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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sha

파라샤 바이슐라흐 (창 32:4-36:43)

야아콥의 두 번째 파라샤 바이슐라흐를 읽는다. 야아콥이 에사브에게 자기 종들을 "파송했다"로 본문이 시작된다. 하프타라는 에사브, 에돔과 관련된 오바댜서이다. 

 

1알리야 (창 32:4–13) 반드시 네게 은혜를 베풀어

나를 미워하는 자가 400명을 거느리고 달려온다면 어떤 기분이 들까. 야아콥은 심히 두렵고 답답했다יצר. 야짜르는 좁아진다는 의미이다. 속이 좁아지자 가진 것을 나눈다.ㅋ 심히 두렵고 답답한 차에 이런 생각은 어떻게 하게 된 걸까. 하나가 다쳐도 다른 하나는 피할 길을 만들려는 계산이었다. 야아콥의 경로에 의문이 든다. 에사브가 이렇게 무서울 것 같으면 에돔으로 오지 않으면 될 게 아닌가. 세일 산은 에레츠이스라엘의 남쪽이다. 결자해지를 위해 야아콥이 선택한 itinerary이다.

야야콥은 할 거 다 하고 그제서야 기도한다. 그래도 기도 자체는 훌륭했다. 

קָטֹנְתִּי מִכֹּל הַחֲסָדִים, וּמִכָּל-הָאֱמֶת, אֲשֶׁר עָשִׂיתָ, אֶת-עַבְדֶּךָ  כִּי בְמַקְלִי, עָבַרְתִּי אֶת-הַיַּרְדֵּן הַזֶּה, וְעַתָּה הָיִיתִי, לִשְׁנֵי מַחֲנוֹת הַצִּילֵנִי נָא 

카톤티, 당신이 종을 위해 행하신 헤세드와 에메트에 비해 내가 작았으니, 내 막대기만으로 이 요단을 건넜으나. 이제 두 떼로 변했나이다. 나를 구하소서.  

 

피아니스트 하레디 가수 요나탄 라젤이 멜로디를 썼지만 그의 목소리는 좋지 않다. 하레디가 고백하는 '카톤티'에 진정성이 부족하다고 해야 하나. 하나님의 헤세드와 에메트는 '인자와 진실'로 번역되지만 사실 하나의 단어이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다. 헤세드는 자식을 향한 부모의 사랑처럼 무한한 자비이고, 에메트는 거짓을 꿰뚫는 엄정함으로서 진실이다. 하나님은 무한한 자비와 엄정한 진실을 그 사랑의 양면으로 온전히 담고 계시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감당할 수 없다"는 고백은, 쉽게 살아온 인생의 목소리가 담기에는 분에 넘친다. 리브카 조하르는 1948년생이다. 젊을 때는 무려 나탄 알테르만(이스라엘의 대표 시인)이 그 목소리에 반해 노래를 써주었었다. 70이 넘은 그가 생의 마지막 기회인 것처럼 노래하기 시작했는데 코로나가 그것을 막았다. 

 

2알리야 (창 32:14–30) 얍복 나루에서

야아콥은 모든 소유와 가족을 앞서 보내고 얍복יבק 강에 홀로 남는다. 히브리어 보케크בקק는 비었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이 주신 것까지 포함한 풍성한 소유를 모두 건네 보내고 그는 아무것도 없이 혼자였다. 텅 빈 그곳에 하나님이 찾아오신다. 얍복은 현재 요르단의 Zarqa 강으로 본다. 그런데 사해 남쪽에 엔 보케크가 있어 혼돈을 준다. 사해에도 아랍어로 zara spring 푸른 샘이 있기 때문이다. 

야아콥과 씨름한 이는 끝내 이름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그분이 하나님이 아니면 누구겠는가. 나의 인내를 시험하며 끝없는 나락으로 이끄는 현재의 씨름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의 것이다. 대리인으로 세워진 사소한 것들은 비워야 한다. 얍복에 서야 한다. 그렇다. 야아콥은 하나님과 씨름했다אבק. 히브리어 아바크 자체가 상징적인 단어이다. 말씨름일 수도 있고, 레슬링일 수도 있고, 전투일 수도 있다. 야아콥을 이기지 못한 하나님은 야아콥의 이름을 이스라엘ישראל로 바꿔 주신다. 그가 하나님אל과 싸웠기שרה 때문이다. 히브리어 '싸라' 자체는 인내하고 버티는 것과 관련 있다. 야아콥의 싸움은 더 공격적인 무기를 얻거나 더 엄청난 지략을 동원해 한방으로 결판내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평생을 다해 참고 견디는 게 하나님과의 씨름이다. 인생은 그러한 것이다.  


