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의 브레쉬트, 노아흐, 레흐 레하, 바예라에 이은 다섯 번째 파라샤 하예이 사라를 읽는다. 사라의 죽음으로 시작해 이 가정에 들어온 새 여성 리브카를 소개하는 파라샤다. 약속의 땅이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주어지리라는 언약의 영속성을 다루는 것이다. 하프타라는 밧세바의 촉구로 마침내 거행되는 기혼 샘에서 솔로몬의 대관식(왕상 1장 1-31)이다. 역시나 다윗의 집이 영원하리라는 하나님의 언약이 다윗의 아들 솔로몬으로 인해 실현되는 과정이다.
1알리야: 사라의 죽음 23:1-16
- 사라가 127세로 사망한다. 성경에 연수가 기록된 유일한 여성이다. 사망 장소가 에레츠 크나안의 헤브론, 키리얏 아르바이다. 그래서 이 파라샤를 읽는 샤밧을 '샤밧 파라샷 하예이 사라'라고 부르고, 유대 종교인들이 헤브론 막벨라로 몰려들어 행사를 갖는다. 랍비들의 강의와 대중 기도, 이슬람 모스크로 사용되는 이삭과 리브가 무덤 투어 등을 한다. 이날이 세 족장 부부의 무덤을 모두 통합해 유대인에게 개방하는 열흘 중 하루이기 때문이다. 올해는 11월 19일이다. 이날을 기억하는 것은 혹시라도 헤브론을 가지 않도록 주의하기 위해서다. 라그 바오메르 때 메론 산 라슈비의 무덤, 로쉬 하사냐 때 우크라이나 우만의 랍비 나아만의 무덤과 함께 수천 명의 유대 종교인이 방문하는 무덤으로 유명하다. 밤새 불을 밝히고 열광적으로 기도한다. 아브라함이나 다른 인물 때문이 아니라 사라 때문이라는 게 신기하긴 하다.
- 사라가 이츠하크를 90세에 낳았으니 37년이 지나 죽은 셈이다. 미드라쉬는 사라의 죽음이 아케다 사건을 사탄으로부터 전해듣고 충격을 받아서라고 기록한다. 아들이 최종적으로 하나님께 보호받았음을 미처 모르고 죽은 것이다. 랍비들이 이런 부언을 굳이 집어넣은 것은 히브리성경 텍스트만으로는 문맥에 지장이 있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이츠하크와 함께 브엘세바에서 출발해 예루살렘 모리아 산에 이르렀다가 브엘세바로 돌아갔다. 사라는 왜 헤브론에 있다가 죽었을까? 소식을 듣고 아브라함을 말리기 위해 추적해 왔다가 헤브론에 주저앉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37세의 이츠하크는 왜 나아르, 소년이라고 묘사했을까? 성경 텍스트의 모순을 설명하기 위해 재구성할 필요성이 있을까? 유대교 현자들이 그럴 필요가 있다고 여긴 부분들은 대개 이야기הגדה 부분이다.
- 이 알리야에서 아브라함이 사라의 장지를 위해 땅을 매입했다는 것이 핵심이다. 아브라함은 헷 사람들에게 나씨 엘로힘, 하나님의 사자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일종의 명예 시민인 만큼 매매 없이 무상 임대해주겠다고 제안한다. 이런 호의는 끝내 자기 일원으로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의지이기가 쉽다. 아브라함은 무상 임대를 사양하며, 정당한 값을 치르기를 고집한다. 은 400세켈이다. 이 매장지는 아브라함과 그 후손에게 가나안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성취되는 합법적인 발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약속을 완성하는 것은 인간의 실천이다.
