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나의 목표는 그리스어의 진보인데, 경솔하게도 지인에게 그 얘기를 했다. 전쟁통에 자신을 채찍질하는 내가 갸륵했는지, 지인이 선물을 주었다. 콘스탄티누스 카바피스의 마스터피스였다. 읽다가 깜짝 놀랐다. 그동안 내가 이스라엘 사람들 틈에서 못 알아들었던 내용은 거의 다 이 시에 들어 있는 듯했다. 이스라엘 학자들이 20세기 초 그리스 시인을 사랑하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카바피스는 1863년 오토만이 다스리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헬레니즘의 정수를 지닌 땅이라고 해야겠지. 그리스정교회에서 세례를 받은, 비잔틴 문명의 적통자이다. 아버지가 영국에서 장사를 했었던 인연으로 런던과 리버풀에서 산 적이 있는데, 근대시의 문법을 익히는 데 더할 나위 없는 곳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도 프랑스에도 살았지만 그의 사상이 무르익은 곳은 역시 알렉산드리아이다. 그의 헬레니즘 혈통이 저널리즘을 만나 시로 탄생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그는 동성애자였다.
그의 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내 탓이지만, 그의 그리스어는 내가 아는 그 언어가 아니다. 요람 브로노브스키가 번역한 히브리어 번역을 구했다. 어차피 나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헬레니즘 시인을 읽는 방식이 궁금했던 거니까. 브로노브스키는 이름이 말해 주는 대로 폴란드 출신이다. 하아레츠의 편집위원을 지낸 최고의 지성인이다. 이제 이스라엘도 지성인이라는 단어가 주는 희열을 더는 모르는 것 같지만.
시를 읽는 가장 좋은 방법은 암기하는 것이다. 카바피스는 흥미롭게도 그의 시에서 이스라엘 역사 인물들 역시 다뤘는데, 하스모니안 왕가의 괴물 알렉산더 야나이와 유일한 여왕 슐롬찌온에 대해 이렇게 썼다.
Αλέξανδρος Iανναίος, και Aλεξάνδρα
Επιτυχείς και πλήρως ικανοποιημένοι,
ο βασιλεύς Aλέξανδρος Ιανναίος,
κ’ η σύζυγός του η βασίλισσα Aλεξάνδρα
περνούν με προπορευομένην μουσικήν
και με παντοίαν μεγαλοπρέπειαν και χλιδήν,
περνούν απ’ τες οδούς της Ιερουσαλήμ.
Ετελεσφόρησε λαμπρώς το έργον
που άρχισαν ο μέγας Ιούδας Μακκαβαίος
κ’ οι τέσσαρες περιώνυμοι αδελφοί του·
και που μετά ανενδότως συνεχίσθη εν μέσω
πολλών κινδύνων και πολλών δυσχερειών.
Τώρα δεν έμεινε τίποτε το ανοίκειον.
Έπαυσε κάθε υποταγή στους αλαζόνας
μονάρχας της Aντιοχείας. Ιδού
ο βασιλεύς Aλέξανδρος Ιανναίος,
κ’ η σύζυγός του η βασίλισσα Aλεξάνδρα
καθ’ όλα ίσοι προς τους Σελευκίδας. in all respects equal to the Seleucids.
Ιουδαίοι καλοί, Ιουδαίοι αγνοί, Ιουδαίοι πιστοί —προ πάντων. good Jews, pure Jews, faithful Jews—above all.
Aλλά, καθώς που το απαιτούν η περιστάσεις,
και της ελληνικής λαλιάς ειδήμονες· and experts in the Greek language;
και μ’ Έλληνας και μ’ ελληνίζοντας
μονάρχας σχετισμένοι— πλην σαν ίσοι, και ν’ ακούεται.
Τωόντι ετελεσφόρησε λαμπρώς,
ετελεσφόρησε περιφανώς
το έργον που άρχισαν ο μέγας Ιούδας Μακκαβαίος
κ’ οι τέσσαρες περιώνυμοι αδελφοί του.
카바피스는 154편의 시를 작품집이 아닌 잡지나 신문에 연재했는데, 그래서 이 시가 어떤 맥락에서 나왔는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정교회 신자니 마카베오서를 알았을 것이다. 알렉산더 야나이는 왕인 동시에 제사장이었다. 유대인에게 왕은 유다 지파의 후손, 나씨נשיא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이 두 직을 겸하는 걸 반대했다. 그래서 그들을 십자가에 매달아 버렸다. 그의 잔혹함은 헬레니즘에 동화됐음을 입증한다. 위대한 유다 마카비가 시작한 일을 마침내 성취했다니, 이 정도면 고도로 까내리는 내용 아닌가.ㅋ
알렉산더 야나이 시대의 주화. 앞면은 cornucopia, 뒷면은 팔레오 히브리어 "יהונתן הכהן הגדֹל וחבר היהודים" 대제사장이나 유대인의 친구 요하난 (*히브리어로 형인 요하난 후르카누스와 이름이 같다. 요세푸스 책은 이들을 히브리어로 부르는데 얼마나 헷갈리는지.) 하스모니아 왕가가 주화를 발행하고 그 동전에 새겨진 최초의 이름은 후르카누스나 알렉산더가 아니라 "안티오쿠스"다.ㅋ 안티오쿠스 7세를 말한다.
하스모니아의 마지막 적통자 마타테후 안티고누스의 주화에는 한면은 일곱 촛대 메노라가, 뒷면에는 진설병 상이 새겨져 있다. 현대 이스라엘 국가의 10아고로트에 그 메노라가 반영됐다.
1988년 12월 13일 UN은 뉴욕이 아닌 제네바에서 총회를 열었다. 야세르 아라파트가 11월 15일 팔레스타인 국가 성립을 했기 때문에, UN에서 연설하려고 했는데 미국이 비토했기 때문이다. 1975년 olive branch address에 이어 한결 성숙해진 연설이다. 이 자리에서 아라파트는 1947년 UN 분리안대로 팔레스타인 국가를 인정해 달라고 요청한다. 테러를 포기했다고 선언하면서. 그래서 오슬로 협정으로 갈 수 있었다. 이때도 아라파트는 예의 독특한 카피예를 선보였는데 이스라엘의 지도 모양이다. 하기야 팔레스타인 지도는 그리기가 난감하긴 하다. 아라파트는 이스라엘과 에레츠이스라엘의 연관성을 부인하는 자기 주장을 철회한 적이 없는데, 유대교 성전은 엘악사와 상관이 없다는 게 대표적이다. 클린턴 대통령의 임기 마지막 데이비트 캠프가 결국 무산된 건 예루살렘 문제였는데 아라파트의 역사의식과 관련돼 있다. 지도에 특히 관심 많은 아라파트는 안티고누스의 메노라가 새겨진 10아고롯이 중동 지도를 형상화한다고 믿었다. 시오니스트들이 중동을 다 삼키려는 야욕을 담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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