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Sites

옷단 귀 술의 청색 끈 고대 이스라엘 사회는 색깔로 신분을 드러냈다. 보라색은 왕의 색깔이다. 왜 보라색이 고귀했을까? 아니 애초에 색깔을 어떻게 식별했을까? 사무엘이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우는 다윗. 두라 유로포스 회당의 벽화이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필요한 색은 청색이었다. 민수기 15장에 이런 명령이 나온다. "옷단 귀에 술을 만들고 청색 끈을 그 귀의 술에 더하라 이 술은 너희가 보고 여호와의 모든 계명을 기억하여 준행하고 너희를 방종하게 하는 자신의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지 않게 하기 위함이라 그리하여 너희가 내 모든 계명을 기억하고 행하면 너희의 하나님 앞에 거룩하리라." '술'이 히브리어로 찌찟ציצית, 청색 끈이 프틸 트헬렛פתיל תכלת이다. 이게 자기 마음과 눈의 욕심을 따라 음행하는 것을 막아줄 텐.. 더보기
헤브론, 나의 벗이여 이스라엘에 온 후 처음 몇 년 동안 헤브론에 가지 않았다. 그곳에서 내가 무엇을 느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였다. 나는 신앙 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하나님과 동행했던 사람들이고, 이스라엘 백성의 조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이 실존인물처럼 느껴지지만 그걸 굳이 검증할 필요는 느끼지 않는다. 검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헤브론에는 저 세 족장이 부인들과 함께 묻혀 있다. 막벨라, 성경은 아브라함이 이 땅을 값을 치르고 구매했다고 증거한다. 땅의 소유주를 둘러싸고 이토록 첨예한 분쟁이 계속되는 나라에서 역사적 실체를 검증할 수 없는 누군가가 값을 치르고 산 땅이라니, 헤브론은 애당초 평화가 요원한 곳이다. 1997년 헤브론 협정이 체결되면서 H1은 팔레스틴에, H2는 이스라엘 통제가 된다... 더보기
실로, 여호와가 택하실 그곳 이스라엘의 역사와 고고학은 텔아비브 대학교와 히브리 대학교의 입장으로 양분된다. 미니멀리즘 대 맥시멀리즘의 대결이다. 히브리 대학교는 기원전 10세기 다윗으로 거슬러 올라가 기원전 13세기 모세와 여호수아 시대까지 검증 가능한 역사의 일부라고 본다. 믿음이 아니라 과학으로서 그렇다는 것이다. 텔아비브 대학교는 그렇지 않다는 입장이다. 기원전 9세기가 이스라엘 역사의 경계라고 여긴다. 텔아비브 대학교의 은퇴교수 이스라엘 핀켈슈타인은 아직 순진했던(!) 1980년대 실로 발굴에 뛰어들었다. 성경은 이스라엘 백성의 제의가 여호와가 택하실 하마콤המקום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명령했고(신명기 12장), 핀켈슈타인 입장에서 검증 가능한 역사적인 하마콤은 예루살렘이 아니라 실로였기 때문이다. 미쉬나는 실로의 하마콤.. 더보기
이스라엘 군대 이야기 이스라엘 군대는 사관학교가 없다. 그렇구나, 하다가 놀란다. 군대는 작전을 세우는 쪽과 이를 이행하는 쪽의 실체가 다르다. 지휘관을 키우는 기관이 없다는 게 무슨 말인가. 모든 사병에게 지휘관의 길이 열려 있다는 뜻이다. 나는 처음에 이 문장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이 길이 열려 있어야 하지? 군대를 지휘하고 싶은 사람끼리 알아서 하면 안 되나? 이게 핵심이다. 이스라엘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18살 시민권자는 남녀 모두 징집된다. 다른 가능성을 경험하기 전에 군대라는 선택의 기회를 인생에서 가장 먼저 얻는 것이다. 군대 역시 미래의 지휘관들을 놓치고 싶어하지 않는다. 사려깊게 인적성 검사를 실시한다. 어느 부대에 어느 역할이 맞는지 고등학교 1학년부터 스크리닝 과정을 거친다. 철없어 보이는 고등학생도 어디.. 더보기
