을까. 파라샤 쉐모트를 모세 입장에서 읽다 보면 그의 피로감이 크게 다가온다. 몰아가시는 여호와와 막무가내인 백성 사이에서 눈물을 삼키는 모세가 떠오른달까. 출애굽기는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이야기지만, 이 역사는 모세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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