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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카이저 빌헬름 2세의 레반트 방문

1898년 10월 25일 독일제국의 카이저 빌헬름 2세가 아내 아우구스타(황제의 아내) 빅토리아와 함께 하이파 항구에 도착했다. 26일이라는 설도 있다. 카이저 일행이 전통적인 자파 항구가 아닌 하이파를 선택한 이유는 이곳에 독일 템플러들이 살았기 때문이다. 카이저는 마르틴 루터의 교회 개혁을 기념하는 10월 31일 예루살렘 올드 시티에서 독일 루터 교회를 봉헌할 예정이었다. 에레츠이스라엘에 독일의 영향력을 확고히 하기 위한 조처였다. 루터 교회만 아니라 독일 카톨릭 교회도 프랑스의 손에서 빼올 작정이었다. 그 결과가 킨네렛에 있는 타그바(오병이어) 교회와 예루살렘 시온에 세워지는 마리아 영면교회이다. 오토만 술탄 압둘 하미드 2세는 독일의 카이저를 이스탄불에서 영접하고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 카톨릭의 수호자 프랑스와 영국의 간섭에 진저리가 났던 차라, 유럽의 새로운 셀럽 독일 편에 서고 싶었던 것이다.

 

10월 26일 카이저 일행은 Carriage를 타고 카이샤랴에 가서 황무지 위에 천막을 치고 숙박한다. 당시 중동 지역 최초의 근대적인 에이전트 토마스 쿡 여행사가 모든 일정을 관장했다.  

 

10월 27일 자파에 도착한다. 카이저가 묵은 곳은 Du Parc 호텔이다. 

 

대대적인 복원 공사를 거쳐 현재도 호텔로 운영중이다. 겁나 비싸다.

 

자파에는 미국에서 온 선교사들이 모여 살던 아메리칸 콜로니가 있었다. 예루살렘에 토마스 쿡 여행사가 있다면 자파에는 롤라 플로이드가 있었다. 1869년 프란츠 조세프 오스트리아 헝가리 황제가 왔을 때 롤라 폴로이드의 Carriage 비즈니스가 대박을 쳤다. 

 

카이저의 방문을 계기로 1904년 세워지는 Immanuel Lutheran Church in Jaffa

 

카이저보다 먼저 자파에 도착한 인물이 있었다. 테어도어 헤르첼이다. 한 해 먼저 바젤에서 유대인 나라 건국의 기초작업으로 Zionist Congress를 개최하고 유럽 지도자들에게 유대인을 위한 영토를 정중히 부탁할 예정이었다. 기독교 시오니스트로 알려진 Hechler 목사가 카이저의 곁에 있었고 만남을 주선하기로 약속한다. 

 

10월 28일 카이저 일행은 예루살렘을 향해 출발한다. 당시 자파와 예루살렘을 잇는 증기 기차가 1892년 이래 개통되어 있었지만 카이저는 기차 탑승은 여행 막바지로 미룬다. 1869년 이곳을 다녀간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프란츠 조세프의 행로를 따르고 싶었던 것이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 쉐펠라에 미크베 이스라엘('이스라엘의 소망')이라는 이름의 유대인 농업 공동체가 있었다. 헤르첼은 그곳 입구에서 카이저를 기다렸다. 군중 속에서 헤르첼을 알아본 카이저가 Pickelhaube에 손을 대고 인사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것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창작물이다. 

 

한편 헤르첼은 다시 자파로 가서 기차를 탔다. 이날은 샤밧을 앞둔 금요일이었고, 기차 시간은 샤밧이 시작되기 2시간 전이었다. 하지만 서툰 증기 기차는 한 시간이나 연착했고 헤르첼은 초조했다. 이들이 예루살렘의 현재 하타하나, 즉 기차역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샤밧이었다. 샤밧을 지키고자 했던 헤르첼 일행은 현재 다비드카 근처에 있는 카미니츠 호텔까지 걸어간다. 오늘날 잘 닦인 길로 걸어도 40분 이상 걸리는 거리이다. 지치고 피곤한 이 비엔나의 신사가 그래도 기절하지 않을 수 있었던 건 카이저의 방문을 앞두고 예루살렘이 그나마 깨끗이 정비돼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예루살렘과 자파에 각각 지점을 두고 있었던 유대인 최초의 호텔 Kaminitz. 오늘날 거주지로 변한 모습이다.

