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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ed

욤키푸르와 회당

욤키푸르는 오랜 세월 유대교가 제의적으로 극강의 정성을 기울여 다듬어온 절기이다. 일몰부터 시작해서 다음날 일몰까지 이어지는 모든 순간이 철저히 계산되었다. 현대 종교는 간편해지는 특징이 있다지만 종교가 형식을 떠나는 것은 적어도 유대교에서는 불가능하다. 신을 향한 인간의 간절함이 왜 공동체적 특징을 갖게 됐는지, 왜 신을 부르기 위해 예배자 각자에게 역할이 주어지는지, 욤키푸르 제의에 들어 있는 상징과 절차는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일몰과 함께 금식이다. 공항과 역과 터미널 모든 교통의 흐름이 끊긴다. 정규 방송도 사라진다. 재방송? 케이블을 볼 사람은 볼 수도 있겠다. 어린이의 금식은 부모의 종교 상태가 결정하지만 13살 이후는 스스로 금식을 선택할 수 있다. 세속인 어린이들은 저녁을 먹고 도로에서 자전거를 타기 위해 집결한다. 사람들은 대부분 회당으로 간다. 이날 저녁 기도에 특별한 피윳, 콜 니드레이가 불리기 때문이다. 많은 유대인 여성들도 회당을 찾는다. עזרת נשים 여성 공간이 따로 있다. 매우 불편하고 좁으며 무엇보다 막혀 있어서 아론(토라 두루마리가 들어 있는 장)이나 비마(토라 두루마리를 읽는 단)가 안 보인다. 볼 필요가 없다는 주의다. 유대교의 경전은 '듣는' 것이다. 남자들은 보잖아요. 어허, 그만.

 

큰 회당이라면 전속 하잔(חזן)이 있다. 부유한 회당은 유명한 하잔을 초대하기도 한다. 모든 회중이 전례를 암기할 수는 없기 때문에 기도를 선창하는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오늘날 하잔은 랍비나 마찬가지로 일종의 전문직으로 양성된다. 물론 유대교는 미니안 회중 누구나 기도를 선창할 수 있다고 믿는다. 현대 유대교 제의의 토대가 된 16세기의 슐한 아로흐에 하잔의 요건이 나온다. 죄가 없어야 하고, 겸손해야 하고, 좋은 목소리를 가져야 하며, 13세 이상이어야 한다. 

 

좋은 목소리와 13세 이상이 병립하기는 쉽지 않다. 많은 회당에서 기도 선창을 맡고 있는 목소리는 어린 편이다. 추측컨대 그 회당 랍비의 손자이기 쉽다. 성직자의 자녀는 저쪽도 고달픈 것이다. 1980년작 The Jazz Singer라는 영화가 있다. 랍비의 아들로 태어나 브로드웨이에서 성공한 아들이 욤키푸르에 집에 돌아와 아버지와 갈등을 빚는다. 전통과 가족의 의미를 둘러싼 세대 갈등이다. 결국 아들은 아버지 앞에서 콜 니드레이를 부르게 된다. 닐 다이아몬드가 이 대곡을 소화하기는 무리였지만 그만한 유대인 스타가 없었으니 이해한다. 콜 니드레이는 매우 특별하다. 이 한 곡이 수백 년에 걸쳐, 어쩌면 천 년에 걸쳐 욤키푸르에 불렸다. 안 특별하기가 쉽지 않다.   

 

 "모든 맹세, 우리가 이번 욤키푸르에서 다음 욤키푸르까지 하게 될 모든 맹세와 서약은 효력이 없다."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 백성은 하나님을 배신한다(민 13). 하나님이 인도해 들이실 축복의 땅을 꺼리고 주저했다. 이에 하나님은 이들을 모조리 없애 버리려 하셨다. 그때 모세가 나선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많아 죄악과 허물을 사하십니다. 이에 여호와는 응답하신다. "내가 네 말대로 사하노라" וַיֹּאמֶר יְהוָה, סָלַחְתִּי כִּדְבָרֶךָ (민 14:20). 하나님은 당신과 언약을 맺는 자들의 존재적 한계를 아신다. 지금 죄를 사해 달라 서 있는 인간의 맹세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 결국 지켜지지 못할 하나님에 대한 피할 수 없는 범죄를 선제적으로 제거해 달라는 기도이다. 나는 기독교인이지만 콜 니드레이의 진정성 앞에서 숙연해진다.

