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명기 8장 8절은 아름다운 약속의 땅에서 자라는 7대 작물을 소개한다. 밀과 보리,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이다. 우리말은 그냥 쭉 나열을 해 놓았지만 히브리어는 이들을 네 가지로 분류한다.
밀과 보리(곡류, 추수),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따는 과실), 감람나무(=올리브, 떠는 과실), 꿀(??? 꿀은 가공식품인데?)
밀과 보리는 봄철에 추수한다. 보리는 유월절 경, 밀은 칠칠절 전이다. 수확의 방법은 서 있는 곡식단을 낫 같은 것으로 베기 때문에 카찌르(קציר)라고 부른다. 짧게 만든다는 의미이다.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는 여름철 과실수에서 익은 열매를 따는 건데, 포도는 바찌르(בציר), 무화과는 아리야(אריה), 석류는 카티프(קטיף)라고 부른다. 행위가 같은데 왜 동사가 다른지 히브리어 농업의 섬세함은 놀랍다. 게다가 출애굽기는 이 열매를 따는 시기를 연말(חַג הָאָסִף בְּצֵאת הַשָּׁנָה)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티슈레이 월이 시작점이 되는 농사 달력이 있음을 노출한다(23:16).
감람나무는 가을철 초막절 경, 바닥에 천을 깔고 나무를 흔들어서 떨어뜨린다. 마시크(מסיק)이다. 올리브는 짜게 절여 먹기도 하지만 올리브기름의 수요가 절대적이다.
즉 이 땅에는 세 번의 수확이 있다. 토라가 반복하는 것처럼 '곡식과 과일과 기름의 수확'이다.
그럼 꿀은? 꿀을 얻을 수 있는 타마르, 즉 드바슈 트마림, 대추 열매로 이해한다.
어느 집에 갔더니 이 세 작물이 모두 정원에 있었다. ㅋㅋ 혼자 잘 커서 할 일이 별로 없다고.
나는 이 구절을 외우고 있지만, 그게 이 땅과 무슨 상관인지는 몰랐다. 우리나라 무슨 시대에 이모작을 했는지 삼모작을 했는지 시험 끝나면 다 잊어버리지 않나. 성경에 이런 게 써 있구나 하고 말았다. 어느 날 에인 케렘이라는 마을에 가게 됐다. 기독교 순례지이기도 하지만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바로 가나안 땅의 일곱 작물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고대 농사법의 보존지이다.
국토가 작은 우리나라에도 익히 알려진 계단식 농사법, 일명 테라스이다. 돌을 가져다가 가장자리를 막고 좁지만 의미있는 일정 농토를 확보한다. 이들은 오직 하늘에서 내리는 비에만 의지해 작물을 키울 수 있다(무슨 수로 저기까지 물을 길어오겠나). 당연히 여러 가지 실험이 있었을 테지. 어떤 작물이 자랄까. 일단 밀과 보리가 자란다. 밀은 연평균 강수량 200밀리그램은 되어야 한다. 보리는 더 많아야 된다. 이스라엘 땅에서 밀이 자랄 수 있는, 다시 말해 연평균 강수량이 200밀리그램이 되는 최남단이 브엘세바다. 이스라엘 조상들이 브엘세바에서 더 내려가지 않은 건 우연이 아니다. 브엘세바에 가뭄이 들면 그렉으로 내려갔다(창 26). 그렉은 현재의 가자 지역 근처로 브엘세바에 비해 강우량이 훨씬 많은 곳이다.
이렇게 자연적인 강수량에 의존하는 농법을 하클라웃 바알, dryland farming이라고 부른다. 당연히 가나안의 비의 신, 천둥의 신 바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지금도 이 방법대로 성경 시대의 7작물을 거둘 수 있는지 실험하고 있다. 밀은 확실하다.
반대 개념이 하클라웃 슐라힌, irrigation farming이다. 물을 끌어다 식물에 주어야 한다. 아람어로 슐라힌이 '피곤함'이라는 뜻이다.ㅋㅋ 토마토 오이같은 야채류는 다 슐라힌이다. 피곤한 친구들이다. 나물 좋아하는 우리나라 사람들, 피곤하게 먹고 있는 거다. 하늘에서 내리는 물만으로는 절대 키울 수 없는 것들이다.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וְהִשְׁקִיתָ בְרַגְלְךָ כְּגַן הַיָּרָק)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 (לִמְטַר הַשָּׁמַיִם, תִּשְׁתֶּה-מָּיִם)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이 비가 언제 오냐고. 이스라엘 백성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율법을 잘 지키면 이 땅에는 때를 따라 비가 내릴 것이다 (לָתֵת מְטַר-אַרְצְךָ בְּעִתּוֹ).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뭐 이래, 할 일이 아니다 (석유 안 나는 건 여전히 아쉽지만). 하는 일 없이 (돌 정도는 쌓아야겠지만) 7개나 되는 작물을 키울 수 있는 게 보통 일인가. 쌀농사가 이런 식으로 되겠나? 논에 물을 대고 빼고 새벽부터 초저녁까지, 허리 펼 새도 없이 일해야 하는 우리식 농사가 이룬 문명의 왜소함을 보라. 농사 짓느라 바빠서 세계 제패 할 시간이 없지 않았나(덕분에 평화를 사랑하기는 하지만).
절기상 9월 말은 과실수 수확의 마무리 단계이다. 7월부터 수확이 시작된 포도와 무화과에 이어 석류를 딴다. 석류는 로쉬 하샤나의 상징이기도 하다. 새해에 잘 좀 살아보자고 다짐하는 유대인은 유대교의 계명을 잘 지키기로 결심하는데, 그 계명의 숫자가 613개이고 그게 석류알의 숫자라고 한다 (작정하고 세어 보다 포기했다. 613개로 믿겠다). 게마트리아로 תרי''ג 이다. 또 대제사장의 겉옷 가장자리에는 작은 석류 모양으로 장식을 달았는데 그것도 613개라고 유대교는 믿는다.
이스라엘 유치원은 아직도 이런 식으로 절기와 자연과 식물을 가르친다.
사진과 화면으로만 보고 배운 아이들보다야, 자신들이 사는 땅을 더 이해하고 사랑하지 않을까. 교육이 문제다.
오랜만에 이스라엘을 찾는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도 있다. 여름철 칙칙한 시든 나무 빛이던 곳들이 너무나 푸르다. 케렘, 포도밭 덕분이다. 무슨 포도 농사를 이렇게 심하게 하나 싶을 만큼 곳곳에 케렘이 들어섰다. 이 물부족국가에서 포도밭을 어떻게 키우는지, 그 포도밭이 여름철 땡볕 아래 황무한 땅을 얼마나 푸르르게 보이게 만드는지, 또 거기서 포도를 따는 바찌르의 즐거움은 얼마나 대단한지 느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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