2알리야: 엘레에제르의 사명 23:17-24:9
- 고집스럽게 사라의 매장지를 매입한 것과 평행하는 본문은 먼곳에서 아들의 아내를 찾으려는 열망이다. 디아스포라의 삶이 요구하는 개방성과 폐쇄성 사이의 긴장이랄까. 아브라함 집에는 늙은 종이 있었다. 그에게 아브라함은 아들 이츠하크의 아내를 가나안에서 택하지 않겠다 맹세시킨다. 늙은 종에게 이런 권한을 준다고? '자기 집 모든 소유를 맡은ביתו המשל 늙은 종'의 고대근동학적 의미를 상기할 필요가 있다. 이 종의 이름은 다메섹 사람 엘리에제르이다.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할 때 다메섹을 들렀고 그곳에서 이 종을 얻었다는 이론이 그럴 듯하다. 그런데 종이 어쩌다 집안 모든 것을 관장하고 심지어 상속자로 여겨진 걸까? 중세 유대 주석가들은 다메섹을 벤 메쉐크, 즉 청지기로 해석했다. 창세기 주석의 권위자 라쉬는 엘리에제르אליעזר의 게마트리아가 318 (알렙=1, 라멧=30, 유드=10, 아인=70, 자인=7, 레쉬=200)인 데 착안해, 목숨을 건 전투에서 아브라함을 조력한 이이기 때문에 상속자 지위를 부여받았다고 해석한다.
3알리야: 선택된 리브카 24:10-26
- 낙타가 등장한다. 히브리성경의 대표적인 anachronism이다. 시대착오적이라는 것은 거짓말이라는 위미가 아니다. 창세기의 '이야기'는 구전을 통과하면서 뒤늦게 자기 성격에 맞는 세팅을 완성하게 됐고 최종 편집자가 이를 용인했다는 뜻이다. 오딧세이 등 고전 문학에서 흔한 요소이다. 문서화 시기가 엇비스한 히브리성경에서 이를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문서의 신성함에 부적절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모든 성경이 성령의 영감을 받아 기록됐'다는 것은 성령께서 인간을 통해 역사하신다는 믿음도 포함한다. 수천 년의 장구한 역사를 통과하며 이야기가 조형된 과정 또한 하나님의 경륜 속에 있었다고 이해하는 게 맞지 않을까.
기원전 19세기, 이집트 브네이 하산 묘지 벽화에서 이집트 사람들이 운송용으로 이용하는 짐승은 낙타가 아니라 산양과 염소다. 기원전 9세기 샬만에세르 III (r. 858–824)의 블랙 오벨리스크에 묘사된 낙타는 아시아 쌍봉 낙타에 가깝다. 아라비아와 레반트의 낙타는 단봉 낙타이다. 기원전 701년 산헤립의 유다 원정을 묘사하는 라기스 전투 부조에서 낙타가 화물 운송에 동원된다. 에스라서에 '존귀한 오스납발'로 등장하는 아슈르바니팔 (r. 669-627) 시대의 부조에서 낙타를 타고 전투에 임한다. 에레츠이스라엘에서 낙타의 가축화, 즉 낙타가 인간에게 길들여진 시기는 가장 빨리 잡아도 기원전 930년이다. 아브라함은 기원전 18세기 인물이다.
- 리브카의 캐릭터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저녁 무렵 성 밖 저지대에 있는 우물에서 낯선 사람에게 선뜻 물을 마시게 해 준다. 물동이에 물을 채워서 저 높은 곳에 있는 열 마리나 되는 낙타들에게 달려가 마시게 한다. 리브카의 움직임이 역동적으로 그려진다. 바테마헤르, 서둘렀다는 표현이 여러 번 반복된다. 사막 길을 달려온 대상 행렬이 저녁 무렵 성 밖의 우물에 멈추어 있는 이유는 지쳤기 때문이다. 리브카는 그들의 목마름을 해소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 일이지 알고 있었다. 물정 모르는 규방 아씨가 아니었던 것이다. 영업력도 출중하다. 우리집에 짚과 사료가 있다며 자기 집으로 대상 행렬을 인도한다. 리브카는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이었다. 엘리에제르의 태도도 인상적인데, 그는 리브카의 움직임을 묵묵히 지켜보았다. 하나님이 그의 길을 성공하게 만드시는지 알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하나님께 기도했으면 지켜보며 기다려야 한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이유는 그 결과를 지켜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확신이 든 엘리에제르는 머리 숙여 여호와께 경배한다.
