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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 백합화

전쟁통에 산과 들로 놀러다니는 인구가 현격히 줄어서인가. 갈멜 산에 백합화 루트가 새롭게 선보였다. 지명으로 나할 켈라흐, 하이파 대학교 근처다. 범죄율이 비교적 높은 지역이라 안 좋은 사건 사고로 익숙한 지명이다. 갈멜 산에서 백합화 개체가 많이 발견된다는 사실은, 이곳이 십자군에게 중요한 장소였음을 상기시킨다.  

 

백합화는 현대 히브리어로 하쇼샨 하짜호르השושן הצחור, 하얗고 순결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쇼샨은 쉐쉬(6)과 관련돼 있다. 꽃잎이 6개인 꽃이라는 뜻이다. 6꽃잎의 대표가 lily 아닌가. 산상수훈에는 아무 수고도 길쌈도 안 하는 꽃이 등장하는데, 헬라어로 크리논이다. 이 단어가 lily가 아닌 다른 꽃을 가리킬 필요가 있나? 카톨릭 전통은 이를 '마돈나 릴리'로 못 박고 마리아 수태고지 관련 성화마다 등장한다.

 

성경에서 꽃밭은 아가서다. 고대 이스라엘 땅에서 발견되는 대표 꽃들이 들어 있다. 그 유명한 the rose of Sharon도 여기 등장한다. 히브리어로 하바쩰렛 하샤론חבצלת השרון이 LXX 헬라어로 크리논이다(우리나라에서만 이 꽃이 무궁화라는 견해가 있다). 예수님이 주목하신 꽃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잘 매칭된다. 왜 릴리로 결론나지 않는 걸까. 크리논이 릴리가 아닐 거라는 추정은 갈릴리 바닷가 근처 생태학적 연구와 관련돼 있다. 여긴 너무 더운 곳이다. 릴리가, 예수님과 군중들 눈에 흔연히 띄는, 이야깃거리로 될 만한 흔한 지역이 아니다. 

 

문맥도 문제다. 산상수훈에서 크리논과 비교 대상이 '솔로몬의 옷'이다. 부귀영화를 최고로 누린 왕의 의복은 자주색이다. 자주빛을 뽑아내는 것 자체가 최고의 사치이기도 했다.

 

 

옷단 귀 술의 청색 끈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색깔로 신분을 드러냈다. 보라색은 왕의 색깔이다. 왜 보라색이 고귀했을까? 아니 애초에 색깔을 어떻게 식별했을까? 사무엘이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는 다윗. 두라 유로

jy4kids.tistory.com

 

자주 빛을 띈 꽃이라면 아네모네가 대표적이다. 히브리어로 칼라니트כלנית. 예수님과 관련된 사물은 대개 십자가 사건으로 더 큰 임팩트를 갖게 되는데, 꽃잎이 피처럼 붉은 아네모네도 그중 하나다. 십자가 아래에서 그분의 피로 빨간 꽃이 됐다는 전설이 태동한다. 얼마나 흔했으면 십자가 밑에도 있었겠나. 붉고 흔한 꽃, 아네모네가 산상수훈의 크리논에 더 적합하지 않나.   

 

성서 식물학은 여전히 전설의 영역 속에 있다. 검증하기가 어려우니까. 하지만 언어를 쉽게 포기해서는 안 된다. 헬라어가 크리논, 릴리로 옮겼다면 그럴 만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땅에서 크리논은 지금까지 멸종 위기에 있다. 중세 시대 십자군이 크리논의 구근을 대량으로 파가서 성지 특산물로 유럽에 판매했기 때문이다. 프랑스는 백합화를 fleur de lis라고 부르는데, 부르봉 왕가를 비롯한 여러 가문 문장으로 사용된 바로 그 백합 문양이다(그쪽에서 주장하는 기원은 다를 거다). 십자군 활동은 종교적 열심만큼이나 경제적 동기도 여실한 캠페인이었다. 현재 이스라엘 땅의 야생 릴리는 유럽에서 재배되다가 돌아온 종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고 오리지널과 많이 다를까? 이곳 풍토에서 살아남았다면, 여기 적합한 형태로 돌아온 게 아닐까.

 

13살 프랑스 루이 8세 aka. 잉글랜드 사자왕 리처드와 12살 카스티야 블랑카의 결혼식 

 

최근 갈멜 산 자연공원 당국은 멸종 위기에 있는 백합화의 개체수를 추정하는 조사를 실시했다. 쇼샨, 백합화가 피려면 구근이 직사광선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갈멜 산은 소나무 등 키 큰 침엽수가 빽빽하게 조성된 숲이다. 당국은 갈멜 숲의 밀집도를 줄여서, 백합의 개화를 증가시키길 기대하고 있다.

 

시오니즘의 핵심이 자연과 노래다 보니, 이스라엘 땅의 희귀한 꽃들은 대개 노래로 불린다. 백합화를 대변하는 노래는 עטור מצחך 그대의 이마를 장식한 (꽃)이다.  

 

 

 

아릭 아인슈타인은 저 외모를 하고도, 지저분한 사건사고가 하나도 없다. 저 시절 이스라엘에서 가수는 단순한 연예인이 아니기도 했다. 시대가 바뀌어서 여기도 더는 저런 인물이 안 나온다. 요즘 샤밧에 KAN 방송의 김멜 라디오를 듣는데, 저 시절 노래들만 나오기 때문이다. 7-80년대 요니 레흐터가 작곡한 노래면 어지간하면 명곡 반열이다. 

 

 

요니 레흐터가 1977년 새로 발표한 앨범은 시인이자 배우 아브라함 할피의 시들을 담고 있다. 아릭 아인슈타인에게 부르게 했는데, 그중에 그야말로 대박을 친 곡이 "그대의 이마를 장식한"이다. 시인으로서 아브라함 할피는 내 관심사에서는 멀었다. 열정이 보통 이상인 분인 건 알겠는데, 1950년대 이스라엘에서 남녀 간의 열렬한 사랑 타령이 가당키는한가. 어쩌다 '네쿠다'라는 시를 알게 됐다. '점'이란 뜻이다. 자신이 줄고 줄어 마침내 점이 되어, 그대와 함께 있겠다는 내용이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는데, 정확히 뭐가 내 속을 건들였는지는 모르겠다. 그래서 각잡고 아브라함 할피의 사랑 노래를 파게 됐다. 사랑은 참, 그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게 조롱받기 쉬운 딱한 감정이다.

 

2011년 자하바 베를린스키가 사망한다. 배우 제에브 베를린스키의 부인이다. 90세 가까운 향년이었는데, 사망하면서 묘비에 아브라함 할피의 시 "아투르 마쩨헤흐"를 새겨 달라고 했단다. 할피는 자신의 사랑이 누구인지 비밀에 부쳤지만, 어딘지 남의 아내 같은 뉘앙스는 충분했다. 613개 율법을 지켜야 하는 유대인이 10계명 중 하나를 대놓고 어긴다고 놀라진 않았다. 내가 놀란 건 그 비밀이, 이 좁은 나라에서 어떻게 안 새어나갔는가 쪽이다. 노래에는 사랑하는 이의 외모가 비교적 상세히 묘사되는데 바로 검은 머리라는 것이다. 백합화야 흰색이 보편적이지만, 늘씬한 줄기 위에 얹혀 있는 봉오리는 사랑하는 이의 늘씬한 자태를 묘사하는 데 더할 나위 없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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