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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asha

파라샤 바예셰브 (창 37-40)

요세프의 첫 번째 파라샤다. 드디어 야아콥이 아비의 집 헤브론에 '정착했다'로 시작되는 파라샤다. 평생 속고 속이며 살아온 야아콥이 아들들에게 속는다는 점에서 사필귀정이기도 하고, 새로운 구원사를 예비한다는 점에서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이야기기도 하다.
하프타라가 좀 뜻밖인데 아모스 2-3장이다. 이스라엘에 벌을 내리신 이유를 다룬 본문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젊은 여인에게 다녀서' 하나님의 거룩한 이름을 더럽혔다는 내용이 나온다. 유다의 행위는 달리 변명의 여지가 없다. 또 그런 유다 자손들의 나라와 갈라선 이스라엘 나라가 뜻이 같지 않아 동행할 수 없음에 대해 고발하기도 한다.

요셉의 내러티브는 대단히 정교한 문학 장치를 갖고 있다. 요셉은 계속 장소를 이동하는데 아버지의 집(37장), 보디발의 집(39-40장), 감옥(40-41장), 바로의 왕궁(41-50장)이다. 각 장소에서 요셉은 권위자 아래에서 각기 다른 신분으로 있게 되는데 아버지 야아콥, 보디발, 간수장, 바로이다. 각 사건마다 등장하는 일종의 소품이 옷이다. 아버지 야아콥이 준 채색옷에서, 보디발의 아내가 벗기는 옷, 바로 앞에 나가기 위해 갈아 입는 옷, 바로의 2인자로 임명될 때 입는 세마포 옷이다.

1알리야 (창 37:1–11) 톨도트 야아콥
야아콥의 족보다. 열두 아들 가운데 하나가 편애를 받아 왕따가 된다. 요세프는 벤 즈쿠님, 즉 야아곱이 노년에 낳은 아들이었다. 아버지의 사랑은 특별한 옷כתונת פסים으로 증명된다. 왜 이게 우리말은 '채색'이 됐는지 모를 일이다. 파심은 줄무늬다. 나치가 유대인을 수용소에 가두고 입힌 그 옷이 파심이다. 요세프는 꿈을 꾸었는데, 첫째 꿈은 열한 개의 곡식단אלומים이 자신의 알룸에 절하는 것이었다. 둘째 꿈은 해와 달과 열한 별이 '자신'에게 절하는 것이었다. 요세프는 이 꿈들이 자신의 미래에 대한 것임을 알았다. 요셉이 지각이 없어서 꿈을 떠벌렸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그의 꿈은 예언적이다. 하프타라인 아모스서에 따르면 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는데 예언하지 않을 수 있는 사람은 없다.  

2알리야 (창 37:12–22) 구덩이에 던져진 요세프

야아콥의 아들들이 세겜에서 양을 치고 있었다. 요세프는 헤브론 골짜기에서 세겜까지 형들을 찾아간다. 세겜 어딘가에서 '어떤 사람'이 나타나 형들이 도단으로 갔다고 알려준다. 형들은 가까이 오는 요세프를 보고 '꿈꾸는 자가 온다'בַּעַל הַחֲלֹמוֹת הַלָּזֶה בָּא고 말한다. 형들은 요세프가 예언한 두 번의 꿈을 충분히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꿈이 어떻게 되는지 보려고 그를 죽일 작정을 한다. 르우벤이 이를 만류하며 요세프를 '구덩이'에 던진다. 기회를 보아 요세프를 구출해 아버지에게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3알리야 (창 37:23–36) 노예로 팔리는 요세프
요세프의 내러티브에는 요세프를 살리려는 형이 르우벤인 경우와 유다인 경우가 서로 교묘히 얽혀 있다. 르우벤일 때는 미디안 사람들이 나타나고, 유다일 때는 이스마엘 사람들이 나타난다. 르우벤은 요세프를 구덩이에 가둬두었다가 구출해 아버지에게 보낼 셈이었고 유다는 죽이는 대신 노예로 팔자고 제안했다. 후반부에서 요세프의 가족들을 고센 땅에 정착시키는 게 바로인지 요세프인지로도 갈린다.
형제들은 요세프의 옷에 숫염소의 피를 묻혀 야아콥에게 보인다. 야아콥은 애곡했지만 요세프는 살아서 바로의 사리스 포티파르에게 팔린다. 사리스는 바로의 최측근으로 eunuch이다. 사리스 중에 최고 신분이 랍사리스, 랍사게이다. 훗날 요세프 역시 이 지위에 오르게 되는데 eunuch가 된 것이다. 토라는 고환이 상한 자나 음경이 잘린 자는 여호와의 회중에 들지 못한다는 규정이 있는데 요세프와 느헤미야 등 관련 인물이 적지 않다.

