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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할 켈라흐, 갈멜 산

도저히 못 참겠다 싶을 때는 산에 간다. 해발 800미터밖에 안 되는 언덕배기들이지만 일단 올라가면 보람이 있다. 라그 바오메르 즈음에는 메론 산에 가곤 한다. 랍비 시몬 바르 요하이 기일이라 거대한 인구가 쯔팟과 메론으로 결집한다. 그런데 요즘 쯔팟에 공습이 울리고 있다. 기도 안 찬다. 크지도 않은 나라에서 북쪽과 남쪽 일부에 접근이 불가능하다는 건, 끓어오르는 냄비 속 개구리처럼,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이 서서히 미쳐간다는 뜻이다.

 

하이파 대학에 갔다가 주저앉아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학교 주위로 이어진 계곡이 나할 갈림גלים인데, 파도 타는 것처럼 갈멜의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밀려온다. 나할 갈림 남쪽으로 이어지는 계곡이 나할 켈라흐כלח이다. 창세기 10장에 시날 땅 갈레가 나오는데 이 단어가 כלח다. 고고학에서는 님로드의 지명 중 하나로 이해한다. 대체 왜 이런 이름이 갈멜 산 계곡에 붙었을까. 켈라흐는 욥기에서 우리말 '기력'으로 옮긴 단어다. 자연의 이치대로 육체에 담긴 연령쯤 된다. 욥기에서는 무덤에 가까이 가는 나이의 상태를 가리킨다(욥 5:26, 30:2). 이스라엘 땅에서 울창하기로 손꼽히는 갈멜 산에서 인생 패기와 쇄잔함의 이치를 깨달으라는 것인가. 비슷한 자음의 קלח는 옥수수 먹고 난 옥수수대를 가리킨다. 나할 켈라흐의 어원을 두고 옥수수대 논쟁을 제기했지만 아무도 내 의견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러하다. 

 

트래킹 입구는 슈베찌아 크타나, 작은 스위스다. 패기는 그럴 듯하다. 스위스에 비하면 매우 사소하지만 그나마 이스라엘에서는 희귀한 풍경이긴 하다. 오르막과 내리막이 거의 없는 평지를 그저 걷는다.  

 

와디 켈라흐의 명물은 저 라임스톤 계곡이다. 갈멜 산에서 발견되는 라임스톤은 이곳이 머나먼 옛날, 200만 년쯤 전에 바닷속이었음을 증명한다. 그러면 아, 노아의 홍수 말인가요, 묻는 사람이 꼭 있다. 요즘 사람들이 너무 지질학을 모른다. 이스라엘 땅은 현재의 사해가 요단 강으로 이어진 하나의 섬이었을 때, 지각의 융기가 일어나 지층이 갈라지면서 지중해 바닷물이 침입했다. 그 시작 지점이 손가락처럼 튀어나온 두 개의 만을 이루었고 하이파와 갈멜 산을 형성했다. 이 지질학적 지식이 하나님 말씀으로 땅이 만들어졌다는 믿음과 왜 상충하는지 모르겠다.   

 

갈멜 산은 매년 5월이 되면 이스라엘 토종 백합화(쇼샨 짜호르)가 핀다. 자연보호기관에서는 이들 백합화를 보호하기 위해, 나할 켈라흐에 백합화의 길을 조성했다. 한시간이면 왔다갔다 끝나는 짧은 길이다. 이 꽃을 보려는 사람들로 너무 붐빈다. 다행히 백합화는 사람의 발걸음이 닿지 않는 높은 꼭대기나 비탈길에서 핀다. 

올해는 유난히 더워서 5월 중순인데도, 이미 꽃을 찾기가 어려웠다.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아서, 혹시 보셨어요? 다른 여행자들한테 물어보고 안내를 받았다. 모두 세 송이를 찾았는데 하나같이 아직 살아있는 이유가 납득 가는 위치에 있었다. 줌으로 엄청 당겨 찍으니 마치 그림처럼 나왔다.  

가성비는 떨어지는 꽃이라 줄기 하나에 달랑 꽃 한 송이만 핀다. 갈멜 산이 바다 옆이라 바람이 불면 꽤 세다. 한여름이라도 소나무 숲 아래로 들어가면 제법 선선한데, 거기서 칼바람을 맞으며 머리를 치켜세운 채 서 있는이 꽃들이 대단하다. 아네모네나 시클라멘과는 또 다른 고고함이다. 십자군들이 야훼 유일신앙의 격전지 갈멜 산에서 발견한 이 꽃에 반해, 다 뽑아간 이유가 납득이 간다. 십자군은 이 꽃을 갖고가 프랑스어로 fleur de lis라고 명명했다. 아휴, 그건 전설의 고향이네, 유럽 토종이 따로 있네, 반박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다. 아무튼 이스라엘 땅에서는 십자군 상징도 다 fleur de lis다.   

 

이름하여, 마돈나 릴리. 요즘 이스라엘 화훼 산업에서 각광받는 품목이다. 가톨릭 신앙에서는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을 때 가브리엘 천사가 이 꽃을 들고 왔다고 한다. 피렌체 우피치에 있는 다빈치의 수태고지에 있다. 그래서 나는 산마르코 박물관 Fra Angelico의 Annunciation을 굳이 보고 싶었다. 비슷한 시기, 비슷한 장소에서 같은 주제로 그림을 그렸는데, 왜 다를까. 

 

또 하나의 초여름 꽃, 로템. 맹렬한 햇빛에 질려서 주름진 꽃이다. 우리말은 할미꽃인가? 이건 (을)로템לוטם이고, 사막의 관목 로템 나무는 רותם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못하는 발음 중 하나다. 

 

와디 켈라흐를 걷는 내내 멀리 보이는 하이파 대학교 본부 건물. 센 바람 불면 저 건물 흔들리는 게 보인다. 렌즈에 뭐가 끼었나 싶어 여러 번 닦았는데, 이게 산업도시 하이파의 대기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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