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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레너드 번스타인, 영화 마에스트로

 
레너드 번스타인의 생애를 다룬 영화 Maestro의 예고편이 나왔다. 번스타인 정도의 인물이 이제서야 영화화되는 것은 어쨌든 구린 면이 많아서다. 마침 친딸 제이미가 2018년 번스타인의 탄생 100주년을 기념해 필터 없이 살다간 아버지 인생을 책으로 냈다. 영화의 방향성은 있어야 하니까. 감독과 주연을 겸한 쿠퍼는 영리하게도 번스타인의 아내 펠리샤에게 초점을 둔 것 같다.
 

펠리샤 마리아 콘 몬테알레그레는 코스타리카에서 태어나 칠레에서 카톨릭 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제사장 코헨을 뜻하는 Cohn은 아버지쪽 성이다. 부계가 유대인이라도 할라하에 따르면 유대인이 아니다. 두 사람은 칠레 출신의 피아니스트 클라우디오 아라우의 파티에서 만나 1946년 약혼했고 다음해 번스타인의 성적 정체성 때문에 파혼한다. 그 후 펠리샤는 리처드 하트와 연인이 되었는데 이분이 죽어 버린다. 1951년 펠리샤는 결국 유대교로 개종하면서 번스타인과 결혼한다. 두 사람의 결혼에 모종의 합의가 있었을까? 이런 삶을 살도록 조언한 인물이 아론 코플런드라니까 뭐.     
 
펠리샤는 결혼해서 자녀 세 명을 낳았다. 번스타인에게는 수많은 연인이 있었다. 여성들은 그냥 눈가림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헐리우드라도 본인이 게이로 살아야 하는 고통을 피하겠다고 결혼이라는 보호막 뒤에 숨는 파렴치함을 포장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영화는 펠리샤가 어떻게 번스타인을 받아주고 사랑했고 게이 성향을 이해했는지 보여줄 모양이다. 우리 모두 가정의 소중함을 깨달을 12월에 개봉한다.  
 
이 영화가 어떻게 홍보 방향을 잡을까. 일단 노이즈 마케팅부터 하겠지. 예고편이 발표되자마자 영화는 jewface, 비유대인이 유대인 역할을 하는 데 대한 반대 의견에 직면했다. 쿠퍼는 번스타인과 비슷한 분장을 위해 가짜 코를 붙였다. PC를 이유로 영국 여왕까지 흑인 배우가 연기하는 마당에, 유태인은 무슨 별종이라서 유태인 배우만 연기해야 하나. 헬렌 미렌이 골다 메이어를 연기한 영화 "골다" 때 이미 한차례 논란이 있었다. 답은 연기력이고, 헬렌 미렌은 최고의 '골다'를 보여줬다. 문제는 번스타인의 유대인 외모를 두드러지게 표현하기 위해 굳이 가짜 코까지 붙여야 했냐는 것이다. 큰 코는 괴팍하고 괴상한 유대인의 특성을 조롱하는 반유대주의 소재이기 때문에 더 문제다. 스티븐 스필버그와 마틴 스콜세지가 제작하는 영화가 그걸 미처 몰랐다고?  
 
유대인 배우들을 제치고 굳이 비유대인 배우를 캐스팅하면서 (헤테로 배우가 게이 역할 맡는 건 문제가 안 되나?) 유대인의 외모를 표현하기 위해 가짜 코를 붙이는 게 모순이 아닌가.  
 

이스라엘은 유대인 국가인 만큼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의 스캔들도 더 적나라하게 알려져 있다. 번스타인은 1945-47년 뉴욕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일했고, 1947년 아직 영국 위임통치 중인 텔아비브의 에레츠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맡았다. 당시 유대인으로서 당연히도 시오니스트였다. 당시 에레츠이스라엘에 입국하려면 이집트를 통해 들어와야 했는데, 파리 주재 이집트 대사관은 번스타인의 비자 발급을 거부했다. 미국 관리가 개입해서야 비자 승인이 났다. 1947년 2월 번스타인은 아버지를 매니저로, 누이를 비서로 해서 영국의 팔레스타인 이민국(PA)에 취업 비자를 신청했고 약 한 달 후에 승인을 받았다. 
 