감라, 초막절의 함락 골란고원에 갈릴리 바다 킨네렛을 내려다보는 감라Gamla가 있다. 낙타를 뜻하는 아람어다. 히브리어 가말, 아랍어 자말이다. 낙타봉처럼 솟아 있기 때문이겠지. 기원후 67년 10월 12일 감라의 유대인은 결사항전을 벌이다가 결국 로마에 멸망한다. 살아남은 유대인들은 안전한 곳으로 도망치려 했지만 요세푸스 기록에 따르면 로마군에 의해 대부분 살해당한다. 낙화수처럼 떨어지는 그들의 시신으로 갈릴리 바다는 피로 물들었다. 2000년이 지난 1967년, 유대인은 골란고원으로 돌아왔고 1968년 고고학자들은 고대 도시를 발굴했다. 성벽을 부수는 공성전에 사용된 발리스타 볼과 화살촉 외에, 아름다운 회당도 발견됐다. 저기 나 있는 좁은 길을 따라 가면 감라의 회당에 도달할 수 있다. 벤치도 없고 예루살렘을 향하지도.. 더보기
욤키푸르 전쟁 49주년 1973년 10월 6일, 이스라엘이 욤키푸르를 준수하던 오후 2시 전국에 사이렌이 울렸다. 이집트가 시나이 반도에 모래로 쌓은 장벽을 넘었고,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넘어 내려왔다. 이날은 무슬림의 금식 성월 라마단의 10번째 날이기도 했다. 닉슨의 데탕트에 찬물이 쏟아졌다. 닉슨과 키신저야말로 이 전쟁 소식에 가장 놀랐을 것이다. 가장 뼈아픈 건 시나이 반도의 난공불락 바르레브 라인이 무너진 것이었다. 아무도 넘을 수도, 뚫을 수도 없으리라 자신하던 장벽은 물에 녹았다. 근본적으로 모래였으니까. 이스라엘은 오만했던가. 이집트가 달라졌다고 봐야겠지. 사다트는 나세르와 달랐다. 문제를 파악했고 목표를 세웠고 집요했다. 적어도 전투의 전술과 전략을 이해하는 군인이었다. 30년 만에 이집트 군대가 배출한 멀쩡한 .. 더보기
모짜 מוצא 면제된 도시 처음 이스라엘 지명을 들으면 성경에 나오나 안 나오나부터 따진다. 설마 모짜는 안 나오겠지. 나온다. 베냐민 지파에게 배분된 동네였다 (수 18:26). 우리말 성경은 '모사'다. 성경 지명은 꼭 히브리어 식으로 바꾸면 좋겠다. 텔아비브와 이어진 1번 고속도로에서 벗어나 최근 개통한 16번 고속도로로 갈 수 있다. 예루살렘 하르 노프 동네로 이어진다. 해발 600미터는 되는데 갑자기 산 밑으로 뚝 떨어진 기분이다. 모짜는 1854년 예루살렘 밖에 처음 마련된 유대인 거주지이다. 왜 여기였을까. 이유는 많다. 탈무드는 모짜라는 이름이 왕의 세금을 면제받았기 때문이라고 기록한다. 문자적으로 제외된다는 뜻이다. 모짜는 계곡 아래 위치하기 때문에 하천을 따라 버드나무, 아라바가 많이 자란다. 제2성전 시대 유대.. 더보기
로스칠드와 이스라엘 바론 에드몬드 로스칠드는 유대인 "정착지의 아버지"로 불린다. 그의 투자 기금이 없었다면 오늘날 이스라엘 국가가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은 이미 모두에게 분명하다. 로스칠드와 관련된 유대인 거주지가 50여 군데이고, 이 집안 사람의 이름으로 불리는 곳도 10곳이 넘는다. 대개 오늘날 금싸라기로 변한 땅들이다. Zichron Ya'akov 1882, 아버지 James de RothschildMazkeret Batya 1883, 어머니 Betty von RothschildBat Shlomo (슐로모의 딸) 1889, 어머니 Betty의 아버지가 Salomon von RothschildMeir Shfeya (메이어의 밭) 1891, 할아버지 Frankfurt의 Amschel Mayer Von Rothsch..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