3알리야(창 32:31–33:5) 에서를 만나다

이 장소의 이름은 브니엘 פְּנִיאֵל "하나님을 보았다"이다. 하나님이 야아콥의 둔부의 힘줄 צֹלֵעַ, עַל-יְרֵכוֹ 을 치셨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아직도 이걸 안 먹는단다. 이건 호기심인데 실제로 현대 유대인은 이 부위, 해부학적 용어로 thigh tendon을 먹지 않는다. 그걸 알아볼 수는 있나? 유대교 코셔에는 니쿠르, 즉 허락되지 않은 부위를 잘라내는 과정이 있다. 귀찮지 않을 리가 있나. 고기가 귀한 시절에는 칼같이 그 부분만 잘라냈지만 요즘은 둔부 전체를 버린다고 한다. 소를 옆에서가 아니라 뒤에서 바라봤을 때의 둔부를 말한다.   

33장 1절부터 새삼스레 다시 이야기가 시작된다. 어젯밤 미리 건너보낸 가족과 조우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모두 함께 에사브와 400명이 다가오는 것을 본다. 두 형제의 만남은 다소 수선스럽다. 먼저 야아콥은 아내와 자식들을 떼로 나누어 배치하고, 자신은 그 앞에서 일곱 번 땅에 절하며 가까이 간다. 에사브의 행동도 동사만으로 표현된다. 달려와, 끌어안고, 목을 떨어뜨리고, 입맞추고, 울었다. 흥비롭게도 1절과 5절에 각각 두 사람이 눈을 들어 본 것이 대비된다. 야아콥이 눈을 들어 본 것은 자신을 죽이러 오는 형과 그 용사들이었다. 에사브가 눈을 들어 본 것은 야아콥의 아내와 자식들이다. 400에 대비하면 열둘은 별게 아니지만, 에사브는 자신이 공격하면 야아콥이 대응할 능력이 있음을 확인한다.   


4알리야(창 33:6–20) 각각 제 길로 가다

야아콥은 에사브에게 뇌물을 안기고 핑계를 대고 함께 가지 않는다. 함께 가면 인질이 되기 때문이다. 에사브는 세일로, 야아콥은 숙콧סכות으로 간다. 숙콧은 유대교의 가을철 명절이기도 하지만 식물로 만드는 수카를 가리키기도 한다. 이때 수카는 구역을 나누는 일종의 파티션이다. 유목민에게 다양한 가축들을 파티션이 쳐져 있는 한 장소에 들일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훗날 이 지역은 야아콥의 아들들이 풀을 먹이는 장소가 된다.

18절에 다시 한번 새삼스런 요약이 나온다. 야아콥이 밧단아람에서 평안히שלם 세겜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참 운도 좋다. 무슨 수로 세겜까지 평안히 도착했을까. 

얍복 강을 건넌 야아콥 일행은 당대 유명한 길을 따라 왔다. 비아 마리스, Via Maris 해변길이라고 불리는 고대 통행로였다. 이집트에서 해안선을 따라 가자에 이른 다음 사마리아 지역에서 동쪽으로 꺾어 다마스커스까지 올라가는 길이다. 에레츠이스라엘은 비옥한 초생달 지역(Feritile Crescent)의 통로였던 것이다. 고대인 누구나 알고 있는 길이다.

왼쪽에 그리심, 오른쪽에 에발, 그 사이 골짜기가 세겜이다. 오늘날 도시가 확대되면서 골짜기 아래쪽까지 채워졌다. 고대길 비아 마리스는 그리심을 가로질러 골짜기로 들어오는 대신 그리심 뒤쪽으로 이어진 대로였다. 엄청난 재산을 이끌고 대이동을 해야 하는 야아콥이 보란듯이 이 길로 왔을까? 야아콥처럼 조심성 많은 사람이? 비아 마리스 도상에서 공격을 받지 않기 위해서 샛길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세겜 골짜기 옆에, 에발산 앞쪽으로 작은 마을이 있다. 아랍어로 쌀람סלם이다. 히브리어 שלם이다. 성지의 고고학은 아랍어로 보존된 지명이 중요한 단서가 된다. 야아콥이 평안히שלם 세겜에 이르렀다는 건, 대로를 피해 샛길을 택해, 즉 쌀람סלם을 거쳐 세겜으로 들어왔다는 뜻은 아닐까? 성지의 지형은 성경을 읽는 다양한 방법 중 하나이다.  

야아콥은 세겜에 장막을 치고 그 장막을 친 밭을 세겜의 아비 하몰에게서 산다. 훗날 이를 근거로 세겜 땅은 요셉 자손의 땅이 된다(수 24:32). 크씨타라는 돈의 단위가 나왔다. 욥기 말미에 하나님이 모든 것을 회복시키시자 친구들이 욥을 위로하며 건네준 게 크씨타다(욥 42:11). 야곱은 세겜에 제단을 쌓고 엘엘로헤이스라엘אֵל, אֱלֹהֵי יִשְׂרָאֵל 하나님,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 부른다. 그분은 기꺼이 우리 삶의 문제로 씨름해 주시는 분이다.  