 

욤키푸르 기도를 묘사하는 모리시 고트립의 작품이다. 그의 고향 드로호비치(현 서부 우크라이나)의 1878년 실제 회당 모습이다. 1층 비마와 2층 발코니 에즈라트 나쉼이 대조되고, 고트립 자신과 약혼녀였던 로라도 등장한다. 이 젊은이도 참, 짝사랑하던 부잣집 딸한테 차이고 그녀의 결혼에 상심해 요절한다. 그림 속에서 화가는 세 번 등장한다. 나르시스트인가ㅋ.

한가운데 표현된 오른손으로 머리를 짚고 있는 청년- 색다른 숄을 걸치고 마겐 다비드와 히브리어까지 묘사된 메달을 달고 있다.

왼쪽 아래 소년- 전통적으로 폴란드계 유대인이 명절에 착용하던 키파와 코트를 입고 있다. 소년의 오른손은 מלך라고 적혀있는 페이지를 가리킨다. 그러면서 관객을 보고 있다? 

오른쪽에 검은 옷을 입고 기도서를 읽고 있는 소년도 화가이다.

약혼녀(다음 상대가 나타나서 파혼한) 로라도 두 번 나타난다. 기둥 오른쪽에 서 있는 여인이자, 왼쪽에서 어머니와 속삭이는 여성이다. 로라는 이때부터  65년 이후 나치에 의해 살해된다.   

이 욤키푸르 기도 장면이 어째서 유대인의 감성을 건드리는지 모르겠다. 너무나 유대인스럽다고 한다.

 

욤키푸르 새벽 샤하릿 기도는 절실하다. 비두이 기도가 있다. 고백이란 뜻이다. 하나님과 자신과의 사이에서 드러나야 할 것들을 드러나게 하는 기도다. 아샴누, 즉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의 내용이 히브리어 알파벳 22자를 따라 반복된다. 1인칭 복수로 표현하는 이유는 각 개인이 특정 죄를 범하지 않았더라도 공동체로서 우리가 하나이고 우리 모두의 운명이 이 날에 얽혀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유대교는 자신의 죄를 남에게 고백해야 한다고 여기지 않는다. 남에게 과오를 했다면 공개적으로 사죄해야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해야 하는 것을 인간 앞에서 하지 않는다. 욤키푸르는 그런 시간이다. 전통적으로 유대교는 임종을 앞둔 사람을 위해 비두이 기도를 한다.

 

기도의 마지막은 아비누 말케이누이다. 로마에 의해 기원후 135년 철빗으로 긁혀 죽은 랍비 아키바는 가뭄을 끝내기 위한 기도를 이 두 단어로 시작했다.  

אָבִינוּ מַלְכֵּנוּ חָנֵּנוּ וַעֲנֵנוּ; אָבִינוּ מַלְכֵּנוּ חָנֵּנוּ וַעֲנֵנוּ כִּי אֵין בָּנוּ מַעֲשִׂים 
עֲשֵׂה עִמָּנוּ צְדָקָה וָחֶסֶד עֲשֵׂה עִמָּנוּ צְדָקָה וָחֶסֶד וְהושִׁיעֵנוּ

우리 아버지 우리 왕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 아버지 우리 왕 긍휼히 여기시고 응답하소서. 우리 안에 행함이 없습니다.
우리에게 정의와 자비를 베푸소서 우리에게 정의와 자비를 베푸소서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소서. 

 

아비누 말케이누도 화려함을 자랑하는 대곡이 있고 무려 그 곡을 바바라 스트라이샌드가 부르기도 했다. 그런데 피윳은 단순한 곡조에 더 힘이 있는 것 같다.  

 

 

샤밧과 명절에 더해지는 무사프 시간이 되면 서서히 허기짐을 의식하게 된다. 로마 때문에 순교한 유대교 10명의 순교자 이야기를 읽는다. 무사프 기도 후에 휴식한다. 

 

오후 민하 기도는 파라샤이다. 레위기 18장, 혹은 19장 외에 요나서를 읽는다.

 

욤키푸르에만 첨가되는 다섯 번째 네일라 기도가 이어진다. 문자적으로 잠근다는 뜻이고 회개의 마지막 순간을 의미한다. '잠김'의 시간에 토라가 보관돼 있는 아론이 전부 열리는 게 시각적으로 큰 자극이다. 마치 하나님과 단독 면담을 위해 문을 닫고 앞으로 나아와 앉는 기분이다.    

 

마지막으로 쇼파르를 분다. 

 

 

 

 

 

 

 

욤 키푸르 파라샤, 요나

금식하는 날 유난히 하루가 길다. 그래서 읽어야 할 본문이 많다는 게 반갑다. 토라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해 하나님의 13가지 속성을 진술하는 장면을 읽는다(신명기 33:12-34:9). 속죄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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