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에서 8월을 잘 보내려면 남다른 각오가 필요하다. 더운 날씨야 불평해도 소용없고 체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부단히 스스로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내가 사는 쉐펠라는 그런 노력이 빛 보기 어렵기 때문에, 해마다 나는 8월의 주말을 이스라엘 북쪽 지방에서 보내곤 했다. 하마스 전쟁이 300일을 넘고 가자는 잠잠해졌지만, 대신 북쪽 국경에서 헤즈볼라가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마음 편히 갈 만한 곳이 없다.
모처럼 대청소를 하다가 와이츠만 연구소 출입증을 발견했다. 코로나 전에 발급받은 것이다. 이걸 갱신할 수 있나. 가능했다. 공습 경보가 울릴 때만 피할 곳이 없어 출입 금지란다. 오랜만에 찾은 와이츠만 연구소는 강렬한 여름 햇빛 속에서도 무성한 녹음을 자랑했다. 세상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다니. 와이츠만의 시그니처인 물리학과의 코플러 입자 가속기. 용도를 모르면 귀엽게 보이기도 한다.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하임 와이츠만은 캠프리지에서도 선두적인 화학과 교수였다. 전 세계 유대인들이 모금해 이스라엘에 고등교육기관을 열고 와이츠만을 청빙했는데, 아연실색했단다. 캠퍼스라는 곳이 판잣집 수준이었으니까. 와이츠만이 세계적인 석학들을 모으는 것보다 먼저 한 일이, 바로 조경사를 구하는 것이었다. 1930년대 이민자들 중에 벨기에 국왕의 조경사였던 팔디엘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팔디엘은 약 100년 후 내 목숨도 구했다. 와이츠만 연구소가 아니었다면 이 8월을 무사히 보내지 못했을 테니까.
에프라임 카찌르는 와이츠만의 교수로 1970년대 이스라엘 4대 대통령이 되었다. 당시에는 직업이 무엇이든 이스라엘 국가의 대의를 위해 봉사하는 걸 최고의 미덕으로 여겼다. 카찌르의 친형 아하론 카찌르는 역시 와이츠만 교수로 이스라엘 과학원 원장이었는데, 1972년 로드 공항 테러로 사망했다. 푸에르토리코에서 온 기독교 순례객 17명이 카찌르와 함께 살해됐다. 테러범들은 일본 적군파 요원들이었는데, 생존한 오카모토 코조는 복역중에 포로 교환으로 풀려나 현재 레바논에 거주하고 있다.
와이츠만 교수들의 거주지다. 벽돌을 쌓아올린 듯한 벽이 Opus Latericium 기교를 연상시킨다. 아피안 가도에 있지.
이곳은 1949년 이스라엘 초대 대통령 관저 입구다. 하임 와이츠만은 직접 조경사를 닦달해 조성한 아름다운 캠퍼스를 떠날 생각이 없기도 했지만, 다른 데 갈 데도 없었다. 이스라엘 대통령 관저는 1971년에 완성됐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된다.
2대 대통령 이츠하크 벤츠비와 라헬 야나이도 르호봇 대통령 관저에 잠깐 거주했다. 이내 예루살렘 르하비야로 갔다.
하임 와이츠만은 1952년에, 아내 베라는 1966년에 사망했다. 베라와 하임 와이츠만 부부의 무덤도 와이츠만 연구소에 있다. 이스라엘 대통령, 총리 등은 국립묘지 헤르쩰 산에 묻힐 권리가 있지만, 초창기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그런 특권을 반기지 않았다. 또 한번 묻히면 이장은 할 수 없다. 다니 카라반의 홀로코스트 추모비 옆으로 베라 와이츠만이 만든 수영장이 있다. 이곳에서 폴리오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다고 한다.
와이츠만은 뛰어난 언변으로 유명했다. 요즘은 문과 이과 재능이 나뉘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원래 인재란 종합형 수재이기 마련이다. 와이츠만은 Zionist Congress에서 역사에 길이 남을 결정적인 연설을 여러 번 했다. 나탄 알테르만이 그런 와이츠만을 기리며 케쎔 이쉬, '개인의 마성'이란 시를 썼다. '개인의 마성'을 요즘 말로 하면 카리스마다.
조용하고 담담한데도 그의 연설이 사람들을 끌어들인 건 그가 가진 개인적인 매력, 카리스마 때문이라는 거다. 초기 시오니즘이 전 세계 지도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은, 와이츠만 같은 고상하고 품위 있는 사람들의 공이 컸다. 누가누가 더 저열한지 더 상스러운지 경쟁하는 것 같은 현재 정치판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그와는 별개로 나탄 알테르만이 이런 시를 썼다는 건 좀 의외다. 충분히 염세적일 텐데, 인간을 어떻게 믿고 이렇게 공개적으로 찬양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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