5알리야(창 34:1–35:11): 나로 하여금 악취나게 하였다

세겜은 무도한 도시였다. 하나님을 모르는 가나안은 원래 그런 곳이다.

  • 본문에서 강간을 당한 디나의 고통에 좀 더 주의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있다. 아비는 침묵하고 형제들은 자신들의 망신살에만 분노하는 가운데 피해자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해는 간다. 세상은 이 문제에 너무나 얕은 인식을 갖고 있으니까. 아직도 기억나는데, 이 본문을 가지고 설교자가 강간당한 딸을 결혼시키면 될 일이지 왜 문제를 키우는지 모르겠다고 익살스럽게 말하자 회중이 와하고 웃어버리는 설교를 들은 적 있다. 20년도 전이니 이제 그런 수준은 아니겠지 기대한다.
  • 본문은 여성을 강간하는 범죄를 심도 깊게 들여다보려는 목적은 아니다. 본문의 히브리어 용어들은 코셔, 즉 정결법과 관련되어 있다. 야아콥은 가나안의 무도한 자들과 통혼하여 한 민족이 되는 삶을 강요받았다. 세겜의 범죄로 디나는 '타메' 즉 부정한 상태가 됐다. 하나님의 백성은 타호르,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는데, 야아콥의 딸이 타메, 부정해진 것이다. 정결법에서 타메는 전염성이 있다. 타메를 용인하게 되면 전 공동체가 함께 부정해진다. 디나는 그런 딜레마가 된 것이다.
  • 그러나 이 사건을 둘러싸고 여전히 고루한 채 머물러 있는 해석도 문제가 없지 않다. 다섯 번째 알리야에서 가장 두드러진 어휘는 take לקח와 giveנתן이다. 무려 아홉 번이나 나온다. 여성은 물건처럼 거래의 대상이었고, 여성을 주고받음으로 도시는 평화를 누렸다. 디나의 이름, דין은 심판이다. 이 사건의 주인공 이름이 '디나'라는 점은 인류 역사상 유구한 문화인 강간의 한 측면을 반영한다. 이 고통이 그녀 자신의 행위로부터 야기했다는 암시다. 디나가 무슨 일을 했는데? 소녀라면 마땅히 집에 있어야 하는데 밖으로 싸돌아 다녔으니 벌을 받은 것이다. 여전히 이런 생각 속에서 파생된 설교는 결론도 희한하다. 
  • 야곱의 아들들은 마찬가지로 무도한 방식으로 이를 돌파한다. 세겜과 하몰에게 할례를 조건으로 제시하고, 세겜의 온 남자들이 할례받고 고통하는 제3일째 시므온과 레위가 도시를 기습해 전부 죽여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그들의 재산과 여자도 노략한다. 야아콥은 이 행위를 "나로 하여금 이 땅의 주민에게 악취를 내게 했다" עֲכַרְתֶּם אֹתִי, לְהַבְאִישֵׁנִי בְּיֹשֵׁב הָאָרֶץ 고 말한다. 히브리어를 직역하면 "너희가 내게 트러블을 일으켰는데, 나를 이땅 주민들 속에서 악취나게 한 것이다"가 된다. 유대교 정결법에서 악취나는 음식은 확인할 것도 없이 버려야 한다. 아들들이 일으킨 트러블로 무도한 가나안 사람들 가운데 다름 아닌 야아콥이 악취를 풍기게  됐다באש. 히브리어 '바아쉬'는 타메를 능가하는 부정한 것이다. 백 크씨타를 주고 간신히 세겜 땅에 자리잡은 야아콥은 이 악취 때문에 땅을 포기하고 떠나야 한다. 땅은 악취를 용납하지 않고 토하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 하잘(랍비문학)이라고 인권 의식이 높을 이유는 없기 때문에 창 34장에 대한 랍비들의 해석은 충분히 한심하다. 26절 "디나를 세겜의 집에서 데려왔다"에 대한 몇몇 해석 중 왜 디나는 아직도 세겜의 집에 머물렀냐가 있다. 할례받지 못한 자와 재미보느라 그랬다는 해석이다. 토라와 탈무드의 진리만 공부해도 충분하다는 사람들은 이런 해석이 오롯이 진리로 전달되는 위험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말 그대로 유대교는 디나에 대한 이차 가해를 그들의 하잘로 계속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랍비들 속에서 여성에 대한 파격적인 태도를 보이셨으니, 여제자들이 목숨 걸고 예수님을 사랑한 것이다.      
  • 시므온과 레위는 항의한다. 우리 누이를 창녀같이 대우함이 옳으니이까. 피해자인데도 자기 동생을 '창녀'라 규정한다. 어쨌든 옳지 않다. 그래서 이 문제는 딜레마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타호르 정결한 삶을 사는 것은 언제나 딜레마에 부딪친다. 하나님의 백성은 그 딜레마에 대해 다르게 반응해야 한다.   
  • 딜레마의 해결책은 하나님밖에 없다. 하나님은 야아콥을 베트 엘, 하나님의 집으로 부르신다. 야아콥은 그 부르심에 응한다. 그분은 환난날에 그에게 응답하셨고 그의 길에 동행하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 삶의 불편함을 해소해 주는 해결사가 아니다. 우리의 제단은 오직 그분께만 바쳐져야 한다. 야곱은 베트 엘에 제단을 쌓고 과거 베트 엘의 하나님을 떠올린다אל בת-אל다. 과거는, 역사는, 우리를 하나님께 이끄는 동력이다. 이곳에서 야아콥의 어머니 리브카의 유모 드보라가 죽는다. 어머니의 유약한 아들이 드디어 그 영향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아닐까. 이곳은 알론바굿אַלּוֹן בָּכוּת이라 불린다.  