1948년 9월 번스타인은 아자리야 라포포르트를 만난다. 이스라엘에서 가장 잘생긴 남자로 불렸다는, 번스타인의 개인 가이드로 배정된 팔마흐 군인이었다. 번스타인은 라포포르트에게 첫 눈에 반한다. 번스타인은 51년에, 라포포르트는 52년에 결혼해서 각각 세 명의 자녀를 낳는다. 부인들이 배우라는 공통점도 있다. 
 

휴전 논의가 한창인 1948년 11월 19일 UN은 브엘셰바에 주둔한 이스라엘 군대에게 철수를 명령한다. 이스라엘 군대는 버틴다. 휴전을 이유로 물러서면 그 땅을 뺏긴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번스타인과 이스라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35명이 장갑차를 타고 와서 브엘셰바 올드시티에서 연주했다.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15번,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 거슈윈의 랩소디 인 블루가 레퍼토리였단다. 이스라엘이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번스타인의 오케스트라는 60일 간 40번의 콘서트를 열었다. 6천 명이 죽고 2만 명이 부상당한 전쟁이었다.
 

1967년 6일 전쟁으로 이스라엘은 예루살렘을 통일한다. 번스타인은 히브리대학교 원형극장에서 말러의 교향곡 Resurrection을 연주한다. 이때는 의대생으로 IDF에 복무중인 하워드 로젠만을 만난다.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의 제작자다. 번스타인이 이탈리아 가족 여행에 초대할 정도였으니, 깊은 사이였지 않을까. 공식적으로는 로젠만의 스토리텔러로서 가능성을 알아봐준 멘토로 소개된다. 멘토란 단어는 본래의 의미를 잃은 게 아닐까. 이리 다양한 용도로 쓰이다니. 
 
번스타인의 1967년 콘서트 '하티크바' 앨범은 그래도 특별하다. 전망산Mt. Scopus에서 내려다보이는 광야를 향해 볼륨을 높인 채 듣고 나면 이 특이한 나라에서 그래도 견딜만해진다. 저곳이 성경에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반역으로 맨발로 울며 피난가는 감람산 길이다. 
 
가만, 요시 스테른이 빠졌다. "예루살렘의 화가"로 불리는 독특한 스타일의 일러스트레이션을 남긴 예술가다. 1948년 11월 번스타인이 어머니 제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여러 컷의 그림을 그렸다. 두 사람의 연인 관계는 구설로만 남았는데 요시 스테른은 사생활을 지키고 싶어했다. 스테른은 게이라는 사실을 62세 때 밝혔다. "벽장 안에 들어가 본 적이 없고, 그래서 벽장에서 나온 적도 없다"고 했다.  

1921년 번스타인 가족. 원래 이름은 루이스였는데 성인이 되고 레너드, '사자처럼 용감한 자'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나 보다. 용감한 사자를 위해 희생을 감내한 사람들이 참 많다. 번스타인은 결혼한 지 20년 되던 해 톰 코스란을 만나고, 아내 펠리샤를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펠리샤는 1978년 사망하고, 톰 코스란은 1980년 에이즈로 죽는다. 번스타인은 1990년 10월 사망할 때까지 매년 젊은 남성 지휘자들과 함께 작업했다. 유대인도 게이도 아니면 음악 공부에 비전이 없다는 말이 이맘때 나왔을 거다. 마릴린 먼로를 다크한 상상력으로 난도질한 넷플릭스가 정말 다크한 삶을 산 번스타인에게는 로맨틱 드라마를 만들어 바칠 모양이다. 허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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