4알리야 (창 38) 유다와 다말
배경이 헤브론, 세겜, 도단 등에서 서쪽으로 이동한다. 쉐펠라에 있는 아둘람과 딤나이다. 아둘람은 다윗이 비천한 도망자들과 사울로부터 몸을 숨겼던 곳이다. 딤나는 삼손의 스캔들이 있었던 곳이다. 현재 고고학 사이트로 텔 바타쉬가 있다.

아둘람 근처 베두윈의 염소들, 요즘은 양떼를 보기는 어렵다. 염소 키우는 게 훨씬 간편하다고 한다.

유다는 가나안 여인에게서 엘과 오난과 셀라를 낳았다. 야아콥은 디나 사건을 겪고도 자식들이 가나안의 딸들과 통혼하는 것을 막지 못했다. 큰 아들 엘의 아내가 다말이다. 엘이 먼저 죽자 둘째 아들이 형사취수,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하는 levirate marriage를 한다. 그런데 형에게 씨를 주지 않으려고 땅에 설정한다. 유대교 할라하는 남자의 자위 행위나 이로 인한 설정을 금한다. 미국의 청교도 정신이 성적 타락을 막기 위해 할례를 권장한 것은 유명한 착각이다. 그 여파로 유대교나 이슬람과 거리가 먼 우리나라도 할례 국가가 됐다. 그렇게 청교도 정신이 소중했으면 오난의 행위, 메우난을 금지했어야 하는 거다. 할례가 문제가 아니라. 유대인 비종교인들이 이와 관련해 쏟아놓는 dirty kidding은 어마어마하다. 가장 대표적인 게 나 나 나흐 나흐만 메우만,이라는 주문 같은 기도문으로 유명한 브레슬레브를 조롱하는 것이다. 마지막 메우만의 m을 n으로 바꾸면 해괴한 의미가 되는 것이다.
다말은 왜 창녀 역할을 해서라도 자식을 낳았어야 할까. "צדקה ממני" 그녀가 나보다 옳다가 핵심이다. 하나님의 백성이 그 언약대로 수많은 자손을 이어가야 하는데 불의한 자들이 너무나 많다. 하나님은 그 불의를 뚫고 언약을 지키셨다. 아무리 토라의 일부라도 창세기는 하가다, 이야기다. 그 선에서 봐야 한다. 다말은 유다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는다. 원래 장자는 세라였으나 베레스가 터트리고 먼저 나왔다.

5알리야 (창 39:1–6) 이쉬 마쯜리아흐
요세프는 형통한 자가 되었다. איש מצליח 마쯜리아흐는 성공의 뜻이다. 매사에 결실을 맺는다는 뜻이다. 알다시피 성공에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형통의 의미를 저절로 굴러가는 눈 먼 마법으로 여긴다면 착각이다. 최선을 다하는 노력, 그 노력으로 인한 결실을 보는 것이 형통한 것이다. 요세프가 형통한 것은 주인의 집에서 가정 총무로 최선을 다했다는 뜻이다.

6알리야 (창 39:7–23) 다시 갇히는 요세프
창세기에 나오는 남녀 관계는 한결같이 해괴하다. 포티파르의 아내가 모함을 했고 노에인 요세프는 이로부터 자신을 지킬 수 없었다. 다시 감옥에 갇힌다. 히브리어에서 구덩이와 감옥은 같은 컨셉이다. 예레미야가 갇힌 구덩이가 그의 감옥이었다. 형제들의 미움으로 구덩이에 빠져 노예가 된 요세프는 포티파르 아내의 모함으로 감옥에 빠졌다.

7알리야 (창 40) 술관원과 떡관원의 꿈 해몽
바로의 최측근 고위 인사들이 요세프가 있는 감옥에 들어온다. 포티파르가 바로의 친위대장이라 그의 감옥에 갇힌 것이다. 요세프는 두 사람의 꿈을 해몽해 준다. 술 관원은 풀려나고 떡 관원은 교수형에 처해진다. 술 관원은 살아나갔지만 요세프를 잊는다.

요세프의 옷כתונת פסים은 1995년 캠페인으로 발표된 곡이다. 이스라엘 사회를 요세프의 줄무늬 옷으로 묘사하는데, 유대인 정파의 서로 다른 문화적 기원을 나타낸다. 1990년대 아프리카 출신의 에티오피아 유대인 이민이 실현되면서 이스라엘 사회에 인종 차별 현상으로 인한 갈등이 폭발했다. 그 줄무늬 옷이 결국 요세프를 노예로 팔아버리지 않았나. 각자에게 있는 파심을 인정하자는 이야기다. 여전히 에티오피아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 사회가 인종 차별적이라고 호소한다. 제3자 입장에서 그래도 놀랍다. 이스라엘 사회는 매우 역동적으로 혐오와 차별 현상에 반응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