현재 유대인 정착촌 베트 엘 북쪽 Givat Hartis에 있는 Sheikh Abdallah의 무덤에는 큰 알론 한 그루가 있다. 알론, 상수리나무는 여러 종이 있는데, 이 나무는 알론 톨라, 즉 벌레가 있는 알론이다. 이 벌레가 숙주로 기생해 나무 자체가 약간 붉은 색으로 보인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오래된 상수리나무로 여겨지는데 약 700년생이라고 한다. 야아콥의 시대와는 거리가 멀지만, 성경 속 이야기를 체감하기에 좋은 소재이다. 아마도 이슬람 셰이크의 무덤이 이 나무를 좀 더 영험하게 만들었고, 그래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6알리야(창 35:12–36:19), 헤브론에 이르는 야아콥과 에사브의 족보

  • 하나님은 약속하신다.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준 땅은 야아콥의 것이 될 것이다. 야아콥은 베트 엘에서 다시 돌기둥מצבה를 세우고 기름을 붓는다. 
  • 에브랏אפרת 직전에 라헬은 해산하다가 죽는다. 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베노니בן אוני라고 한다. '내 힘의 아들'이 무슨 뜻인가 나를 소진시킨 아들이라는 뜻이다. 라쉬는 이를 בן צערי 내 유감의 아들이라고 해석했다. 야아콥은 이를 듣고 베냐민 בינמין이라 한다. 히브리어 발음은 비냐민, 유드가 두 개이다. 오른손의 아들이라고 해석하는데 이때 right는 방향으로 치면 남쪽이다. 성경은 앞쪽인 동쪽 카뎀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남쪽이라는 확고한 방향감각이 있는 책이다. 서쪽에 바다라는 움직일 수 없는 기준점이 있기 때문이다. 왜 남쪽의 아들인가. 야아콥의 자식들은 북쪽에 있는 밧단아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비냐민은 남쪽 에레츠이스라엘에서 태어난 아들이다. 알리야 한 유대인들은 이민한 이후 이 땅에서 낳은 아들에게 비냐민이라는 이름을 주었다. 비냐민 네탄야후도 그런 경우이다.
  • 라헬은 베들레헴 길에 장사된다. 현재 라헬 묘는 오토만 시대의 마캄을 개조한 것으로 점차 유대교 종교인 사이에 신성함을 획득한 것이다. 
  • 야아콥은 아버지 이츠하크가 있는 헤브론에 이른다. 이츠하크는 180세로 죽고 에사브와 야아콥이 막벨라에 장사한다. 
  • 톨도트 에사브, 에사브의 족보이다. 에사브 에돔은 세일 산에 거했다. 아다, 바스맛, 오홀리바마에게서 자손들이 태어난다. 에서의 장자 엘리바스가 첩 딤나에게서 아말렉을 낳는다. 아말렉은 이스라엘의 출애굽부터 철천지 원수가 되고, 에돔은 이스라엘 왕조가 망할 때 극적인 원수가 된다. 이래저래 악연이다.  

 
7알리야(창 36:20–43) 에돔의 족장들

세일에서 태어난 자손들과, 에돔의 왕들이 소개된다. 

 

창세기에서만 해도 이츠하크의 아들로 또 하나의 민족과 국가를 이루리라 축복을 받았던 에사브는 소선지서 오바댜서에서 완전히 다른 분위기로 등장한다. 네 형제 야곱에게 포학을 향했으니 부끄러움을 당하고 멸절한다는 것이다. 말라기에서는하나님이 야아콥은 사랑하시고 에사브는 미워하셨다고 말씀하신다. 구원받은 자들이 시온 산에 올라와 에서의 산을 심판하는 것이 여호와의 뜻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