 

10월 29일 카이저 일행은 라트룬 텐트에서 밤을 보내고 다음날 샤밧 아침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최초의 근대적인 고등교육 기관 알리앙스 (קי''ח)를 지나 느비임 스트리트를 지나 올드시티의 자파게이트에 도착했다. 오토만은 다리가 불편한 카이저와 아우구스타의 마차가 잘 통과하도록 좁은 자파게이트 성벽을 부수고 길을 넓혔다. 카이저는 기독교 제국의 황제로서 처음으로 성묘교회를 방문한다. 

 

 

헤르첼 일행은 이날 밤부터 묵을 곳이 없어졌다. 카이저의 대규모 일행이 도착하자 예루살렘 숙소가 남아나지 못한 것이다. 길거리에 나앉은 헤르첼 일행을 구해준 이는 Sterm이라는 유대인으로 올드시티 밖에 꽤나 큰 가정집을 소유하고 있었다. 현재 이 집은 마밀라 거리에 있는 슈타이마츠키 책방으로 변해 있다. 

 

 

10월 30일 일요일, 카이저 일행은 베들레헴으로 간다. 예수 탄생교회와 함께 개신교 교회도 방문한다. 예루살렘 위원회와 성요한수도회가 새로운 고아원을 열었고, 뮐러 신부는 아랍 기독교인 앞에서 감동적인 연설을 한다. 돌아오는 길에 르파임 골짜기에 있는 독일 식민지, 즉 템플러들의 마을을 방문한다. 

 

 

10월 31일 에루살렘 올드시티 성묘교회 옆의 무리스탄에서 Church of the Redeemer 교회를 봉헌한다. 이날은 마르틴 루터가 1517년 종교 개혁을 시행한 지 381주년이 되는 날이었다. 이 행사는 이번 여행에서 카이저에게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완전한 군복에 십자군 복장을 하고, 성요한 기사단의 호위를 받았다. 하지만 막상 이 사진에서 카이저가 보이지 않는데, 화려한 깃털 모자로 장식한 부인 빅토리아 왼쪽에서 머리를 숙이고 누군가와 이야기하는 중이다. 오늘날 VIP 영접에서 가장 중요한 걸 놓친 거다. 바로 VIP의 안면 인식. 남부 독일에서 온 선교사 겸 건축가 콘라드 칙 역시 뒤통수만 보인다.    

오후 4시 시온 산에 있는 Cinacle을 방문한다. 예수님의 마지막 만찬 장소로 알려진 곳으로 당시는 무슬림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다. 카톨릭은 그곳에 마리아가 묻혔다고 믿었다. 카이저는 이곳에서 깊은 인상을 받는다. 결국 술탄이 이곳 영토를 구매해 카이저에게 양도한다. 현재의 마리아 영면 교회이다.

 

11월 1일 기드론 계곡과 겟세마네, 감람산을 방문한다. 콘라드 칙 등 독일 선교사들이 관여해 시리안 난민들을 위해 세운 Schneller 고아원을 방문한다. 아모스 오즈는 이 고아원 건물 근처에 살았고, 그의 자전적 역작 '사랑과 어둠의 이야기'에도 묘사된다. 현재는 부유한 하레딤을 위한 거주지로 변모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에레츠이스라엘에 형성된 독일인들의 재산은 보상의 일환으로 이스라엘 국가에 귀속됐다.

   

11월 2일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엘악사, 유대교의 성전 산을 방문한다. 오후에 헤르젤과의 만남이 있었다. 느비임 스트리트에 있는 천막 숙소에서였다. 카이저는 유대인 국가 수립이라는 헤르첼의 비전에 대해 분명한 답을 주지 않았다. 

 

예루살렘에서 헤르첼이 카이저를 만난 장소. 오늘날 ORT college 건물

 

11월 3일 프랑스 영사와의 만남, 카이저는 지쳤다. 

11월 4일 예루살렘에서 자파를 거쳐 하이파에 도착한다. 

11월 7일 하이파에서 배를 타고 베이룻에 도착, 기차를 타고 다마스커스에 도착한다. 

11월 10일 시리아 바알벡의 폐허를 방문한다. 

11월 12일 베이룻에서 배를 타고 귀환길에 오른다. 원래는 이집트까지 계획에 있었지만 반제국주의자들의 암살 음모를 염려해 취소한다. 로도스, 크레테, 말타 섬을 들른다.

11월 17일 독일에 돌아온다.

 

 

 

 

 

영국과 예루살렘

1917년 12월 11일, 1차 세계대전 중 이집트 팔레스틴 전선을 책임지던 영국 원정군 사령관 알렌비 장군이 예루살렘 올드시티 자파 게이트를 걸어서 들어왔다. 원래 말이 준비돼 있었지만, 이 거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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