4알리야: 엘리에제르의 설득 24:27-52
- 엘리에제르는 사명을 앞세워 자신이 밥 먹는 건 사양했지만, 낙타와 동행자들에게 쉼과 배부름이 가능하도록 조처가 이뤄지는 것은 기다렸다(32절). 전체 스토리에서 큰 의미가 있을 것 같지 않은 무심한 진술이지만 '태도'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미덕이다.
- 엘리에제르는 아브라함과 맹세, 자신이 우물 곁에서 한 기도, 리브카가 한 일 등을 말하며 리브카가 아브라함의 아들을 위해 선택된 신붓감이라고 주장한다.
- 라반과 브두엘은 이 일이 여호와가 하신 일이므로 자신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리브카를 데려가라고 한다.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리브카는 하나님이 자신을 택하셨다는 믿음에 붙들려 자기 집과 고향과 친척을 떠난 여성이다.
5알리야: 부부의 탄생 24:53-67
- 엘리에제르는 다음날 떠나기를 원한다. 이런 법은 없다.ㅋ 가족들은 반대했지만 리브카는 결심한다. 결국 낙타를 타고 엘리에제르를 따라간다.
- 이츠하크의 거주지는 브엘라헤로이다. 저물 때 들에서 묵상하다가לשוח 낙타에서 내리는 리브카를 만난다. 리브카도 배회하는הולך 이츠하크를 발견한다. 히브리어 라쑤아흐를 '묵상'으로 옮긴 건 지나치다. 일차적인 의미가 돌아다니다는 뜻으로 리브카가 말한 홀레흐와 거의 비슷하다. 좀 더 의미를 담으면 슬픔으로 인해 고개를 숙이는 행위가 되는데 그래서 유대교는 어머니 사라의 죽음 이후 미쯔바인 카디쉬 (죽은 자를 위한 기도)를 했다고 본다. 어쨌든 두 사람은 부부가 된다. 이츠하크는 리브카를 사랑했다.
- 흔히 창세기 네 족장의 이야기는 인생을 세대 별로 묘사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노년, 이츠하크와 리브카는 중년, 야아콥과 라헬은 청년, 요셉은 소년의 모습이다. 그래서 각 족장이 맞이하는 위기도 인생의 그맘때 닥치는 문제점들과 관련돼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는 후손에게 유산을 물려주고 생을 마무리하는 법, 이츠하크와 리브카는 자녀 양육의 어려움, 야아콥과 라헬은 열정적인 사랑과 이로 인한 쓰라림, 요셉은 한치앞을 알 수 없는 인생의 격랑 앞에 선 두려움을 보여준다. 훌륭한 문학 장치이다.
6알리야: 아브라함의 죽음 25:1-11
- 175세 향년으로 아브라함이 죽는다. 후처 그두라의 소생들이 소개된다. 유대교는 그두라를 하갈이라고 본다. 이들은 아브라함의 재산을 받아 이삭을 떠나 동방으로 떠난다. 아브라함의 장사는 이삭과 이슈마엘 두 사람이 함께 지낸다.
7알리야: 톨도트 이슈마엘 25:12-18
- 본격적인 이츠하크의 이야기를 앞두고 다른 세대를 결산한다. 이슈마엘의 톨도트다. 이슈마엘은 137세 향년으로 죽었고, 열두 아들을 두었다. 이슈마엘 자손의 영역은 하윌라에서 애굽 앞 술까지로 나오는데 사울 시대 이는 아말렉의 경계였다 (삼상 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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