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국회를 히브리어로 크네셋이라고 한다. 성전 멸망 이후 에스라부터 시므온 하짜딕까지 120명의 지도자들인 하크네셋 하그돌라의 이름을 딴 것이다. 이 백성의 지도자라는 자의식이 강한 이름 되겠다. 1948년 독립을 선언한 이스라엘은 1949년 선거를 통해 최초의 크네셋 멤버를 뽑았다.
1956년 영국의 국회의원들이 이 신생 국가의 여덞번째 기념일을 맞아 국회에 선물을 보내고 싶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유대인 국가를 세우는 데 힘을 보탠 영국 내 유대인 세력이라고 해야겠지. 벤노 엘칸이라는 유대인 조각가에게 작품을 의뢰했다. 그 선물을 메노라 형태로 생각한 건 유대인 초대 고등판무관 허버트 새뮤얼의 아들 에드윈 새뮤얼이었다. 여기에 유대인의 역사를 총망라해 보여주자는 것이었다.
메노라의 각 줄기를 카네(קנה)라고 한다. 한가운데 카네의 밑둥 부분에 히브리어가 있다. 슈마 이스라엘 (신 6:4)! 3단 베이스 위의 이 부분이 작품 앞에 섰을 때 내 눈높이다(키가 크지 않구나). 슈마 이스라엘 아래로 독립전쟁 장면, 위로 1943년 나치에 대항한 바르샤바 게토 항쟁이 묘사된다. 거기서 양쪽으로 펼쳐지는 성구는 스가랴 4장 6절, 메노라 앞에서 천사와 스가랴 선지자 사이에서 이뤄진 대화이다.
לֹא בְחַיִל, וְלֹא בְכֹחַ--כִּי אִם-בְּרוּחִי, אָמַר יְהוָה צְבָאוֹת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
천사는 이것이 여호와께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이라고 했다. 망한 나라의 왕실 출신으로 피난민 무리를 이끌고 황무지로 돌아와 맨땅에서 나라를 건국해야 했던 인물이다.
메노라의 정중앙은 아말렉과 싸우는 이스라엘 전사들을 위해 두 손을 들고 중보하는 모세, 두 돌판 (שני לוחות-이건 유대교와 관련된 조각물이라 정중앙에 형식적으로 놓인 듯), 밀단을 들고 있는 룻과 울고 있는 라헬 (라헬의 울음은 랍비문학에서 인기 있는 테마이다), 에스겔의 마른 뼈 환상이 순서대로 놓여 있다.
이 한가운데 카네를 중심에 두고 양쪽에 있는 카네들이 대칭을 이룬다. 셋째와 다섯째, 둘째와 여섯째, 첫째와 일곱째 카네가 대칭이다. 대구와 대조는 히브리 예술의 핵심이다.
셋째 카네: 골리앗의 목을 들어올리는 전사 다윗, 에레츠이스라엘을 찾아온 이민자 행렬, 아브라함이다 (왜 저 포즈일까?).
다섯째 카네: 132-135년 유대인 봉기 사령관 바르 코흐바, 메시아를 기다리는 종교인들의 열성(떠오르는 태양 보시라),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이다.
둘째 카네는 율법을 읽는 에스라, 욥과 세 친구, 탈무드의 가르침(하늘을 향한 손가락!), 랍비문학(חז''ל)의 기쁨이다.
이에 대칭을 이루는 다섯째 카네는 율법을 단 하나의 계명으로 요약한 힐렐, 2세기 10인의 순교자 중 하나로 토라를 몸에 두르고 화형당한 랍비 하니나 벤 트라디온, 카발라 (생명나무!), 유대인 삶의 규율 할라하이다.
메노라의 가장자리를 장식하는 내용은 이사야와 예레미야 등 선지자와 유대교의 비전을 제시한 인물들, 그리고 유대교 역사의 핵을 담고 있다.
첫째 카네는 이사야 선지자, 성전 멸망 시기 랍비 유대교를 지켜낸 요하난 벤 자카이 (Ribaz), 스파라딤이 13세기 스페인에서 구가한 황금기 (람밤이 들고 있는 두 책은 자신이 쓴 היד החזקה와 아리스토텔레스), 바벨론 강가에서 노래하는 유다 포로들이다.
일곱째 카네가 여기에 대조되는 예레미야, 유다 마카비, 18세기 초 바알 쉠토브에 의해 시작된 아슈케나짐의 하시딤, 느헤미야와 시온으로의 귀환이다.
이 메노라를 여러 번 보았지만 도무지 뭐가뭔지 몰랐다. 유대교에 대해 아는 게 참 없다는 걸 실감했었다. 그러다 예루살렘 근대 역사를 전문으로 하는 타마르 하야르데니의 가이드를 받았다. 정말 집요하게 공부하는 가이드이다. 이 메노라를 조사하다가 국립 박물관인지 크네셋 도서관인지에서 벤노 엘칸의 스케치를 발견했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그 자료가 얼마나 중요한지 안중에도 없어서 타마르에게 흔쾌히 내주었단다. 유대인이 기록의 민족이라는 건 20세기 이후에는 그다지 해당되지 않는 팩트다. 타마르는 이 스케치를 바탕으로 위키피디아 크네셋 메노라의 히브리어판을 집필했다. 이 문서로 위키피디아에서 주는 최고 편집상을 받았다고 한다. 정말 대단한 작업이고, 그 노력에 비해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 씁쓸하기도 하다. 나 역시 두 시간쯤 시간을 들여 이 메노라 앞에서 사진을 찍고 타마르의 자료와 비교를 했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각 Scene에 물든 햇빛의 양이 다른 게 보인다. 쉽게 클릭 한번으로 남의 노력을 취할 수도 있는 시대에 왜 타마르는, 나는, 이런 일에 매달리는 것일까. 나는 답을 알고 있는데, 그냥 이게 재미있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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